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혁명이다

문제의 장면

by 걸침

그녀는 유난히 헤밍웨이를 좋아했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는 마이애미에서 차를 빌려 무작정 키웨스트로 달렸다. 언제 돌아올지 어디에 갈지는 그다음의 일이다. 젊음은 그랬다. 적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뜨거웠다. 멕시코만의 코발트 바다색처럼 아름다웠다. 잉그리드 버그먼처럼 신선했다. 그녀는 말했다. 땅 끝에 가면 나에게 줄 것이 있다고. 사실 나는 당시 무척 힘든 시기에 있었다. 무언가를 도전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반복되던 때였다.


어쨌든 우리는 세븐마일즈 브리지를 건넜다. 다리의 길이가 10킬로가 넘는 꿈의 다리이다. 그 아래 너울대는 진주빛 잔영은 이미 꿈속의 세계였다. 그녀는 탄성을 지르다 못해 이미 지친 모습이다. 그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우리는 그렇게 달렸다. 늦은 오후 키웨스트에 도착했다. 날씨는 더웠으나 습하지 않았다. 야자수는 더 높아 보였고 하늘은 뒤로 물러나 있었다. 우리는 끝으로 갔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에 표지판이 서 있었다. 저 앞이 바로 쿠바라는 뜻이다. 90마일만 가면.


갑자기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한낮의 트럼펫 소리. 잡티 하나 없는 하늘과 바다가 잡음 하나 없는 소리와 하나로 섞여 환각이 되고 환청이 된다. 몸이 저 하늘 위로 날고 바닷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 옆의 기념품 가게에는 체게바라의 셔츠가 걸려있다. 갑자기 트럼펫 소리가 구슬퍼졌다. 중미, 남미에서 민주정부를 타도시키는 강대국에 환멸을 느낀 체게바라, 그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고함처럼 들렸다. 헤밍웨이 집을 들러 그의 체취를 묻힌 다음 우리는 비치로 나갔다. 바닷바람이 귓불을 가볍게 스친다. 모래사장에 넣은 발이 미안하게도 아늑하다. 비릿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둘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낚시광이었던 헤밍웨이가 즐겼던 바다. 커다란 고기를 상어에 뜯기면서도 끝까지 해안까지 끌어왔던 고집. 험한 전쟁터를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던 종군기자로서의 기백이었을까. 그러던 그는 왜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까.


석양이 진다. 비경을 놓칠세라 유람선을 타는 사람들.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조용히 내 옆구리에 카드 한 장을 끼워준다.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는 펼쳐보라는 눈짓을 한다.

“지금은 네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헤밍웨이.

무언가 쿵하고 머리를 때린다. 한참을 허공만 쳐다보았다. 얼마큼 지나서였을까 저만치 걷고 있는 그녀가 눈에 띈 것은. 그녀를 좋아할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환상적인 노을을 더 즐기고 싶어 하는 그녀를 달래 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다시 마이애미로 돌아왔다. 그 긴 세븐마일즈 브리지를 지나서. 아까 헤밍웨이의 집에서 읽은 글귀가 맴돌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는 것과 자신도 특별하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몇 년이 흘렀을까. 다시 마이애미를 거쳐 바하마로 크루즈를 떠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 그녀와 지났던 세븐마일즈 브리지가 생각났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녀의 웃음이 떠 올랐다. 사랑의 고통을 회피하고 자신만을 생각했던 그때 모습이 부끄럽고 씁쓸했다.

트럼펫 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 같기도 울음소리 같기도. 우리를 스쳤던 바람만 여전히 귓불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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