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빼기이다

문제의 만남

by 걸침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미아리 사창가였다.

아르스름한 붉은색 조명하에 한 두 평 남짓 쇼윈도가 늘어서 있는 곳. 동화 같은 박스에서 한껏 치장한 요염한 여인네들이 오랜만에 지나가는 남정네에게 윙크를 해댄다.

“아니, 아직도?”

나는 눈은 의심했다. 장 무슨 여성 경찰서장이 없애겠다고 한 사창가가 아직 번듯하게 영업을 하고 있다니. 같이 동행하던 강화가가 슬쩍 눈짓을 건네며 야릇한 웃음을 짓는다.

“낯익은 곳이시겠네. 좋으시겠어.”

뻘쭘해하는 나를 발길이 알았는지 걸음의 속도를 올려주었다. 우리는 주머니에서 겨우 약도를 꺼내 미로 같은 골목을 몇 번 헤매다가 드디어 도착했다.

“하필 이런 곳에서 전시를.”


같은 미술반인 강화가 친구의 전시장이었다. 현재 재개발 과정으로 사창가를 없애는 중이고 아트그룹에서 반 정도 비워진 곳을 빌려 전시장으로 활용하는 프로젝트에 참가한 것이라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데서 전시하는 작가라면 대가 센 친구겠지. 나는 내 나름대로 상상하며 컴컴한 방으로 들어섰다. 옛날 사창가 골조가 그대로이고 몸 하나 누일 수 있는 방마다 한 작품씩 전시가 되어있다. 작가 친구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 추측과는 다르게 무척 여리게 생긴 화가였다. 그러나 전시장을 한 바퀴 돌아본 다음에 다시 본 그녀는 그 속이 단단하고 야무진 정신으로 감싸져 있음을 알았다. 우선 사창가에서 힘겨운 삶을 이겨나간 여인들의 영혼을 달래주려는 그녀의 마음을 읽었다. 전시장에서 일차 놀란 나는 그녀의 작품에서 또한 번 번개를 맞은 듯했다. 선 하나로 작품을 끝냈다. 과감했다. 단순했다. 용감했다. 당시 나는 그림반에서 유화를 주로 그리며 작품소재나 방향에 대해 고민을 하던 차였다. 무엇을 더해볼까 하는 생각에 잡혀 있을 때였다.


전기도 끊어진 곳이라 촛불을 켜놓고 전시 중이고 겨우 엉덩이를 붙여 차 한잔을 얻어 마셨다. 어둑한 데서 보는 그녀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촛불그림자에 따라 환상적으로 보였다. 얘기해 보니 나와 통하는 점이 꽤 있었다. 동화 같은 단순한 터치의 김점선을 좋아하고 단색화가 이우환을 좋아했다. 일본 나오지마 섬의 안도다다오가 지은 지중미술관과 이우환 미술관을 다녀온 것도 같았다. 그곳 여행기를 들떠서 얘기하는 그녀의 이빨이 어둠 속에서 더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같이 간 이화가는 손님처럼 듣고만 있는 처지였다. 그랬다. 나도 그들처럼 단색화나 심플한 터치에 관심이 많았으나 차마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그렸다.


예술이 무엇인가. 밑바닥에 감춰진 본능을 의식 위로 끌어올려 점잖게 꼬집는 것이라 했다.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 했다. 그녀는 의식밑에 있는 감각을 과감히 꺼낼 줄 아는 용감함이 있었다. 김점선이 누군가. 전시 후에 자기가 아끼는 작품을 누가 사 가지 않아서 감사한 마음으로 울었다는 작가 아닌가. 이우환이 누군가. 동양화에 철학을 공부한 작가로 전혀 다른 성질의 한두 개의 소재로 단순한 놀람을 주는 작가이다. 안도가 미술관까지 지어준 한국의 작가. 더하기에 급급했던 내게 빼기를 가르쳐준 그녀는 내 혼까지 빼놓았다. 아니 그동안의 내 그림세계를 통째로 빼 버렸다. 그래서였던가. 가지고 있던 책들이나 집안의 물건들을 수시로 내다 버리기 시작한 것이. 집에서도 여러 가구들을 빼고 위치를 낮췄더니 집이 높아지고 넓어졌다. 그녀의 작은 그림에서 광활함이 보이듯이 내 생활 자체가 여유로워졌다. 방 한편에 놓아둔 그녀의 그림이 오늘도 나에게 말을 건다.

“오늘은 더 뺄 것이 없나요?”

마음이 넉넉해지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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