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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Jan 17. 2021

부조리 앞에서

마닐라

    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필리핀 마닐라였다. 정확히 말하면 마닐라에서 차로 얼마쯤 떨어진 외곽 지역의 빈민촌이었다. 벌써 17년이나 지난 여행이지만 미로 같이 구불구불한 마을의 진흙길과 빽빽이 들어선 판잣집들, 그 안에서 돌아다니는 닭과 병아리들과 텔레비전이 눈에 선하다. 그때  난 어느 집에서 지지직거리는 브라운관으로 쇼 프로그램을 보다가 희한하게 손바닥을 돌리며 인사하고 있는 탤런트가 나와 같은 한국인이라는 얘길 들었었다. 그 탤런트가 2NE1의 산다라 박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두고두고 신기해했다. 또 비닐봉지에 펩시를 담아 팔던 구멍가게와 우기의 탁한 하늘, 습해서 잘 마르지 않던 수많은 빨래들의 축 쳐진 모습은 지금도 마음속에 선하다. 아, 그리고 농구장. 온 동네가 진흙 투성이었지만 마을 한가운데 있는 농구장만큼은 번듯했다. 너무나도 번듯해서 그 동네와 어울리지 않았다. 초록색 우레탄 바닥과 수직으로 선 농구 골대, 반듯하고 정교한 라인, 반들반들한 철조망까지. 그곳에 가면 헐렁한 나시티를 입고 농구를 하는 내 또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거기서 조단을 만났다. 그의 짙은 눈과 작지만 오똑한 코, 얇은 입술이 참외만 한 얼굴에 오목조목 자리 잡고 있 앳돼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그 애도 헐렁한 나시티를 입고 있었는데, 옷 사이로 보이는 탄탄하고 까만 몸은 굉장히 날쌨고 가벼워 보였다. 나는 그 애를 보며 아마 이 동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자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도 순박한 면이 있어서 다른 애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온 또래에게 수줍은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조단과 농구장 벤치에 앉아 어눌한 영어로 대화했다. '나는 몇 살이야, 너는 몇 살이니?' 같은 시답잖은 대화가 오고 가던 중에 나는 조단에게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고, 예상하지 못한 답을 들었다. 그는 올해, 늦어도 내년 이 동네에 사는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말한 것이다.


    "열일곱 살에 결혼을 한다고?"

    "응, 여기 애들은 다 그쯤 결혼해."

    "학교도 안 가고?"

    "학교는 가지... 여자 친구는 학교를 그만둬야 할 수도 있어."

    "여자 친구는 몇 살인데?"

    "열다섯 살."


    조단은 나를 놀라게 했다는 사실에 조금 머쓱한 것 같았지만, 이내 원래의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건 이 동네에서 당연한 일일뿐만 아니라 빨리 어른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일이었.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나보다 더 어린 여자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른이 되어버리는 일은 정당하지 못한 일처럼만 느껴졌다.


    해질 무렵, 우리는 동네 교회로 돌아가 닭고기와 팝콘과 파인애플 밥을 저녁으로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조단의 여자 친구가 누구인가 짐작해보려 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거기에 모여있는 아이들 중 누구도 결혼을 할 만큼 자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조단에게 조심스럽게, 정말 결혼을 그렇게 빨리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너도 네 여자 친구도 조금 더 공부하고, 마닐라로 나가 일도 해보고, 꿈도 이뤄본 다음에 결혼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물었다. 사랑한다면 서로를 기다려 줄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물었다. 나의 말에 덤덤하던 그의 얼굴 위로 약간의 슬픔이 스치는 것 같았다.


    "아니, 나는 곧 결혼을 할 거야. 얼른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지, 공부를 더 할 순 없어. 게다가 내가 여자 친구와 결혼을 늦추면, 그 애는 어쩌면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과 결혼해야 할지도 몰라."


    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열여섯 살의 나도 조단과 여자 친구에게 일어나는 일이 부조리한 일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부조리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의 무력함이 슬프고 서럽다.


2005, 마닐라,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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