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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Jun 14. 2019

부부의 역사


결혼, 역사






   새벽 3시에 잠에 들어 오전 10시에 깨어나는 건 나의 생활 패턴이고, 밤 11시 반에 잠들어 아침 6시 반에 일어나는 건 남편의 생활 패턴이다. 처음에는 일찍 출근하는 남편의 패턴에 맞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는다. 낮 동안에는 분주하고 시끄러워 책 보는 일이 쉽지 않지만, 늦은 밤이나 새벽의 독서는 꿀같이 달콤해서 그런다. 게다가 옆에서 글의 호흡에 맞춰 조용히 코를 골아주는 남편 덕에 천연 백색 소음까지 얻을 수 있으니, 나는 새벽시간이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용한 새벽,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안은 포근한 어둠을 막연한 우울로 바꾸어버리기도 했다. 그 불안은 대부분 앞 날에 대한 것들이다. 마음에 대고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그 녀석은 낮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약한 놈들인데. 왜 나는 밤이면 우울에게 지고 마는 걸까.


    어젯밤도 그랬다. 가벼운 우울함이 불쑥 찾아왔다. 이번엔 지고 싶지 않아 책을 덮고 다른 무언가 해 볼 궁리로 싸이월드를 생각해 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찾아 힘들게 로그인을 했고, 사진첩을 쭉 내려보았다. 부끄러운 글들과 앳된 얼굴의 사진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약간 무섭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서 부끄럽다가, 유쾌하다가를 반복하며 오래된 게시물들을 내려 보다가 반가운 사진을 발견했다. 귀여운 리본 머리띠를 커플로 낀 채 밝게 웃고 계신 아빠 엄마의 사진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나이 차이가 꽤 났었다. 그래서인지 내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신 적이 몇 번 없었고, 유독 아빠가 엄마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모습을 많이 보고 자랐다. 아빠는 바깥에서도 열심히 일을 하셨지만, 집안일도 열심히 하셨다. 나에게 아빠는 자상한 아빠였다. 하지만 이건 '아빠'의 모습이지 '남편'의 모습은 아니었다.


    엄마는 남편이 무지 착했지만, 그만큼 그에겐 답답한 모습도 많았다고 하셨다. 열심히 일한 만큼 돈도 벌었으면 좋았을 텐데, 남편에게는 돈 버는 재주가 없었다. 엄마는 남편과의 나이 차이가 신경이 쓰여 부부모임에 나가는 것이 조금 싫었다고 하셨다.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며 고집스럽게 콧수염을 기르는 남편의 모습이 엄마 눈엔 철부지 같아 보이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 소년 같은 면모꽃을 사 오고, 손을 잡아주고, 아내의 것이라면 새끼발가락 모양까지도 기억해내는 남편이 엄마는 분명 좋았을 것이다.


    한 번은 작은 아버지께 아빠 엄마연애시절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심장 어딘가가 되게 간질간질했다. 형님 사무실에 놀러 갔었는데, 형님이 형수님한테만 짬뽕을 시켜주시고 나 보고는 나가서 먹으라 했다 아이가, 둘이 있겠다고.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작은 아버지의 말투는 툴툴거리는 말툰데, 그의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나는 작은 아버지 앞에 두 무릎을 꼭 끌어안고 앉아 그 젊 남녀가 어떻게 연애를 했을상상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아빠의 적극적인 구애로 엄마 마음열었다는 것뿐이만 말이다.






    나는 아빠와 엄마는, 아니 그 남자와 여자는 어떤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지를 생각했다. 아마 내가 알 수 없는 애틋함과 설렘, 긴장감과 안타까움, 토라진 마음과 두 사람만의 화해하는 방법이 녹아져 있을 거다. 상견례할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기를 가지고, 낳고, 키우면서 함께 느꼈을 책임감과 절망감과 기쁨과 행복은 어땠을까. 돈 앞에서 작아질 때 그들은 어떻게 서로를 다독였을까. 자식들이 속을 썩일 때 두 사람은 서로를 어떻게 위로했을까. 조금씩 늙어가는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둘이서만 여행을 떠났을 때 설렜을까. 그리고, 남자가 먼저 하늘나라로 가던 날, 여자가 느꼈을 배신감과 절망감과 말로 표현 못 할 슬픔은. 과연 내가 어림잡아 볼 수나 있을까.


    그 남자와 여자는 부부가 되었고, 그 부부만의 역사를 함께 써 내려갔을 거다. 그들의 부모와 그들의 자식들에게는 다 알려주지 않았을 둘 만의 역사는 한두 권의 책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길고 아름다운 이야기일 거다.






    나는 자고 있는 남편의 팔을 들어 그 속으로 들어갔다. 잠결에도 남편은 내 등을 토닥여준다. 나는 남편 팔을 베고 누워 나와 남편이 써 내려갈 우리 부부만의 역사는 어떨까 생각했다. 나보다 당신이 더 오래 살아야 한다고, 아니라고 당신이 나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걸로 투닥거렸던 걸 생각하면서 다행이다 싶었다. 화내고, 싸우고, 삐지고를 반복하지만, 결국엔 우리만의 화해법을 찾아내는 것도 좋다. SNS에 자랑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하 잘 지내고 있는 우리의 일상도 나중에는 부부의 역사가 될 거야, 하는 생각에 마음이 괜히 뭉클하다.


    물론 여전히 박 터지게 싸우기도 하겠지. 나는 고개를 들고 남편 팔을 빼냈다. 그리고 잠깐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히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남자랑 부부의 역사를 쓴단 말이지?


    곤히 잠든 남편 옆에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책을 폈다. 마음에서 쫑알대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어느새 저 멀리 도망간 것 같다. 아직 새벽 두시니까, 한 시간이나 더 책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매거진_소박한 결혼산문

2018.05.05.~

@john.and.molly

Photo. ⓒMatthew Bennett,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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