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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똥밭 Aug 03. 2020

3화. 당신에게 이 울음은 소음인가?

온난화, 미세먼지, 미세 플라스틱 그리고 펜데믹의 시대에서...

신비한 보라색과 살며시 스러져가는 황금빛의 절묘한 그라데이션...  자연은 누굴 위해 이렇게 아름다운가?

주말 투잡이 끝나고 일요일 늦은 밤, 집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장마철 폭우, 높은 습도에 체력은 이미 바닥이 났고  불쾌지수만 남았다. 은근한 짜증을 억누르며 발걸음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인도변 도로에서 간헐적으로 귓전을 때리는 자동차, 오토바이의 엔진 소음은 듣기 싫으면 빨리 움직이라 재촉한다.


'어서 가서 씻고 먹고 자자'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집과의 거리를 좁혀가던 중 저쪽 앞에서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하는 소리가 들렸다. 폭력적인 기계 소음 속을 뚫고 분명하게 들리는 정겨운 울음소리... 분명 개구리의 울음이었다. 아니... 너무 오래전에 들어 아련했지만 '맹꽁이' 울음소리였다.

(줸장... 생명체라고는 풀때기 말고는 싹 다 밀어버린 이런 도시에 보호종인 맹꽁이라니... 이게 실화냐?)


아파트 사이에 미처 개발하지 못해 잡초가 우거진 공터, 그곳에는 장맛비에 여기저기 웅덩이가 만들어졌고 그 속에서 맹꽁이로 추정되는 녀석들이 우렁차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말아 비틀어진 연못에서도 울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다고.

이 신도시로 이사 온지도 벌써 십 년, 십 년 전만 해도 아직 입주 세대가 적다 보니 해충 방제가 - 말이 해충 방제지 해충과 곤충은 모두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 - 기존 도시만큼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여름 곤충들의 천국이었다.


내 가게의 간판에는 왕거미 집을 지었고 조성된 화단과 잔디밭에는 사마귀를 기본으로 논에서나 볼 수 있던 초록색 메뚜기들이 뛰어다녔다.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면 파리가 따라 들어오는 게 아니라 어깨와 등에 풍뎅이가 붙어 들어왔고 그걸 본 우리 애들은 도시 샌님들 답게 패닉 상태에서 자지러졌다.


단지 안의 인공 연못에서는 오만 개구리들이 모여 합창을 했다. 아침이면 정말 어느 깊은 산골에서나 들을 수 있던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수 있었다. 아직 입주가 본격 진행되기 전이다 보니 밤에는 다른 도시에서는 당연한 각종 인공적 소음도 거의 없었다.

여름철 가로등에 단 한 마리의 날벌레도 없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은 몇 년 가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입주가 되면서 방제 활동이 시작되었고 메뚜기와 사마귀, 풍뎅이는 언젠가부터 모두 사라졌다. 얼마나 방제를 잘했는지 여름밤 가로등 밑에는 단 한 마리의 날벌레보이지 않았다. (이건 절대 정상이 아니다.) 당연히 개구리울음소리도 현저하게 사라져 갔다. 그런데 거기에는 더 잔인한 이유가 있었다.


몇 년 전이었을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딸이 방과 후 씩씩거리며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학교에 설치된 연못에 개구리들이 모여 살면서 노래를 부르자 바로 옆 아파트에서 민원이 들어왔단다.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니 연못을 없애 달라고... 그래서 학교는 어쩔 수 없이 연못의 물을 빼고 개구리들을 말려 죽였다고 한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소녀들에게 이 사건은 꽤나 불쾌하고 슬픈 사건이었다.

인간이 다듬은 어떤 고가의 보석도 이와는 견줄 수 없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인간은  자연 속에서 수만 년을 진화해왔다. 저런 생물들과 같이 공존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녀석들의 울음소리를, 요즘 유튜브에 횡횡하는 ASMR 삼아 잠들고 새들의 지저귐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수만 년을 말이다. 이런 기계 소음 속에서 살았던 건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워 잘 수가 없다니... 이들은 외계인인가?


심야에 터지는 고가 외제차의 폭음 소리와 유흥가의 소음은 견디어도 여름철 한때 울리는 개구리들의 구애의 합창은 참지 못하겠단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또 있다.


딸내미가 중학교 시절 언젠가부터 학교 운동회를 주변 공설운동장에서 한다고 했다. 내가 웬 유난이냐고 자 우리 딸아이는,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운동회 하는 날 시끄럽다고 민원을 넣어 할 수 없이 공설운동장을 돈 주고 빌려서 한다고 했다. 난 그저 기가 막혔을 뿐이다.


내가 나이 든 꼰대라서 요즘 세태를 이해를 못하는 건지는 모르. 적어도 내게 학교 운동회는 동네 행사였고 운동장에서 들리는 활기찬 아이들이 목소리는 우리 아이들이 건강하고 그 지역 사회가 건강함을 방증하는 '소리'였다. 그런데 그걸 못 참는단다. 단 하루 그것도 주간의 몇 시간을 말이다. 이게 정상인가?


얼마 전 내 아내로부터는 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코로나 사태가 이어지자 대부분 어린이집 아이들이 바깥나들이는 불가한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모 어린이집에서 궁여지책으로 건물 옥상에 작은 물 놀터를 만들고 놀았다고 한다. 그러자 이웃에서 시끄럽다 민원이 들어왔 심지어 기관에 민원을 넣었다고 한다. 도대체 이게 제정신인가?


도대체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을까?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일들, 이런 극단적인 이기심이 지금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인 듯 이 사회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마스크가 일상될줄을 누가 알았을까?

내 인생에 펜데믹이란 대 재앙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민학교 절 이불속에 누워 어린이용 과학잡지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를 읽으며 "30줄에 죽으면 너무 이른 거 아닌가.." 하는 공포에 휩싸이긴 했어도 미세먼지에 전염병의 창궐로 마스크를 끼지 않으면 외출이 불가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신은 개구리 소리가 거슬리는가? 좀 미안한 말이지만 어쩌면 당신은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수만 년을 공존한 생명체의 소리가 거슬린다면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시챗 말로 중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절이 싫다고 절에 불을 지른다면 결과는 뻔한 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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