영감이 깨어나다
추석 연휴로 5일간 문을 닫기 전날인 토요일 늦은 오후에 지역 도서관을 찾았다. 반납해야 할 책들도 있었고 연휴 동안 볼 책들을 새로 대출받기 위해서였다. 도서관 앱의 관심도서 목록에 저장해 놓은 책들을 서가에서 하나씩 찾아보다가 우연하게 <환상도서관> 책이 눈에 들어왔다. 빽빽하게 서로 밀착해 있는 책들 사이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색바랜 검은색 무광 캔버스 커버에 모서리가 군데군데 까여서 은밀한 하얀 속살을 드러낸 아담하면서도 신비로운 이 책은 세르비아 작가 조란 지브코비치의 소설이다.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는 재작년 봄에 처음 가봤는데 그곳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던 차에 베오그라드 출신 작가가 쓴 소설이라고 하니 반가움과 호기심이 생겨 집어왔다.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전쟁이 끝난 지 30여 년 밖에 안돼서 곳곳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고 또, 장기 체류 시 인간 광우병 감염의 우려가 있어서 국내 헌혈에 제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이는 2025년부터 완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과 모험을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 원래 목적지인 루마니아로 들어가는 항공편보다 베오그라드로 들어가는 비행기삯이 저렴해서 그곳부터 동유럽 여행을 시작하였다.
공항에 내려서 버스를 타고 베오그라드 시내로 들어가는데 사람들의 표정이 매우 굳어있고 무섭기까지 하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 2008년 겨울에 모스크바에 갔을 때도 이 정도로 굳은 표정들은 아니었는데 매우 다른 곳이다. 버스에서 내려서 받았던 첫인상은 담배 피우는 사람이 내가 살면서 다녀본 곳 중에서 가장 많다는 것이었다. 하얀 도시라는 뜻의 베오그라드 이름처럼 하얀 연기들이 자욱했다. 하지만 독특한 디자인의 건물이 내 눈을 사로잡았고 신비롭게 보였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온 듯했다.
아파트 외벽마다 그려져 있는 그림들에서 베오그라드의 예술성을 볼 수 있었다.
베오그라드에서 머물렀던 에어비앤비 아파트는 베오그라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30대 여자 교수의 집이었다. 위의 책은 외국인 여행객들을 위해 방에 있던 것이고 3일을 체류하는 동안에 짬짬이 왼쪽 책을 다 읽었다. 세르비안 멘탈리티를 읽으면서 그들을 개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무섭고 경직되어 보이지만 그들만의 유머도 있다는 사실도. 무척 흥미로운 안내서였다.
베오그라드는 사진의 책에 쓰여있는 것처럼 서유럽 유명 관광지와는 달리 그 영혼을 쉽게 드러내지 않지만 다뉴브 강과 사바 강 그리고 주변 자연의 은은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 글 표지 사진처럼 <환상 도서관> 책 군데군데에 있는 그림들도, 그리고 아파트 책 사이사이에 있는 아래의 그림들도 세르비아의 서정성과 예술성을 보여준다.
언젠가 베오그라드에 다시 가면 서점과 도서관에 가서 마음껏 책을 읽을 것이다. 영어로 된 책이 많이 있기를 기대하며. 그리고 책 읽는 세르비아인들의 분위기 속에 같이 스며들어보고도 싶다.
<환상 도서관> 책의 분량은 많지 않다. 190여 쪽이고 행간도 여유 있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색이 바랜 건지 종이색이 누렇다. 마치 갓 태어난 병아리의 연노란색 날갯죽지 색깔처럼 안온함이 느껴진다. 앤틱해보이는 고전적 은은함이 풍겨나오고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에 닿는 종이 질감은 표면거칠기가 오돌토돌하면서 옛스러운 맛이 있다.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과 달리 여백이 넉넉한데 그 공간 덕분에 상상이 자유롭게 날갯짓을 하고 그 누런 여백에 생각이 머무르며 멍하게 공상을 한다. 이야기 속으로 작가의 상상 속으로 들어간다. 특히 책의 세 번째 이야기, '야간 도서관'을 읽으면서 몽환적 세계로 들어간다.
의식은 원래 자유롭다. 머리 안에 몸의 경계 안에 갇혀있지 않다. 꿈꿀 때만 몸을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을 때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 그걸 인지하게 되니 더 자유롭게 나를 벗어나고 그럼으로써 전에 못 느꼈던 특이한 해방감을 느낀다. 분명 내 몸은 집 밖을 안 나가고 방에 있는데 내 의식은 훨훨 이곳저곳을 다니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처음 느껴보는 신기한 자유로움이다. 이것이구나! 이게 작가가 경험하는 상상의 자유이구나. 글 쓴 지 얼마 만에 알게 된 사실인지.
많은 지식과 정보가 쌓여 그것들을 조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게 아니라, 내 영감 Inspiration이 갑자기 양자 점프하듯이 터져 나왔다. 처음 경험하는 새로운 나, 내 안의 또 다른 나다. 2025년 10월 6일 추석날 오전 9시. 이날은 나의 영감이 알을 깨고 부화한 날이다. 공상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천재보고서(wired to create)>를 읽으면서 무언가 조짐이 있었고 HSP(Highly Sensitive Person) 유형의 못생긴 여류작가와 교류하면서 은연중에 영향을 받다가 마침내 오늘 솟아 나왔고 그 최종 관문은 <환상 도서관>이었다. 상상의 벽이 사라진 날. 기념할만한 책이다.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내 안에서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수시로 영감이 떠오르고 그때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메모장에 바로 메모해 놓거나 브런치에 제목과 간략한 내용을 저장해 놓는다. 어젯밤에는 자려고 불을 끄고 누웠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다시 불을 켜고 폰에 입력을 하고 다시 누웠다가 또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또 불키고 메모하기를 반복했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른 작가들이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 최진영 작가가 왜 오후 시간대로 집필 시간을 고정해 놓는지, 박준 시인이 왜 사람을 안 만나고 고독 속으로 들어가는지.
고독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추석 연휴가 아니었으면 영감이 깨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감사한 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