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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Jul 22. 2021

단편소설 :
봄이 기다리겠죠 下

「효원」 131호


-130호의 上편에 이어-




머리가 멍하다. 쥐가 난 것 같은 느낌이다. 몸 어딘가에 묵혀있을 피 응어리를 풀어내고자, 줄기차게 기지개를 켠다. 몸에서 힘을 풀 때, 가벼운 탄식이 목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격한 스트레칭이다. 막혔던 곳이 뚫린 듯, 관자놀이 부근이 꿈벅거린다. 뿌옇던 시야가 점차 뚜렷해진다. 마치 초점이 나간 카메라 조리개를 조여 맞출 때의 느낌이다. 하긴, 눈의 원리를 본떠 만든 것이 렌즈이니,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이 당연한가 싶다.





창밖은 밝다 못해 쨍하다. 정오가 넘었구나…. 아침 햇살은 이렇게까지 강렬하지 않다.





머리맡으로 손을 뻗자 둔탁하고,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전해진다. 이제는 나에게 너무도 익숙한 존재가 된 필름카메라의 감촉이다. 이놈 덕분에 얼마나 많은 기억들을 보전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 익숙함을 넘어선 필수 불가결의 물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게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필름을 모두 사용하고 현상, 스캔까지 마쳤기에, 카메라의 셔터 룸은 비어있다. 얼른 새 필름을 끼워 넣고는 렌즈 마개를 연다. 오늘 내가 일어난 시간이 아침을 훌쩍 넘긴 정오라는 사실을 기록해야 하기에.





기억을 담는 과정은 그동안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창문에 쳐진 얇은 블라인드 너머의 햇빛을 찍는다. 긴 마름모 형태를 한 블라인드 틈새, 거기에 맞춰 비슷한 모양으로 일렁이는 햇살들. 그 모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리개를 조작한다.





‘나는 오늘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이 사실을 나타낼 수 있는 장면이면 충분하다. 의도적으로 조리개를 열어 빛 망울을 만드는 등의 기교는 쓸데없기만 할 뿐이다. 당초에 내가 사진을 찍는 기억을 담기 위함이지 않은가. 그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며, 셔터를 누를 뿐이다.






아침이라는 단어에는 하루의 첫 끼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 그렇다면 첫 끼를 점심시간에 먹을 때는 이른 점심을 먹는다고 표현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면 늦은 아침? 내가 지금 먹으려는 것이 둘 중에 어떤 호칭으로 불려야 마땅한지는 논외로 두고, 중요한 것은 냉장고가 비었다는 사실이다. 장을 보러 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예상치 못한 스케쥴이 생기는 것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가장 먼저 카메라를 챙긴 후, 아무 옷가지를 집어 들고는 팔다리를 구겨 넣는다. 슬리퍼를 신는데, 문득 거울에 내 모습이 눈길을 끈다. 신경을 쓰지 않은 티가 나는 웃옷과 바지의 미스매치. 그 와중에 앤틱한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는 행태가 우습게 느껴진다. 그 모습을 찍는데, 뷰파인더에 눈을 대며 자연스럽게 따라 숙이게 되는 머리가 몹시도 거슬린다. 머리카락을 자른 지 얼마나 되었는지, 덥수룩하게 자라고는 떡이 졌다. 방에서 모자를 꺼내 쓴 뒤, 그 모습을 다시금 담는다. 찰칵.





정오가 넘어간 시기의 햇빛은 찹찹한 공기와는 별개로 뜨겁고, 메탈로 만들어진 구제 카메라는 열에 쉽게 덥혀진다. 내가 좋아하던 서늘한 감촉은 어디 갔는지…. 미지근한 쇠를 계속해서 잡고 있다 보면 습기가 차고, 그 어디에도 흡수되지 않은 채 흘러내리는 땀은 불쾌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메라를 놓을 수는 없다. 마트로 가는 길을 찍지 않으면 안 되기에. 내가 버스를 타고 마트에 갔는지. 오늘처럼 걸어서 가는 날이라면 어느 골목을 거쳐서 갔는지, ‘모두’ 남겨야 한다. 밤에 이 필름을 들여다볼 나는, 지금 이 순간의 나와는 상당히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이렇듯, 요즘의 나는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모습을 강박이라고 불러야 할까.





하지만 사진을 통해 기억을 구체화하기로 마음먹었고, 또 그것을 시행하는 입장에서, 구멍 뚫린 기억을 마주하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없다. 생각해보라. 아예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기억의 구멍에는 자연스레 다른 것이 흘러들어올 틈새가 있기 마련이다. 그 시간에 물을 마셨든 토마토를 씻었든, 어쨌거나 존재하는 순간임에는 분명하지 않나. 하지만 사진으로 기억을 남기게 된 이상…. 필름과 다음 필름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은 메울 수가 없다.





그 이유로 나는 최대한 부지런히, 또 자세히 사진을 찍는다. 절벽 앞에 선 사람의 몸이 굳듯이, 새까만 기억의 구멍을 마주했을 때의 혼란. 나는 그것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마트에 가는 동안 내 양옆으로 즐비한 골목들이 꼭 크레바스 같이 느껴진다. 남극의 한 가운데서 거대한 입을 쩍하고 벌리고는, 모험가들이 발을 헛디뎌 주기를 바라는 얼음의 구덩이. 이를 떨쳐내고자, 지나가는 골목마다의 사진을 남긴다. 전봇대마다 다리를 들고는 소변을 누는 똥강아지처럼, 내 발걸음이 닿았다면 어느 곳이든지 족적을 남긴다. 전봇대에 얼룩을 남기느냐, 필름에 얼룩을 남기느냐만 다를 뿐.






장을 넉넉하게 보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 만남은 뜬금없이 이뤄졌다.





마트로 갔던 길과 마찬가지로, 골목길들의 족적을 넘기면서 걸음을 옮기고 있었더랬다. 세 번째 골목이었을까.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몸의 반은 희고, 나머지 반은 옅은 갈색 털로 뒤덮인 고양이. 귀엽다는 인상이 있었지만 그게 끝이었다. 어차피 찍을 골목 사진, 그 배경에서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골목을 찍고자 목에 걸린 카메라를 정돈하는 찰나. 고양이 옆으로, 한 여자가 다가왔다.





고양이에게 물을 주는 것일까. 가방에서 작은 생수를 꺼내고는, 그릇에 따라 고양이에게 건넨다. 둘은 꽤나 자주 보는 사이인 듯, 물을 건네받은 고양이가 곧바로 머리를 숙여 물을 마신다. 찹찹거리는 고양이와 그를 쓰다듬는 한 여자, 그리고 그 광경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나.





그때 문득, 요상한 생각이 찾아들었다. ‘저들은 이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고’





어째서? 내가 찍어야 했을 대상은 분명히 골목이었다. 이 좁디좁은 골목. 저 고양이는 ‘골목’이라는 메시지에 찍혀 있는 작은 점 같은 존재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오히려 지금, 당초에 내가 기록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흐릿해지고, 그 중심에는 고양이와 한 여자가 있다. 아니 ‘그녀’만이 있다. 내가 찍어야 할 것은 골목이 아닌 저 여자다. 골목은 배경일 뿐이다.





생각이 이렇게 전환되는 것은 내가 차마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이뤄졌다. 엇갈려 있던 기차선로가 레버 하나를 당김으로써 찰칵! 하며 알맞게 맞물려지듯이, 그 흐름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나머지, 거기에 맞서는 것은 마치 급류를 거슬러 헤엄쳐가는 행위처럼 어리석게까지 느껴졌다.





그녀는 아직 그 자리에 있다. 눈을 당겨 그 모습을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본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런가, 그녀 이전에 골목 입구의 쓰레기 봉지가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이래서는…. 나는 더 가깝게 다가가야 했고, 곧 그녀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안 될 거리까지 와 버렸다.





“저기…”


“(…!)”





저질러 버렸다. 기왕 시작한 대화, 이어가고자 마음먹는다. 아니, 애초에 사진의 주인공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혹시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 해서요”


“아… 찍어드릴까요?”





“아! 아뇨, 제가 찍어드릴게요”


“(…)”





그녀의 표정을 보니,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사실이 뒤늦게 다가온다. 장황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그게-.





“…그래서, 저랑 봄이 사진을 찍고 싶으시다는 거구나”





말끝에 후후하고 따라오는 웃음소리가 나지막하다.





“봄이요?”


“아, 이 고양이 이름이 봄이에요. 제가 마음대로 붙인 이름이긴 하지만요”





이놈의 어떤 모습에서 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을까. 털 모양? 아니면 둘만 있을 때의 애교가 살갑기라도 한가? 생각이 더 깊어지기 전에,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곧 겨울이잖아요, 겨울철 길고양이들한테 가장 절실한 게 물이거든요”





그래서 물을 좀 주고 있었죠-하는 그녀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 고양이가 작게 하품을 했다. 입가의 털이 물기를 잔뜩 머금어 촉촉하다.





“아 말이 너무 길었죠? 봄이 보러 오는 것도 오랜만이라… 조금 기분이 업 됐나 보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나에게서 몸을 돌리고는 한동안 말없이 고양이, 아니 봄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모습을 한동안 멀뚱히 쳐다보다, 문득 그녀가 사진을 찍을 시간을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마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배려겠지.





뷰파인더를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도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던 탓인데, 고양이와 그녀 간의 거리 차가 존재했기에 둘 모두에게 깨끗한 초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렌즈 몸통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나는, 결국 그녀에게 온전히 핀을 맞추기로 결정했다.





“그럼… 찍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듯, 그녀의 긴 머릿결이 조금 흔들리는 모습이 보임과 동시에 셔터를 눌렀다. 찰칵.





그녀는 셔터음이 울리고 난 아주 잠시 후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그녀가 평소에도 사진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그렇지 않은가. 카메라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셔터음 전후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선명한 사진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마련이다.





“잘 나왔어요? 어디 한번 봐요”





아차. 필름 카메라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구나.





실은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그래서 당장 결과물을 보여드릴 수는 없다고…. 사정 설명이 이어졌다. 이야기를 듣는 그녀의 표정이 적잖이 실망스러워 보였던 탓이었는지, 굳이 안 했어도 됐을 사족까지 덧붙여졌다.





“이게, 오늘 밤이면 결과물이 나오거든요. 메일 주소 알려주시면 보내드릴 수 있어요”


“아 그렇구나”





그녀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메일 말고 실물로 주세요”


“(…)”





“그래도 필름인데, 파일 말고 사진으로 받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는 따라오는 예의 웃음소리. 후후하는 것이 듣는 사람도 편해지는 울림이다. 그녀가 사진에 아무런 불만 없이 응해준 것. 사진에 대한 거부감이 적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본래 성격이 밝은 탓도 있으리라. 생각이라도 읽은 걸까. 내 추측이 맞다는 듯, 그녀가 다시 한번 웃었다. 후후.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스캔이 마무리되면 연락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싱숭생숭한 감정이 샘솟았다. 왜인지 정확히는 알 길이 없으나, 하루 간에 있었던 일들을 나열해보았을 때, ‘그녀’와의 만남이 이 기분에 영향을 미쳤음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정오까지 늦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오니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졌다. 잠시 쉬었다 장 보고 온 것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소파에 앉아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순간 흐릿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내려놓고 잠에 빠졌다.






꿈을 꾼 것 같기는 한데, 그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어떠한 색채들이 형형하게 빛났고, 땀을 말릴 정도의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는 정도. 이걸 꿈을 꿨다고 말할 수나 있을까도 싶다. 차라리, 갑작스럽게 잠에 드느라 마루의 형광등을 끄지 못했고, 곁에 켜둔 선풍기가 내내 돌아갔음을 잠결에 느꼈다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정말로 그랬나?’





잠에서 깨고 난 직후는 늘 상 그랬듯이 멍하다. 찬물로 샤워를 한번 해야겠다. 몸을 닦고 나니, 어질러져 정리되지 않은 집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냉장고에 채 넣지 못한 우유와 채소들을 정리한다. 깔끔해진 부엌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은 뒤, 방으로 향한다. 하루를 마무리 할 시간이다.





하루 동안의 단편적인 기억들을 모아 실체로 만드는 것. 필름을 현상하고 스캔하여 뽑아내는 과정은 그동안 많이도 반복해왔다. 검은 암백 안에 손을 넣는다. 필름을 꺼내기 위해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자면, 무척이나 헤맸던 첫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땐 얼마나 고생했던가. 이제는 능숙하게 필름을 분리한다, 그 형태가 손에 익은 탓 일게다.





용액들을 차례로 들이붓는다. 여러 용액들을 필두로, 마지막의 안정제가 필름 겉을 훑는다. 모든 과정을 마친 필름이 탱크에서 나왔을 때는,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꼭 휴대폰 카메라 필터를 씌운 듯이 네거티브한 빛을 띤 필름들.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은 색 반전이 된 형태의 기억이 아니다. 그들에게 본래의 색을 찾아주기 위해, 필름들을 잘라서 말리고는 포토 스캐너에 밀어 넣는다.





포토 스캐너가 돌아간다. 위잉- 그리고는 철컥. 앞선 과정들을 반복함에 따라 익숙해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긴장되는 순간이다. 오늘의 나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스캐너 입구에 손을 가져댄 채 기다리자, 곧 따끈한 사진지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외출 동안 찍은 사진이 많아서일까. 스캐너가 돌아가는 소리가 쉽사리 멈추지 않는다. 한 번에 모든 사진들을 넘겨보자는 생각을 접고, 그동안에 프린트되어 나온 결과물들을 보기로 한다.





첫 사진에는 블라인드 너머의 햇살이 담겨있다. 햇살이 강한 것을 보니 아침은 아니고…. 그래 난 오늘 정오에 일어났구나.





위잉 – 그리고 철컥.





다음은 냉장고 사진이다. 안이 휑하게 비었다. 김치를 담을 때나 쓸 것 같은 투박한 반찬통 몇 개가 정리되어 있는 모습. 각을 맞춰 깔끔하게 늘어진 모습 때문인지, 안 그래도 쓸데없이 넓기만 한 냉장고가 더 비어 보인다. 나는 아무래도 오늘 장을 보러 가지 않았을까. 만약 냉장고의 반찬통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면, 냉장고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초등학생들이 마구잡이로 뛰어가고 있는 중에는 빠진 아이가 있는지 알아보기 어렵지만, 점호를 받는 군인들의 대열에서 보이는 구멍은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계속해서 일관되게 사진들을 뱉어내는 포토 스캐너 소리를 뒤로, 내가 보낸 하루의 윤곽이 차츰 잡히기 시작한다. 사진을 다음 장으로 넘긴다.





내 모습을 거울 너머로 찍은 사진이다. 아무 옷이나 주워 입은 듯, 웃옷과 바지의 매치가 형편없다. 거기에 고상한 필름카메라를 들고 있자니…. 쓴웃음과 함께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그리고 다음 장.





“(…)”





방금 장과 똑같은 구도와 옷차림, 달라진 것이라고는 머리에 모자를 하나 쓰고 있다는 점 하나가 전부다. 아무래도 모자를 쓰고 와서는 다시 찍은 것 같은데-





‘내가 이 모자를 왜 썼지?’





뭔가 꾸미고 나가고 싶었나? 그렇기에는 모자랑 같이 입은 옷이 영…. 혹시 내가 갑작스럽게 모자를 쓰고 싶었던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 머리를 싸매어 봐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는다. 음, 정말로 꾸미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세삼 나의 패션 센스가 영 좋지 못함을 깨닫는다.





조금의 의문을 남긴 모자 사진과는 달리, 뒤의 사진들은 너무도 정갈했다. 집에서 나와 걸음을 옮기면 나오는 골목들이 연달아 이어진다. 그 끝은 집 근처의 대형 마트. 우유랑 채소를 담는 사진들을 담고, 계산한다. 마트를 나서면서는 꽤 두둑한 봉투를 들고 있다.





포토 스캐너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 배출구에 조금 쌓여있는 사진들을 가지고 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골목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래도 마트에 가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온 모양이다. 그리고 드디어 나타난 사진 한 장.





‘그녀’가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다. 어깨를 넘긴 머릿결은 산산한 바람에 날려 흔들린다. 그리고 보이는 조금은 앙다문 입술. 사진을 찍을 때는 몰랐는데, 그녀도 낯선 사람이 뜬금없이 다가온 것에 약간이나마 긴장을 한 모양이다. 그 사람도 참. 후후거리면서 웃을 때는 언제고. 아무튼, 스캔까지 마무리했으니, 이제 연락을-





“…어, 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충격은 오히려 순식간에 닥쳐왔다. 두꺼비 집에서 퓨즈가 나가듯이 팍.





‘내가 이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나는 여러 골목을 지나가다 고양이와 눈을 마주쳤고,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사진을 찍었고, 사진을 건네주기로 약속했다.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녀를 찍은 사진 앞뒤로는 좁은 골목만이 늘어져 있고, 그 어디에서도 내가 그녀와 그런 약속을 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떠올리는 이 기억은 또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이상한 조각에 불과한 걸까?






늦잠을 자는 바람에 들었던 어머니의 꾸중이, 이른 아침 울린 자명종을 껐던 기억으로 변했듯이. 물을 마셨던 기억이 토마토를 씻었던 것으로 변하듯이.





머리가 혼란스럽다. 간결한 동작으로 하나하나 완성해나가고 있던 퍼즐이 흐트러지고 있다. 혼잡한 지하철역에 남겨진 아이의 심정이 이러할까. 양옆의 개찰구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 가고, 그 중심에 놓인 나는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사진 나왔어요? 연락이 없으셔서]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구 헝클어진 퍼즐을 다시 맞추느라 며칠이 흐르고, 나는 먼저 연락을 하지 못했다. 하지 않았다는 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제껏 정립해왔던 나만의 생활 방식이, 그녀를 만남으로 인해 완전히 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퍼즐을 완전히 들어내고 처음부터 맞추기에는, 너무 힘든 걸음을 해왔다.





그래서인지, 지난 며칠의 난 본래의 방식에 더욱 몰두했다. 어떤 물건을 손에 들면, 그 모습을 찍었다. 마루의 의자에 발가락을 찧었을 땐, 의자 모퉁이에 발가락을 다시금 가져다 대고는 렌즈를 들이밀었다. 포토 스캐너가 돌아가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출력된 사진을 집착스레 바라보고, 거기에서 기록된 정보를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에.





때문에, 그녀를 만나러 가는 약속 길에서 더욱더 마음을 다잡았다. 흐름을 잃지 말자고, 내가 살아가기로 한 방식을 고집스레 고수하자고. 그럼에도 굳이 그녀를 만나러 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슴이 요상하게 싱숭한 것을 부여잡고는, 나는 단지 사진을 건네주러 가는 것이라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어 뭐야, 머리 잘랐네요?”


“…네?”





아니 전에 봤을 때는 머리가 이렇게 길어서는- 하고 그녀가 덧붙인다. 아! 그러고 보니 그녀를 마주친 날, 떡진 머리를 가리느라 모자를 썼었지.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생각나지 않았던 이유가, 이제야 확실해졌다.





“짧은 머리가 훨씬 나은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





후후하며 따라오는 예의 웃음소리.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다 화들짝. 또 이렇게 되어버려서는 곤란하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 사진 드릴게요”


“아 사진! 맞지 참, 얼른 봐요”





그녀는 사진이 나름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렇게 필름으로 나오는 사진은 너무 오랜만에 본다고, 감촉이 너무 신기하다고, 그런데 봄이한테는 초점이 조금 어긋난 것이 아쉽다며….





그렇게 조잘대는 그녀를 앞에 두고, 나는 주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카페 테이블이 나무인 것부터, 내가 주문한 음료가 카페 라뗴라는 것까지.





계속되는 그녀의 이야기에 짧은 대답만을 하며, 그렇게 계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역시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때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고개를 들자.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은 표정으로.





“…뭐에요, 재미없게”


“(…!)”





내 행동이 무례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찍어댔던 것은, 어떠한 류의 절박함 때문이었나. 이미 한차례 나의 퍼즐이 깨어진 것,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만나고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 거기에 대항하고 싶다는 치기 어린 오기가 아니었을까.





“아 그게…”


“됐어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도 따라서 엉거주춤히 엉덩이를 뗀다. 기분이 많이 상했음이 분명한지, 그녀가 더 이상 웃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왜 그렇냐면요-





“아뇨, 됐다구요. 아니… 난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나왔나?”





적당한 변명을 골라서 해야 할까-하는 생각은 들어가고, 몸을 돌려서 짐을 챙기는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만이 떠오를 뿐. 입이 열렸다.





“미안합니다”





그녀가 몸을 돌리고는 나를 바라본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래도 제 사정을 조금 말씀드리고 싶어요”


“(…)”





충동적으로 끓어오른 감정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그녀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는데, 지금 내 상태를 말하는 언어는 다소 격하기까지 하다. 내가 사진을 찍게 된 이유에서부터 당신을 만난 날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겪게 된 혼란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게 됐다는 것….





이야기가 끝나자 정적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편하지만은 않은 고요함이었다. 내 얘기를 들은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이윽고 그 차분한 표정의 끝에 위치한 입술이 열렸다.






오늘은 그녀를 만나는 날이다.





카페에서의 만남이 끝난 후, 어떻게 다음 약속을 잡게 된 것인지…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조금은 어이가 없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왔을 때, 다행이라는 생각을 속으로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또 얼마나 당황스러웠던가,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이어진 다음 약속에 대한 언급. 고양이 봄이와 함께 다른 사진도 찍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자신을 만나는 날이면, 그렇게 사진만 찍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재미없잖아요 그런 거, 나도 무안하고“





말을 맺은 후에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따라왔다. 언제 얼굴을 굳혔냐는 듯, 처음 만났을 때처럼 풀린 표정을 마주하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더랬다.





딱-





그녀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하며 카메라를 챙긴다. 봄이와 그녀를 찍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카메라의 셔터 버튼 부분이 부러졌다. 셔츠의 중간 단추가 툭 하고는 떨어져 나가듯이. 셔터 버튼이 나사 홈에 플라스틱 덩이를 끼워 넣는 방식이라, 카메라가 당장 고장 났다고는 볼 수 없다. 실제로 손가락에 힘을 조금 더 주면 셔터는 문제없이 작동한다. 그래도, 단추가 하나 없는 셔츠를 입고 나가는 것은 여간 찝찝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오늘은 중요한 날이지 않나.





문제는 여분의 버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와의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선다. 카메라를 샀던 곳에 셔터 버튼도 팔았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날은 어두워지기 직전, 안개가 조금 촉촉하게 꼈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중고 카메라 취급합니다]






가게 앞에 도착하자, 어딘가 정겹고 익숙한 간판이 보인다. 어떻게 보면 내가 지난 몇 달간 겪은 모든 일의 시작점, 그곳으로 돌아왔다. 유리문을 당긴다.





딸랑- 계십니까-





“자네로구먼”





오랜만일세 하고 건네는 주인분의 말에, 나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가게는 늘 조용하지 뭐, 그래 보이지 않은가. 조용한 인사가 오고갔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 셔터 버튼이 부러져서요”





주인아저씨가 카메라를 건네받았다.





“흠, 뭐 문제없네, 갈아 끼우기만 하면 그만이거든”


“하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만 나사가 안에서 부러지는 바람에 조금은 귀찮게 됐구먼, 잠시 기다리게”





카메라가 수북이 쌓인 진열장 뒤에서, 아저씨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앞의 의자에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아저씨는 여전하시구나. 깔끔하게 다려진 와이셔츠에, 단정히 넘긴 머리는 중후한 잿빛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또렷이 자리하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그러고 보니, 그녀를 제외하고 내가 속내를 털어놓은 유일한 사람이 주인분 아니던가. 그때 내가 어떤 이유에서 모든 이야기를 토해내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저 검은 머리를 보고는 그런 마음을 먹었던 것 같기는 한데. 아무렴 어떠한가. 사람 간의 일에는, 반드시 어떠한 인과관계가 필요하지 않다.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을 보면, 혹은 마주 앉은 여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사람은 반드시 솔직해진다. 그런 류의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내가 그녀를 만나고 알게 된 몇 가지 사실 중 가장 중요한 것 아닐까.





‘사람은 인과관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공구를 움직이는 소리가 반복된다. 규칙적인 소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딱이다. 물론, 여기에도 인과관계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속이 어지러울 때는 무척이나 거슬리게 들렸던 적도 여러 번 있었으니.





조용한 상념의 틈으로, 주인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결심이 섰나 보구만. 그게 어떤 방향이든지 말이지”


“…네?”





그냥 전보다 얼굴이 훨씬 밝아져서 말이야. 그 왜 있잖은가? 카메라 사러 왔을 때는 얼굴이 완전히 울상이었다고. 그랬었나. 얼굴을 손으로 문질러본다.





“…어쨌거나, 카메라도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니까”





박힌 나사 선을 다 풀었는지, 톡하는 소리와 함께 빨간색 플라스틱 덩어리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아저씨가 뷰파인더에 눈을 가져다 댄다.





“이 뷰파인더로 무얼 볼지는 그 사람에게 달려있거든. 흘러가는 세월을 기록할지, 아니면-”





찰칵-하고 셔터를 누르는 시늉 후에, 말이 이어졌다.





“…그 속의 사람을 담을 것인지 말이야”


“(…)”





“오지랖이 조금 컸군, 미안하네. 자 여기, 원래 있던 색깔이랑 똑같은 거로 바꿨네”





계산을 마무리하고는 유리문을 밀어 연다. 몸이 완전히 가게에서 빠져나오기 전, 몸을 돌려 정중하게 인사를 드린다. 문이 닫히면서 종이 울린다. 딸랑-하는 소리 속에서, 주인아저씨의 목소리가 얼핏 들려온다. 또 보자고 자네.






가게를 벗어나니 날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안개 낀 공기는 여전히 촉촉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약속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한다.





그때,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안개 낀 밤의 가로등 빛이란 평소보다 더 밝게 다가온다. 주황색 불빛은 안개 속 물방울에 이리저리 반사되어, 하나의 빛무리를 이룬다. 비가 내리기 전날, 달 주위에 무지개 띠가 둘러쳐지듯이.





걸어가는 방향의 정면에서부터 가로등이 연달아 켜진다. 주위의 고운 물 입자들이 가로등 빛을 머금는다. 빛의 조각들이 꾸덕하게 자리한다. 저 앞 멀리에서 시작한 빛무리는 어느새 꽤나 가까이까지 다가와, 밤하늘을 양분한다.





안개 속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카메라는 들지 않았다. 설령 내가 이 풍경을 찍는다고 해도, 지금 이 감정을 담아낼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그저 바라볼 뿐이다. 얼굴을 사뿐히 적셔오는 안개 방울을 느끼면서.





어쩌면 나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만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모터에 기름을 주입하고, 엔진이 더 폭발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펌프질을 계속해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과열된 엔진은 언젠가 멈추기 마련인데, 그것을 알지 못했다.





때로는 손을 놓을 때도 필요했나 보다.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흘러내려 가며 지나가는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은 아닐까.





가방 지퍼를 열고는, 카메라를 넣었다.






그녀와 마주했을 때, 가로등은 꺼진 것 없이 모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 주위가 온통 따뜻한 주황빛으로 가득하다.





그러고 보니, 생각에 빠져있느라 약속 시간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조금 늦었죠”


“괜찮아요. 조금 늦어도 상관없어요”





그녀가 미소 짓는다





“봄이 걔는 항상 거기 있거든요”





봄이 기다리겠다. 얼른 가요- 하며 걸음을 옮기는 그녀와 보폭을 맞춘다. 마주하는 걸음 속에서 서로의 손등이 부딪친다. 조심스럽게 내민 손에, 그녀가 깍지를 낀다.





길었던 겨울 속에서 봄이 피어난다. 늦어도 좋다. 어쨌든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봄이 기다린다. 가로등 빛과 밤하늘로 양분되던 주위는, 어느새 주황빛만이 가득하다.





그녀가 내게로 왔다.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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