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작가 아멜리 노통의 소설 『머큐리』. 밀리의 서재에서 다운로드하여 이북으로 절반 정도 읽었다. 그 외에도 파트릭 쥐스킨트의 작품들과 철학자 자크 라캉,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있다. 머큐리 책은 예전에 심리적 거리가 멀고도 먼 어떤 워노브 타인이 한번 언급하였고 책 등껍질만 슬쩍 보았을 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다가 비로소 보게 되었다.
한편 요즘 수강하고 있는 미술사 수업의 강사가 일독을 권한 루트번스타인 부부 저 『생각의 탄생』 책도 읽기 시작하였다. 웬만하면 머큐리를 다 읽은 다음에 시작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책에 손이 가는 것이었다. 대출받아온 책들은 그 책 외에도 많지만 묘한 에너지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책의 첫 챕터에 해당하는 '생각을 다시 생각하기'를 읽고 나니, 내가 왜 이 책에 끌렸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최근의 내 의식의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할 다음 책으로 '느낌, 감정, 직관'의 중요성과 사용법의 비밀을 알려주는 책이다. 더불어 내 아이들 교육을 어떤 식으로 가이드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도 제공해 주는 값진 책이기도 하다. 연말의 학부모 강연과 내년에 할 과학강연도 이 책의 내용을 뼈대로 해서 만들어보려고 한다. 강연 자료를 만들고 공부하면서 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첫 챕터의 주요 내용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교육시스템은 문학, 수학, 과학, 역사, 음악, 미술 등 과목을 철저하게 분리시켜 학생들을 가르친다. 수학자들은 오로지 '수식 안에서', 작가들은 '단어 안에서', 음악가들은 '음표 안에서'만 생각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이것은 '생각하기'의 본질을 절반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적인 사고'는 통찰을 서로 주고받는 데 있어 말이나 숫자만큼 중요하다. 통찰이라는 것은 상상의 영역으로 호출된 수많은 감정과 이미지에서 태어나는 것이므로 '느낌' 또한 커리큘럼의 일부가 될 필요가 있다.
'무엇'을 생각하는가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로
"문제를 풀다가 답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면,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전에 이미 무의식 속에서 해답을 구한 경우다. 나에겐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 나의 확신은 절대적이었지만 말로 설명하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저 그게 답이라고 확신했을 뿐이다."
"언어라는 것, 글로 된 것이건 말로 된 것이건 간에 언어는 나의 사고과정 안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고과정에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심리적인 실체들은 일종의 증후들이거나 분명한 이미지들로서, 자발적으로 재생산되고 결합되는 것들이다. 내 경우에 그 요소들이란 시각적이고 때로는 '근육까지 갖춘 것'들이다."
"과학적 방법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알아낸 것을 과학의 틀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내기 위해 모형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알아낸 다음에 이를 설명하기 위해 수학공식을 가동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후자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다음처럼 설명했다. "직감과 직관, 사고 내부에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심상이 먼저 나타난다. 말이나 숫자는 이것의 표현수단에 불과하다." 이것은 수학이나 형식논리학이 아인슈타인에게 부차적인 수단이었음을 말해준다. "기존의 말이나 다른 기호들(추측건대 수학적인 것들)은 이차적인 것들이다. 심상이 먼저 나타나서 내가 그것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된 다음에야 말이나 기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과학자는 공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창조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첫째, '느낀다'는 것이다. 이해하려는 욕구는 반드시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느낌과 한데 어우러져야 하고 지성과 통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상상력 넘치는 통찰을 낳을 수 있다.
느낌과 직관은 '합리적 사고'의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 사고의 원천이자 기반이다. 모든 학문 분야에서 창조적 사고와 표현은 직관과 감정에서 비롯된다.
직관이 통찰로 이어진다.
대개 예술적인 착상은 비시각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게 때문에 전달 가능한 표현수단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
"말은 느낌을 나타내는 기호일 뿐 그 느낌의 본질은 아니다. 말은 이해를 위한 표현수단이지 느낌의 구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 이사벨 아옌데의 말을 들어보자. "책은 내 마음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뱃속 어딘가에서 떠오른다. 그것은 내가 접근하지 못한 대단히 어둡고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겨져 있으며 내가 그저 모호한 느낌으로만 짐작하는 것, 아직 형체도 이름도 색깔도 목소리도 없는 그런 것이다." 처음 경험한 충동이나 영상, 느낌을 말로 나타낼 수 없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 그것들은 말로 표현된다. 시인과 작가들이 이미지와 느낌을 재현하면서 겪게 되는 문제를 과학자들과 예술가들도 경험하게 된다. 내적인 느낌을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외적인 언어로 변환(번역)해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오직 직관만이 교감을 통하여 통찰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연구의 성과는 면밀한 의도나 계획에서 오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바로 나온다."라고 말했다. 물리학자인 막스 플랑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과학자에게는 예술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실로 과학자와 예술가는 친척관계라 해도 무방한데, 왜냐하면 그들의 통찰은 느낌과 직관의 영역에서 발생하여 동일한 창조적 경로를 거쳐 의식 속에 출현하기 때문이다.
느낌, 감정, 직관의 사용법
소위 '창조적인 작업'을 할 때 과학자나 수학자, 예술가(작곡가, 작가, 조각가 등)들은 우리가 '생각을 위한 도구'라고 부르는 공통된 연장을 사용한다. 이 도구들 속에는 정서적 느낌, 시각적 이미지, 몸의 감각, 재현 가능한 패턴, 유추 등이 포함된다.
"새로운 사실의 발견, 전진과 도약, 무지의 정복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과 직관이 하는 일이다."
"최악의 과학자는 예술가가 아닌 과학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과학자가 아닌 예술가이다."
분리된 과목과 공식언어체계에만 기반을 둔 현행 교육이야말로 '창조적 사고과정'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고 있는 주범임이 분명하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수학적이고 통사론적 논리를 가르치면서도 느낌과 직관의 초논리는 무시한다. 우리는 말과 숫자를 통해 배우고 평가받아왔으며, 또 그것을 통해 사고하는 것을 불변의 전제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학교교육에 대한 이런 잘못된 생각이 더 이상 커져서는 안 된다.
통찰이라는 것은 상상의 영역으로 호출되는 수많은 감정과 이미지 속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던가. 따라서 '느낌'도 필히 커리큘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몸으로 느껴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주목하고 그 느낌을 발전시키며 사용해야 하는지 반드시 배워야 한다.
다행히 의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학문적 사고의 기반으로 직관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창조적 상상력의 기반이 되는 느낌과 감정의 사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은 절대적인 명령과 같다. 그것이 '정신적 요리', 혹은 교육의 요체다.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가 받은 케임브리지 교육이 일방적이고 두뇌만 집중적으로 사용토록 하여 정신을 불구로 만드는 교육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가 받은 교육이 음악, 미술, 연극, 여행 같은 여가활동에 대한 심각한 결핍증을 불러왔고 그 결과 지적 편중과 좁은 시야를 갖게 했다는 것이다.
어제 그제 서울 엄마집을 방문하면서 여동생네도 만났는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재수 중인 딸의 대성 학원 비용으로 한 달에 4백만 원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1 마치고 자퇴해서 검정고시 준비한 이후 벌써 3년째라면서(3년 학원비가 1억 5천만 원...ㅜ.ㅜ..) 속으로 "진짜 미쳤구나.. 자신들의 미래를 갉아먹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큰돈을 들여서 성적 높여서 상위권 대학으로 보내는 게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매우 놀란 표정으로 어이 없어하니 탑티어인 의치대반 학원(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남)은 월 700~800만 원이라고 한다. 자녀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겠다만 그 마음이 정말 아이들에게 좋은 건지는 난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정말 돌았구나!".
그렇게 점수 높여서 좋은 대학 간 다음에 과연 그 아이가 남은 80여 년 인생을 인문학적인 인간으로 성찰하면서 살 수 있을까? 1억 5천 학원비로 비트코인 사면 그 아이 10년 후에 안 하고 싶은 거 안 해도 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몇 달 전에 내가 비트코인 투자 말할 때는 펄쩍 뛰더니 이제는 기존 보유주식들 비트로 갈아타려고 한다고 말하는 동생. 투자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쓰지 말아야 할 과도한 지출을 줄이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왜 사는 걸까?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가는게 그렇게 중요한가? 교육이 뭔가. 동생은 프리랜서이고 남편은 대기업 다니는 월급쟁이인데 강남 갑부들 하는 짓 따라서 그렇게 무리해서 펑펑 학원비 써대면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너 정말 미쳤구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내 아이들.. 해외여행은 어느 또래 친구들보다도 다양하게 경험시켜 주었고, 스키도 잘 탄다. 하지만 학교 공부를 위한 과외와 학원비는 한 번도 대준 적이 없다. 그럴 돈도 없거니와 그럴 가치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어제 엄마 집에 문제풀이집을 가져가서 누나와 동생이 책상을 마주 보고 다정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할머니가 보시고는 무척 흐뭇해하셨다. 형제들 간에 사이도 굉장히 좋고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어 있다. 이혼 가정을 많이 보고 들으셨지만 내 아이들처럼 문제없이 잘 자라고 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미소 지으신다.
며칠에 한 번은 써야 할 것 같은 일종의 관리자 마인드, 그리고 독자는 몇 안 되지만 아주 특이하게도 내 글을 기다리는 분들이 혹시라도 있을지 몰라서 자기 전에 한 편 끄적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