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지, 아부지, 아부지
가매기 삼거리 집 떠날 때.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다시는 못 부를 말. 하늘 무너진 슬픔, 영원한 이별을 동네가 떠나도록 울부짖는다.
1989년 아부지 가셨다. 57세. 시균이 신입사원 2년차. 서울서 갓 직장인은 청량리 밤 열차 타고 고향 가서 새벽 임종을 지켜볼 뿐이었다. 엄마 59세. 두 살 연상. 환갑 넘기기 쉽지 않은 시절. 엄마마저 가시면? 사랑 독차지한 장남으로서 두 번이나 천하의 불효, 씻지 못 할 죄인. 이제부터 엄마는 독거해야 한다. 엄마마저 잃을까 두렵다.
■ 엄마는 딸 셋 낳고 죄인이 되었다
여자는 시집와서 아들이 없으면 죄인이고 아들을 낳아야 죄를 면했다.
집집마다 아들 하나 보려다 딸 낳고, 아들 혼자는 외롭다며 아들 하나 더 보려다 딸 낳고, 이웃집 아들 셋이 부러워서 아들 하나 더 보려다 딸을 낳는다. 그뿐 아니다. 아들만 본다면 첩을 두어도 당당했다.
영영 아들이 없는 집은 조카를 아들로 삼거나, 문 앞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들이거나, 이마저 곤란하면 아무도 모르게 야반도주 이사해서 아들을 들였다.
딸만 낳고 넋 놓고 있는 집은 어디에고 없었다. 모든 건 대를 이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육이오 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죽어서 부담은 더욱 커졌다.
가매기 삼거리도 마찬가지여서 온 동네가 아들에 목매달았다.
엄마는 딸만 셋 줄러리 낳고 죄인이 되었다. 동네 사람 마주칠까 동네에서 고개를 못 들고 다녔다. 시내 나갈 때는 그림자처럼 골목길로 숨어 다녔다. 그래서 엄마는 평생 처음 점을 보았다.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번재 가는 길 육판바위 아래에 촛불 켜고 삼신할머니께 백일 동안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아들 하나 갖게 해 달라고. 나는 그렇게 귀가 빠지고 세상의 빛을 보았다.
그날 아부지는 생애 최고로 신명 났고, 부정한 것들을 막기 위해 금줄을 만들어 대문에 걸쳤다. 누런 새끼줄 왼쪽으로 꼬아서 간간이 벌리고, 광택이 나도록 새빨갛고 길쭘해 늘씬하게 휜 고추와 새카만 숯을 번갈아 꿰어서는 문 양쪽 기둥에 어른 키높이보다 조금 높게 느슨하게 매달았다. 아부지는 그날부터 동네방네 어깨에 힘깨나 주고 다녔고, 엄마는 시집와서 8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을 활짝 펴고 동네를 활보했다.
그러나 아들 못 본 다른 집은 더욱 깊은 시름에 잠겨야 했다.
쌀집은 칠공주에 아들만 하나다. 어떻게든 아들 하나 보려고 낳다 보니 딸만 일곱.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 천만 다행히 여덟 번만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헌데 서지 못하고 사지로 기는 소아마비였다.
막걸릿집은 아들만 하나다. 큰집서 조카를 데려와 아들로 삼았다. 부부가 애를 갖지 못하는 것은 흉이라 쉬쉬했지만, 형의 아들 중 하나를 아들로 들인 건 흠이 아니어서 떳떳하게 말했다.
공 씨는 딸만 하나다. 누가 강보에 둘둘 말아 대문 앞에 버리고 간 갓난아기를 자식으로 들였다. 헌데 사내 아닌 계집이었다. 공 씨는 육이오 전쟁 나고 군대 가서 매독에 걸렸다. 매독균을 죽인다고 바지 벗고 쭈그리고 앉아서 불로 수은 증기를 끓여 불알에 쐬었다. 매독은 나아 생명은 건졌지만 불알이 죽어서 대가 끊겼다. 공 씨 아부지는 땅부자였고 아들 셋을 두었다. 장남인 공 씨가 남편을 여읜 어머니와 함께 재산을 관리했다. 공 씨 삼 형제간 상속 문제 때문에 조카를 아들로 삼지 못 하고 고심 끝에 여자 애를 받은 거다. 공 씨 집안 사정을 아는 누군가 일부러 계집아이를 대문 앞에 둔 거였다.
세탁소집은 딸만 둘이다. 부부 나이가 동네서 제일 많아 할아버지로 불렸고 아이를 더 낳지 못했다. 군인을 상대해 군복을 다리거나 수선해 돈을 잘 벌었다. 돈이 궁하거나 급한 동네 사람은 으레 세탁소집에서 돈을 빌리니 이자까지 더해 살림살이가 늘 넉넉했다. 사내아이들 여럿이 떼를 지어 집집마다 돌아가며 세배하는 설날이면 세뱃돈을 가장 많이 주었다. 세뱃돈 받으려고 양손을 내밀면 할아버지는 내 손에 돈을 쥐어주고는 두 손으로 내 양손을 꼭 잡고 한참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세탁소집이 어느 날 하룻밤 새 텅텅 비었다. 젊은 이웃들의 아들이 부러워서 견디다 못해 야반도주한 거였다. 빌려준 돈 다 포기하고 아들 들이려고. 출생의 비밀을 지켜주려고 아무도 모르게. 몇 년 지나 부산서 봤다는 소문이 돌았다. 섬 빼고 육지로는 가매기 삼거리에서 가장 먼 거리였다.
이뿐인가? 아들이 하나인 집은 혼자는 외롭다고 형제가 있어야 한다며 어떡하든 아들을 더 낳으려 했다.
염 목수는 아들 넷에 딸 하나다. 먼저 살림을 차린 여자에게서 아들 둘을 얻었다. 나중 여자와 딸 하나, 그 다음 아들 둘이 더 생겼다. 여자 둘과 자식 다섯은 한 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었다. 여자 둘은 아들이 둘씩 같아서 그런지 사이가 좋아 자매로 보였고 다투는 걸 본 적 없다. 이복형제 다섯도 친형제처럼 지냈다. 동네 사람들은 누가 처고 첩인지는 늘 궁금했다. 두 여자 간 나이 차이가 컸고, 둘의 자식들 간 나이 역시 차이가 나서 먼저 산 순서만 알 수 있었기에 나중 여자가 첩이거니 여겼을 뿐이다. 오 형제는 큰 엄마, 작은 엄마라고 부르는 걸로 서로 다른 배 출생임을 구분했다. 아들을 더 가질 수 있다면 여자를 더 들여도 문제 될 게 없었고, 여자는 아들만 낳으면 장땡이었다.
김 목수는 아들 둘에 딸 하나다. 첩인지 새장가들었는지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더 얻었다. 딸의 병이 깊어 아들 더 낳기를 포기했다.
방앗간집은 아들 둘에 딸 둘이다. 넷 중 장남이 첫째고 차남이 막내니까 아들 둘 얻으려다 딸 둘을 본 거다. 처 외에 여자가 있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첩으로 들이지는 못 했다.
빵공장집도 아들 둘에 딸 하나다. 셋 중 딸이 둘째니까 아들 둘 얻으려다 딸 하나 본 거다.
이뿐인가? 아들 셋이 부러워서 경쟁심에 아들을 더 낳으려고 했다.
강 씨는 아들 둘에 딸 셋이다. 다섯 중 장남, 차남이 첫째, 둘째니까 진작에 아들 둘을 낳았다. 아들 더 낳으려다 딸 셋을 연달아 본 거다. 우리 집보다 아들 더 가지려다 그리되었다.
아들 더 낳기를 그만둔 집이 있기는 하지만 흔치는 않았다.
여 씨는 아들 둘에 딸 하나다. 딸이 장녀니까 아들 둘에 만족한 거다.
우리 집은 아들 셋에 딸 넷이다. 일곱 중 장남인 내가 네 번째, 차남이 여섯 째니까 아들 둘 보려다가 딸 넷을 낳은 거. 그러고 나서 셋째 아들이 막내로 태어났다. 엄마는 막내는 실수라고 했다. 나이 들어 낳아 창피해서 동네에서 고개를 못 들고 다녔단다. 둘째 딸은 세 살 때인가 병약해서 죽었다고.
가매기 삼거리 토박이는 이런 식으로 열댓 집이었다. 다른 집들이 몇 있었지만 뜨내기라 가족 사정은 몰랐다.
가매기 삼거리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아들 때문에 웃고 우는 아들 공화국이었다. 그렇게 온 동네, 온 나라가 아들 보려고 밤이 이슥하면 황금빛으로 빛나는 백열등의 새까만 소켓 스위치를 돌려서 끄고, 애들이 잠들고 나면 전투를 치르는 소리 없는 전쟁터였다. 아무리 그리해도 나라 전체로 반은 원한대로 반은 반대로 태어났다.
시균이 100일 생존 기념 사진. 저 고추가 그냥 고추 아니기에 자랑스레 드러내어 찍었을 터
돌잔치. 1년 생존 기념 사진
우끝 엄마. 좌끝 아부지. 단기 4284년 = 1951년. 육이오 전쟁 중 만나셨다.
좌 엄마. 사범학교 시절. 육이오 전쟁 전.
■ 봄봄봄 아부지의 노래
-- 명절이 다가오면 어떤 놈이 왜 명절을 만들었나 원망했다. --
봄 봄 봄이로구나 봄
이팔청춘 방긋 웃는 봄이로구나 봄
금강산 호랑이 으르르릉
낙동강 꾀꼬리 꾀꼴 꾀꼴
봄이로구나
아부지는 흥이 나면 이 노래를 부른다.
따라 한다.
함께 수없이 하니 저절로 외워진다.
아부지가 동네 사람 누구와도 싸우는 걸 본 적 없다. 법이 없어도 살 분이었다. 술도 담배도 안 했다. 아부지는 식구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에 순서가 있었으니 젤 아끼는 엄마가 1등, 장남인 내가 2등, 그리고 자식 넷 공동 3위 . 큰누나만 종종 구박했고 4위. 첫아들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린 첫딸이라서. 못났다고 머리마저 둔했다고. 고구마 고구마 하며 아무리 가르쳐도 쪼주망 쪼주망 했단다. 그래도 사춘기 되니 네가 맏이니까 동생들 돌봐야 한다고.
뻐스부에서 가게를 하고나서부터 사랑하는 엄마와 다투기 시작했다. 매년 두 번은 대판 싸움. 날은 정해졌다. 설날 때 한 번, 추석 때 한 번. 아부지는 명절날 하루만이라도 쉬자 하고, 엄마는 대목날 어떻게 쉬냐 하고. 아무리 화나도 아부지는 엄마를 때리지는 않았다. 어쩌다 정 분에 못 이기면 그릇을 집어 바닥이나 벽을 향해 집어던지기는 했지만. 깨지지 않는 걸로 골라서.
가게 전에는 아부지가 하고 싶다는 걸 하면 그때마다 빚이 늘었다. 그러자 엄마가 나섰고 가게 해서 빚을 갚았다.
ㅡㅡㅡ ㅇ ㅡㅡㅡ
ㅡㅡ돼지 치기
아부지는 돼지를 치자 했다. 암퇘지 한 마리가 새끼 치면 열 마리 되고 또 낳으면 스무 마리 되니까. 하지만 한 마리 돼지는 더디게 컸고 너무 많이 처먹었다. 그만큼 똥을 무더기로 쌌고 치우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접붙이기
새끼 칠 때가 되니 우선 통나무를 구해다가 X자로 받침부터 만들어야 했다. 따로 씨돼지를 돈 주고 불러다가 접붙여야 했다. 어른 여럿이 달려들어 우리 집 암퇘지를 응차 들어 X자 받침 위로 올려야 했다. 돼지는 단두대에 올라 죽는 줄 알고 몸부림치면서 그야말로 돼지 멱따는 소리로 비명.
꽤애액 꽤애액
꽤애액 꽤애액
연실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더니 어른이고 애고 남자건 여자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든다. 먹고살기 바쁜데 이만한 구경이 어디 있으랴. 별별 희한한 걸 다 보여주는 서커스 가도 이런 건 없다. 다들 이 요상한 공연을 지켜보기로 한다. 신작로 옆쪽 아래로 담장이 없는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길가에 죽 늘어서서 눈만 감지 않으면 빤히 다 보인다. 호기심 많은 나야 당연히 틈에 끼어서 눈 동그랗게 뜨고.
암퇘지를 간신히 받침대에 걸치고 나니 씨돼지 차례. 이건 쉽다. 그 돼지를 몰고 온 휘발류 김 씨 아저씨가 나선다. 암퇘지보다 훨씬 더 커서 송아지만 한 씨돼지가 암퇘지 등에 올라타도록 아저씨가 거든다. 이놈은 씨돼지답게 맨날 밥 먹고 하는 일이 이거라서 지가 멀 하는지 아니까 알아서 기어오른다. 허나 흥분한 모습이 영 보기가 거북하다. 분홍빛으로 발딱 선 거시기가 나무젓가락같이 기다랗고 가늘다. 뚱뚱한 몸뚱이로는 머시기를 못 찾으니 몸을 비틀어댈 때마다 허공에서 회초리처럼 이리저리 휘리릭 휘리릭.
그러는 사이 암퇘지는 통나무 받침에 가슴이 눌려 아픈 데다가 첫 만남에 엄청난 덩치가 등에 올라타니 기겁해서 더 지랄한다. 게다가 평상시 못 보던 사람들이 떼로 모여서 다 자기를 향해 눈빛을 쏘아대니 돼지 입장에서는 엄청 무서울 거. 발버둥 칠 때마다 받침대가 찌그덕 찌그덕 주저앉을 거 같다. 거식이 어렵사리 머식을 찾아 넣으니 숫처녀인 암퇘지가 경끼를 일으키며 외친다.
꽤애액
이번엔 외마디. 첫 경험이라도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느낌으로 깨닫는 거다. 이건 결코 멱따는 일이 아니라는 걸, 절대 악쓸 일이 아니라는 걸, 이런 때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두 마리가 몸이 붙고 잠깐. 수퇘지가 등에서 떨어져 내려온다.
에개, 이게 끝이야?
기껏 이거 시키려고 우리 집 암퇘지를 그렇게 괴롭힌 거야? 싱겁고 허무하다. 암퇘지는 더 그랬을 거 같다.
아부지는 새끼도 직접 받아야 했다. 한 마리씩 나오면 하나하나 천으로 닦아준다. 숨 안 쉬면 입 맞추어 후욱 불어주고. 열 마리 정도 받으려면 밤을 새운다. 애써 받은 새끼도 어미가 놀라면 물어 죽이거나 잠잘 때 뒤척이다 새끼가 깔려서 죽기도 한다. 젖 떼면 새끼 열 마리를 다시 어미 한 마리 키웠듯이. 그러나 먹는 양과 들이는 공은 열 배. 먹이고 똥 치우고 반복해야 한다. 그러다 다시 씨돼지 불러 엄마 돼지와 접붙여야 하고.
아부지는 한 해인가 난리통을 겪고 나서 돼지 치는 걸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ㅡㅡ닭치기
닭은 돼지와 한참 달랐다. 우리 집 옆 골목에 부화장이 생겼고 거기서 병아리를 사 오면 그만. 돼지처럼 새끼를 받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도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창피하게 접붙일 일이 없다. 알아서 날개 펴고 푸드덕푸드덕 아주 잠깐 올라타고 암탉 소리래야 꼬꼬댁 꼬꼬. 이 정도야 돼지 멱따는 괴성에 비하면 음악. 게다가 병아리는 귀여웠고 금새 자랐다. 새끼가 아니라 알을 낳으니 길에 떨어진 돈 줍듯이 주워서 계란판에 담기만 하면 된다. 마릿수 늘리고 싶으면 병아리 더 사 오면 되고.
그렇게 아부지는 가매기 삼거리 동네 한가운데 양계장을 짓고 닭을 쳤다. 엄마는 자전거 타는 걸 배웠고, 30개들이 계란판을 자전거 뒷좌석에 켠켠이 높이 쌓아 싣고서 여러 식당에 내다 팔았다. 헌데 닭은 돈 좀 될 만하면 병이 돌았다. 닭들이 한꺼번에 죽었다. 돌림병은 약도 없다. 양계를 몇 해 하고 나니 병에 강한 돼지와 달리 닭은 돌림병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엄마는 계란 판 경험을 살려 가축 말고 사람 상대로 무엇이든 파는 걸 하자고 했다. 사람은 금방 죽지 않고 계속 사고 계속 쓰니까. 똥도 각자 알아서 변소 가서 누니까. 이렇게 시작하게 된 가게 덕에 양계장 하다 생긴 빚 다 갚고 재산이 늘었다. 자연스럽게 엄마가 돈을 책임지고 아부지는 엄마를 도왔다. 여덟 살 차이 큰누나는 엄마 대신에 다섯 동생에게 밥 해 주고 설거지 하고, 양말, 옷 꿰매 주고. 가게에서 엄마, 아부지 일도 돕고.
ㅡㅡㅡ ㅇ ㅡㅡㅡ
ㅡㅡ찐빵 가게
양계장이 망하고 엄마, 아부지는 고심 끝에 쌍다리와 천주교회 중간에 있는 시외뻐스부에 가게를 빚을 내어 샀다. 가게래봐야 단층 대합실 건물에 가닥을 붙이고 스레트를 얹은 방 한 칸 크기 가건물. 사람 하나 다닐 통로를 사이에 두고 춘천행 뻐스를 마주 본다. 도로 쪽으로 반 평 정도 쓸 수 있는 외부. 실내는 손님 둘이 의자에 앉는 나무 탁자 두 개 나란히, 신 벗고 오르면 둘이 앉을 수 있는 무릎 높이의 턱이 전부였다.
허름한 간이음식점이었지만 자리가 워낙 좋아서 무엇이든 불티나게 팔렸다. 가게가 굳이 넓을 필요는 없어서 뻐스 시간에 쫓겨 밖에 서서, 가져다 뻐스 안에서 알아서들 먹었다. 첫 뻐스가 출발하는 새벽부터 막차가 들어오는 밤까지 뻐스부에 사람이 늘 붐비니 가게도 덩달아 바빴다. 서울, 춘천, 제천, 충주, 여주행 뻐스가 사람들을 담을 때마다, 돌아와 토해낼 때마다 돈통에 돈이 쌓였다. 메뉴는 여섯 가지로 라면, 우동, 찐빵, 김밥, 오뎅, 삶은 계란.
라면. 얼마나 많이 끓여 팔았는지 집에다 삼양라면을 트럭으로 받아 젤 큰 방인 안방 천장까지 박스째로 가득 쌓아 쟁여 놓았다. 식구들 잠은 옆방에서 자고. 매년 겨울 김장은 오백 포기하면 부족하고 천 포기하면 남아서 군내나 버리고. 라면에 김치를 곁들여야 하니까.
우동, 오뎅. 면을 삶아 뜨거운 오뎅 국물에 말아서 닥꽝과 함께 나무 탁자에 내놓는다. 금방 삶은 면은 빛이 자르르 흐르고 우들우들 쫄깃하며 국물까지 맛나니 우동도 수시로 삶는다. 오래되면 뚝뚝 끊어져 찰진 맛이 사라지니 조금씩 나누어 면을 삶는다.
국물은 물에다 큼지막하게 썰은 무, 파 등 몇 가지 재료를 넣고 간장인가 소금인가로 간을 맞추고 연탄불에 종일 우려낸다. 길고 둥근 오뎅을 대나무 꼬치에 꿰어 국물에 넣어 익혀 판다. 꼬치 오뎅은 겨울엔 꾸준히 나가지만 여름엔 조금만 준비해도 남아서 팅팅 붇는다. 불은 오뎅은 한번 맛 들이면 나름 별미라 일부러 찾는 사람도 있다.
김밥. 말아서 쌓아두면 어느새 바닥을 보이니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밥을 짓는다. 재료는 김, 고들밥, 판 오뎅을 길게 썰어서 간 맞춰 프라이팬에 볶은 거, 닥꽝 길게 썰어서 한 줄, 끓는 물에 살짝 데친 후 간 맞춘 시금치.
김밥 마는 대나무 발을 펼치고 김 한 장을 얹고, 밥 한 주걱을 김 위에 얹어 얇게 펴고, 가운데에 판 오뎅 두 줄, 닥꽝 한 줄, 시금치를 한 줄로 끊기지 않게 길게 이어 놓고, 발을 둘둘 말으면 김밥 한 줄. 김에 기름칠하고 통깨를 흩뿌리면 반질반질 윤이 나고 굵직하니 한 입 뭉텅 깨물어 먹고싶은 김밥 완성. 금방한 재료에 간이 맞으니 꾸준히 팔린다.
삶은 계란. 반숙으로 한다. 물에 계란을 넣어 펄펄 끓이면 끝. 그래도 비법은 있었으니 물에 식초인가 먼가를 넣고 끓이고, 찬물에 식히면 껍질이 훌렁훌렁 잘 벗겨진다. 반숙이 어려운데 끓이는 시간을 잘 맞춰야. 찍어 먹는 소금은 쇠 절구에 쇠공이로 으깬 참깨를 섞어서 종지에 담아 내준다.
거의 다 방금 했거나 직접 한 거라 신선하고 맛나다.
---찐빵
별미 중 별미. 전 공정 다 아부지가 담당. 아부지는 매일 장사 끝나고 밤에 찐빵 반죽을 만들었다. 큰 스덴 다라에 밀가루 한 포대를 쏟아붓는다. 베이킹 소다를 넣고 섞는다. 물과 막걸리로 반죽해 충분히 치댄 후 다라를 가게 안쪽에 두고 이불을 덮어둔다. 다음날 아침이면 반죽이 잘 삭아 붕그렇게 오른다.
앙꼬는 팥을 삶아 쇠 절구에 으깨어 만든다. 반죽을 뜯어 앙꼬를 한 움큼 넣어 주먹만 한 크기로 빵을 만든다. 천을 깔아 둔 둥근 나무 판 위에 빵을 차례로 놓는다. 연탄불 위에 놓인 가마솥에 물을 붓고, 그 위로 물이 닿지 않게 떨어져서 나무판을 얹는다. 물이 끓으면서 수증기로 빵이 쪄진다. 찐빵이다.
잘 된 찐빵. 빵은 얇고 앙꼬는 넉넉하다. 앙꼬 없는 찐빵이 찐빵이 아니듯이 앙꼬 아낀 찐빵은 모지란 찐빵이다. 뜨거운 건 매우 부드럽다. 양손으로 반 가르려면 뜯어지기보다 눌리면서 앙꼬가 튀어나와 쉽지 않다. 그래서 가르기보다 덩어리째로 한 입씩 베어 먹는다. 앗 뜨거. 제대로 씹지 못 하지만 입에서 살살 녹는다. 앙꼬는 너무 달지 않되 흰 설탕을 따로 찍어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어느 정도 단맛이 돌아야. 삶은 팥을 완전히 으깬 거보다 온전한 거, 반쯤 부서진 게 드문드문 남을 정도면 씹는 맛이 더해진다. 많이 먹어도 목물이 안 올라오고 먹고 나서 속이 편하다. 매일 큰 다라 하나를 팔았다.
갓 찐 찐빵. 솥뚜껑을 열면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 오른다. 뜨거운 찐빵을 손바닥에 번갈아 놓아 식히면서 호호 불며 입에 조금 물면 그 뜨거움과 그 부드러움과 그 달콤함이란! 아부지가 가마솥에서 금방 쪄낸 찐빵이 어찌나 맛난지 가게 갈 때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뻐스부 근처에 태권도장에 다니면서 뜨끈 뜨근한 찐빵 먹을 생각으로 가게에 매일 들렀다.
사람 찐빵. 가게 하던 때 국민학교 5학년부터 뻐스부 길 건너 인동에 있는 태권도장에 다녀서 자연스럽게 가게에 들렀다. 사범님은 내 이름 대신에 별명을 불렀다. 찐빵이라고. 도장은 입구 쪽이 좁고 길이가 긴 장방형에 마루를 깔아 신을 벗고 들어간다. 벽은 부로꾸를 쌓아 올려 미장. 그 위로 굵직한 나무를 삼각형으로 얹은 서까래와 지붕이 보인다. 천장은 없다. 운동 전에 내부를 뛰어서 돌고 이십여 명이 모여서 정권 찌르기와 발차기를 할 정도로 널찍했다.
라면은 가게에서 끓여주면 먹기도 했지만 가게가 바빠서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출출할 때마다 밥 대신 생으로 부셔서 먹었다. 이 또한 질리는 법이 없다. 나만 생라면을 뿌셔 먹는 게 아니었는지 얼마 후 라면땅이라는 과자가 나왔다. 쫀드기만큼 폭발적인 인기.
우동도 좋아했지만 삶아야 하니 시간이 걸려서 어쩌다 먹었다. 잔뜩 불은 오뎅과 속까지 검붉게 물들어 흐물흐물해진 무는 입맛이 들어서 일부러 골라 먹기도. 김밥도 가끔 한 줄 먹고. 학교에서 소풍 갈 때 늘 먹던 거라 입에 맞다. 계란은 양계장 할 때 너무 먹어서 그런지 딱히 당기지 않았다. 찐빵을 우선 먹다 보니 배가 불러서 나머지는 어쩌다 먹었다.
이렇듯 엄마가 음식점을 하자고 한 건 식구들 끼니도 해결할 수 있어서이기도 했다.
설, 추석이면 엄마, 아부지, 큰누나 다 정신줄 놓아야 한다. 일주일 전부터 매상이 팍팍 오른다. 전전날, 전날은 평일에 몇 배나 판다. 당일도 두 배는 된다. 다음날, 다다음 날도 사람들이 돈이 생기니 많이 판다. 그러니 엄마는 대목날 가게 문을 못 닫을 수밖에. 그렇다고 엄마가 명절 다음 주에 하루라도 쉬었던 건 아니다. 빚 갚아야 하고, 자식 여섯 먹이고 입히고 학비를 대야 하니까. 돈 모아서 중학교, 고등학교 보내야 하니까.
아부지는 두어 해를 정신없이 단 하루도 못 쉬고 명절마저 일하고 나서 지쳤다. 돈이고 뭐고 다음 해 명절날 드디어 폭발. 제발 하루만 쉬자고. 이때부터 아부지, 엄마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연례행사로 점점 더 험악해졌다. 나는 해가 갈수록 설날과 추석이 점점 싫어졌다. 명절이 다가오면 어떤 놈이 왜 명절을 만들었나 원망했다.
아부지는 가게를 하고부터 봄이 와도 봄봄봄 노래를 잊어버렸다.
ㅡㅡㅡ ㅇ ㅡㅡㅡ
---화투 치기
가게 하기 전에 양계장 할 때는 엄마가 불만이었다. 돌림병 때문에 떼로 죽은 닭을 내다 파묻었다. 겨울이 왔고 아부지는 할 일이 없었다. 날마다 막걸릿집에 동네 어른 너댓이 모여 뽕이라는 화투를 쳤고 아부지도 끼었다. 설 전날은 밤새도록 친다. 이날은 새벽녘 화투가 끝나면 아부지는 꼭 구멍가게에 들러서 종합 선물세트를 사서 집에 가져왔다. 내 몸통만큼 커다랗고 낮은 상자엔 가지가지 과자와 사탕이 가득. 아부지는 돈을 땄을 때는 기분 좋아서, 잃어도 개평받은 돈으로 샀다.
아부지는 깊이 잠든 나만 깨웠고 내 가슴에 선물 세트를 안겨 주었다. 맛도 있거니와 골라 먹는 재미가 컸다. 다른 형제들은 소란하니까 얼떨결에 깨든가 아침에 일어나 내가 먹다 남긴 걸 먹든가. 아부지는 항상 첫아들인 나를 조용히 깨웠다. 엄마는 매일 화투만 치는 아부지가 싫었다. 난 아부지가 화투 치는 게 좋았다. 많이 딴 날은 명절 아니라도 먹을 걸 사 왔기 때문에.
하루는 엄마가 밤에 남자들이 모여 화투 치는 집에 찾아가서 화투판을 뒤엎었다. 화투 아래 깐 군인 담요를 통째로 들어서 팽개쳤던 거. 시간 보내려 재미로 친 화투가 도박이 되었던 거다. 동네 사람 외에도 외지 사람이 끼었다. 전문 화투꾼. 처음에 잃어주는 척하다가 나중에 다 따고 재산까지 빼앗아가는. 아부지와 같이 화투 친 동네 아저씨의 아줌마가 엄마에게 귀띔해 주었고 엄마는 고민 고민하다가 그날 절단 낸 거였다.
동네가 오밤중에 난리가 났다. 남자들이 하는 일에 감히 여편네가 이럴 수 있냐고. 엄마, 아부지는 집에 와서 대판 싸움. 아부지는 남편 망신 다 시켰다고, 엄마는 이럴 거면 갈라서자고. 아부지의 엄마 사랑, 가족 사랑이 도박을 이겼고 이후 아부지는 화투판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나는 종합 선물세트를 가져오지 않는 게 서운했다.
ㅡㅡ비누 공장
돼지치기 전에는 아부지는 비누 공장을 했다. 공장은 빈집을 이용했다. 비누는 까만 비누나 똥 비누라고 불렀다. 아부지는 왕겨를 사다가 공장 옆 마당에 내 키 높이로 작은 산처럼 쌓아두고 태웠다. 바닥에 불씨를 두고 그 위로 왕겨를 얹으면 안에서부터 천천히 타들어 간다. 겉까지 새카매지면 다 타서 재가 된다.
이 재에 물을 부어서 통과하면 양잿물인가가 된다. 양잿물을 기름인지 무언지와 섞는지 어쩌는지 해서 굳힌다. 그럼 연탄처럼 시커먼 색을 띤 비누가 된다. 도시락 반에 반만 한 크기로 자르면 까만 비누. 빨래뿐 아니라 세수할 때, 머리 감을 때도 썼다. 까만 비누를 설거지 할 때 쓰지는 않았다. 쓸 일이 없었다. 매 끼니에 기름기 있는 게 없으니 물로 씻어내면 그만.
아부지는 까만 비누를 두어 해인지 만들어 팔다가 그만두었다. 허가가 안 나와서인지 안 팔려인지 그건 모른다.
ㅡㅡ농사
뻐스부에서 가게한 지 7년여. 쌍다리 옆 뻐스부가 우산동으로 확장해서 옮겨진다고. 명절날조차 쉬지 못하고 더 바쁘게 일해야 하는 가게에 신물 난 아부지는 버스부 따라 가게를 옮기는 걸 결사코 반대했다. 이번에는 오랜 싸움에 지친 엄마가 손을 들었다. 빚은 진작 다 가렸고 쌓인 돈으로 논과 밭을 낀 산 6,000평 샀다. 신림 가는 가리파재 너머 구불구불한 국도 중간쯤 길가 왼쪽으로.
오래전부터 산을 일궈서 아래로 반은 논, 위로 반은 밭이고 가운데에 허름한 농가가 한 채. 남쪽 경계가 키 크고 늘씬한 낙엽송 이십여 그루로 이루어진 작은 숲이어서 해를 피해 참을 먹거나 궁둥이 붙이고 쉴 수 있었다. 그 아래로 자그마한 계곡에서 물을 얻었다. 아부지와 엄마는 농사짓기로 한 거였다.
씨 뿌리는 봄이 왔고 아부지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봄 봄 봄이로구나 봄
이팔청춘 방긋 웃는 봄이로구나 봄
금강산 호랑이 으르르릉
낙동강 꾀꼬리 꾀꼴 꾀꼴
봄이로구나
겨 신혼 때쯤 아부지
가게 그만두고 나서쯤 아부지와 막내 동생
72년 국민학교 5학년. 앞줄 왼쪽 두 번째 불쑥 키 큰 녀석. 꼬맹이를 지났다. 중앙 어른 셋 중 좌가 박동선 사범님. 요맘때 사진 이거 달랑 한 장.
■ 두꺼비 닮은 엄마의 손
낭만의 아부지 대신 엄마는 자식 여섯을 먹이고 재우고 교육비까지 벌어야 했다
엄마는 그 시대 인테리였다. 여자는 국민학교도 쉽지 않던 시대에 사범학교 진학. 육이오전쟁. 자유 찾아 엄마의 엄마, 하나뿐인 오라버니와 셋이 월남한다. 아부지는 대전서 태어나자마자 고아되어 큰엄마 젖을 먹고 자랐다. 청춘의 남녀는 군부대 식당서 일하다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전쟁통에 부대가 서울서 원주로 옮기면서 가매기 삼거리는 두 분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엄마는 일 년 365일 단 하루도 쉬지 않는다. 귀하게 아들을 얻었지만 네 번째였다. 게다가 혼자는 외롭다며, 대 끊길까 보험으로 아들 하나 더 얻으려다 아래로 셋을 더 낳았다. 일곱이었다. 딸 아이가 병약해 일찍 죽은 건 차라리 불행 중 다행이었다. 서른아홉에 본 막내이자 셋째 아들은 실수라 했다. 스물한 살에 첫딸 이래 2년 반 터울로 19년간 애를 낳았다. 아부지는 엄마를 끔찍히 사랑하고 아꼈다. 성정이 착하며 법 없이도 살 사람, 남에게 싫은 소리 못 하는 남자가 으레 그렇듯 돈과는 인연이 없었다. 엄마는 살림뿐 아니라 경제까지 책임져야 했다. 첫딸 출산부터 장남이 대학 졸업까지 27년. 엄마는 설날, 추석 명절마저 없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했다. 전쟁통에 이북서 월남했을 때 고왔던 처녀의 손은 해가 갈수록 거칠어졌다. 엄마 50세에 아부지 풍으로 자리에 누웠다. 엄마를 몸과 마음으로 도왔던 하나뿐인 동업자마저 짐이 되었다. 56세 되어서야 장남이 첫 직장에 취업했다. 아부지 그 다음해 돌아가셨다. 형편이 풀릴 만하니 엄마는 사랑하고 의지하는 남편을 잃었다. 그때쯤 엄마의 손은 사람의 것 아니어서 두꺼비 가죽으로 바뀌었다. 손가락 마디 마디 뼈가 솟아 테를 둘렀다. 손바닥은 굳은 살이 두텁게 박힌데다 목재 문질러 곱게 가는 사포 닮아 꺼끌꺼끌했다.
엄마 40대 무렵. 버스부. 즉 버스터미날에서 7년. 장사는 불티났다. 양계로 진 빚을 다 갚고 목돈도 생겼다. 버스부 이전. 원주시가 발전해 중앙동 시내 한가운데가 좁아서 외곽 우산동으로 터를 넓힌다. 장사에 신물난 아부지는 버스부 따라가기 싫다, 엄마는 가야 한다고. 아부지가 이긴다. 원주와 신림 사이 가리파재. 산중턱에 6,000평 밭과 논. 사람 상대 안 하니 돈도 안 된다. 몇 년 짓다 그만둔다. 시내 중앙시장 근처 시장서 터 빌려서 장사. 각기목과 비닐로 칸막이. 주력 품목 감자. 전용 칼로 깐다. 팔뚝 닮은 길다란 비닐봉지에 물을 담고 그 안에 감자 대여섯 알 넣는다. 그럼 감자가 검게 변색 않고 싱싱. 밤낮으로 감자를 손질해 판다. 아부지가 풍으로 쓰러진다. 나 군대 있을 때다. 엄마는 시집 간 둘 빼고 남은 자식 넷에 병든 아부지마저 건사해야 했다. 감자 깔 남편이 한쪽 손발을 못 쓰니 감자보다 열무를 주력한다. 이건 다듬어서 단을 작게 묶어 팔면 되니까 엄마 혼자서 할 수 있다. 목자리로 옮긴다. 자유시장 먹자골목 입구 상가 처마 밑 한 평 반여. 거기서 열무, 대파, 호박 채소류. 겨울이면 시린 손 호호 불며 감자 까고. 새벽 5시면 시장 나가고 밤 11시에 집에 와 잠깐 눈 붙인다. 실내 아니라 바깥이라서 한겨울에 찬공기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좁은 골목이고 상가 관리인이 금지해서 비닐마저 못 친다. 기껏해야 이동식 난로에 연탄 한 장이 전부. 아무리 아파도 휴일은 없다. 그러다 아부지 가셨고 홀로 생활. 끼니는 배 곯아야 때웠다. 집에서 돌아가시면 누구도 알 수 없다. 독거 노인 시신이 며칠만에 발견됐다고 언론에 대서특필 시작하던 때. 엄마가 딱 그럴 조건이었다.
아부지 장례 치루고나서 어머니 설득한다. 서울로 이사 가자고. 재산이 제법 있었다. 가매기 삼거리에 부자 둘. 물려받은 하나와 맨손으로 일군 우리집. 도로 접한 제일 큰 땅과 상가와 집. 아부지와 함께 벌어서 산 거. 병 수발과 자식들 키우느라 일부 팔아 썼지만 남은 게 있었다. 엄마, 이제 내가 대기업 입사해서 돈 버니까 원주 정리하고 서울서 함께 살자. 엄마 단호히 거부. 싫다고. 정든 데서 살고 싶다고. 3년 설득하다가 불가능을 깨닫는다. 어머니 62세. 환갑 넘기고 아부지 가신지 오래지 않아 잔치도 못 해 드리고. 홀로 지내다 가실 거 같은 불안은 점점 커지고. 내가 원주로 오기로 한다
회사에 간곡히 건의. 원주 보내달라고. 5년만 있다가 본사 복귀하겠다고. 3개월 조른다. 안 통한다. 왜 촌에 가냐고. 이대로면 출세 보장인데 이해 안 간다고. 어쩔수 없이 사표. 놀라며 그렇게 심각하냐고. 사장 목표로 입사했다. 하지만 이대로면 난 평생 죄인으로 살아야 한다. 5년만 시간 달라. 해서 원주에 내 자리 알아보니 대리 자리 없다고. 직급 상관 없다. 보내달라. 계열사의 화장품 사업부에 자리가 하나 났다고. 회사도, 직무도 다른 데 가겠냐고. 그래서 원주 오게 됐다. 고향 온 이듬해 결혼했다. 엄마는 며느리가 지은 따뜻한 밥상을 받고, 손자 둘 안고 행복해 하셨다. 고추 달린 첫 손자를 등에 업고 동네 나가 자랑, 며느리 자랑. 둘째 손자는 텃밭에 데리고 나가 고추 심는 거 보여주고. 고추 대공이 휘면 받칠 나무를 손주가 주워 와서 할머니 이거 쓰세요. 그런다고 대견해 하고
고향 발령 받은지 약속한 5년이 훌쩍 지난다. 본사 두 곳서 이제 서울 여의도 쌍둥이 빌딩으로 복귀하라고. 원래 회사 구매팀과 지금 회사 마케팅팀. 고맙다. 헌데 지금 서울 가면? 엄마 다시 독거. 5년이면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헌데 건강하다. 남겨두고 아내와 아들 둘 데리고 서울로 간다? 5년 모셨으니까 장남의 의무 해제? 엄마 혼자 있다 돌아가시면? 구더기 끓는 시신 발견되면? 틀림없이 테레비, 신문에 뉴스. 한편 회사 10년 다녀보니 50세에 사장될 가능성 제로 수렴. 앞으로 10년, 20년 또 다시 몸 갈아넣으라고? 성격이 적당히는 안 되고. 지난 10년. 수입, 구매, 영업. 회사 일은 내 일보다 우선이었다. 아내가 둘 임신, 출산, 육아 때 병원 태워달라는 단순한 거조차 거절. 근무지 이탈이라며. 20분이면 되는데 공사 구분 한답시고. 첫째 출산은 자연 분만 임박해서야 병원 도착 얼굴 빼꼼. 응애 첫 울음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 좌르륵. 감동과 동시에 무한 책임감.
그래. 이만 하자. 배울 만큼 배웠다. 내 사업 하자. 회사 일 즉 내 일이 몸에 배어 두려움 없다. 엄마 모시며 원주서 시작하자. 대기업 사장이나 내 사업이나 사장은 매한가지. 경영의 본질은 같다. 처음부터 대기업 있나. 내 걸 즐기자. 해서 LG 10년만에 사표 던지고 출사표. 37세. 1997년 3월.
2015년. 엄마 86세 하늘나라 가셨다. 바람대로 아부지 곁에 묻어 드린다. 엄마는 사랑 받고 사랑했던, 꿈에 그리던 님을 다시 만났고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찾았다. 5년 살 줄 알았는데 5배하고도 1년을 더 사신 거. 의료 덕 아니어서 생애 병원은 마지막 두어 달과 그전 강박증으로 정신과가 전부일 정도로 건강 체질. 70세까지 일은 계속하셨다. 가계 안정을 확인한 엄마는 이후 16년 여생을 즐겼다. 훈풍의 세월은 엄마의 손을 어루만졌고 두꺼비 손은 허물을 벗고 한결 희고 부드러졌다. 하지만 반백년 고생으로 도드라진 마디의 뼈는 과거 흔적을 드러내었다. 염 즉 마지막 목욕하는 날. 나는 엄마의 두 손을 부여잡고, 가녀린 몸 부둥켜안고 고운 얼굴에 내 얼굴 부비면서 끝없이 외쳤다. 지하층이 울리도록 다시는 못 부를 그 말.
엄마, 엄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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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아득한 그날부터 나를 사랑했나니
병상에 뉘여서야 알게 되었다
그도 꿈 많은 소녀였고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말을 잃었을 땐 메마른 눈물 한 방울에 얼마나 커다란 사랑 담았는지를
삼베 동여맨 몸 부여안고 분 바른 뺨 부비며 혈이 터지도록 울었다
그해 그녀는 가장 아름다웠다
사랑이 별이라면 별은 시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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