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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Dec 28. 2020

그리운 비엔티안 생활에 관하여

비엔티안

    무성한 플루메리아 나무들은 쏟아지는 햇빛을 잘게 부수어 도로 위에 흩뿌리고 있었다. 그 반짝이는 도로 양 옆으로 아이 몸통만 한 바나나 송이와 딱딱한 망고, 속껍질까지 완벽하게 깐 자몽을 파는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라오스 사람들은 딱딱한 망고나 자몽을 고춧가루가 섞인 소금에 찍어먹었다. 우리나라 순대처럼. 알록달록한 파라솔 아래서 퍼지는 상큼한 과일 냄새와 거기에 섞인 짭조름한 소금 맛을 상상하며 나는 페달을 밟았다. 습도도 온도도 높은 날이었만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순간만큼은 말할 수 없이 시원한 날씨다. 게으름을 이기고 나오길 잘했어, 나는 나른한 오후를 자전거로 달리며 생각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가면 여행자 거리다.


    비엔티안의 여행자 거리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로 늘 붐볐다. 그들은 거리에 늘어선 수많은 식당들 중 내키는 곳에 들어가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다. 프랑스 식당, 이탈리아 식당, 파키스탄 식당, 베트남 식당, KFC를 따라한 KFG까지. 또 커피를 마실 카페들도 넘쳐났다. 드립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땐 새하얀 일본 카페에 가면 됐다. 여담이지만, 그 카페를 운영하는 일본인 부부는 한 계절 동안 가게를 열어 번 돈으로 다른 한 계절 동안엔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그 옆엔 넓은 테라스 자리가 있는 카페도 있고, 아담한 이층 카페도 있다. 나는 여러 카페들 중카페 조마에 자주 갔는데, 거긴 커피 맛도 좋고 빵 맛도 훌륭하며 심지어 와이파이도 눈치 볼 것 없이 마음껏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비엔티안의 한 국제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와 한국어를 가르치고, 남은 시간엔 영어 학원에서 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일요일에는 현지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 가야 했다. 교회 가는 일은 즐거우면서도 답답한 일이었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지만, 알아들 수 없는 길고 긴 설교 앞에 나는 그로기 상태가 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온전한 자유일은 토요일 하루였다. 나는 그 소중한 날에 교사 기숙사에 혼자 남아 있는 게 싫어서 자전거를 타고 비엔티안 곳곳을 다녔다. 그러다 카페 조마에 정착하게 됐다. 그곳엔 많은 젊은 여행자들이 있었다. 모두들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며 커피를 마시거나 간단히 식사를 했다. 거기에 있으면 라오스에서 지내는 동안 느꼈던 어쩔 수 없는 소외감과 외로움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나를 두르고 앉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이방인들이었으니까.


    카페 조마에서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오면 늦은 오후, 거리엔 지붕 없는 가게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몽족 아주머니가 수놓아 만든 보자기, 종이로 만든 동그란 등, 나무를 깎아 만든 목걸이와 팔찌. 소박한 물건들 위에 메콩강의 냄새와 먼지가 얹혀 있었고, 그 사이를 고양이 몇 마리가 느리게 다녔다.


    한 번은 메콩강변에서 보트 레이싱 축제인 '억판사'가 열렸다. 친구들은 오토바이에 나를 태우고 함께 축제에 가주었다. 비엔티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은 밤의 축제. 거기엔 라오스 음식을 파는 수많은 간이식당들과 만국기, 엄청나게 크게 튼 음악 소리, 그리고 아주 허술해 보이는 간이 범카가 있었다. 우린 범카 앞에 줄을 섰다가 전기가 너무 크게 튀는 바람에 겁을 집어 먹고 돌아 섰었다. 그걸 타지 않아도 놀 건 많았으니까. 아, 그렇게 신나게 놀고 돌아간 교사 기숙사엔 도둑이 들어 노트북 몇 대가 사라지는 소동이 있긴 했지만... 잊을 수 없는 축제였다.


    룸메이트인 라오족 에스더 언니는 여행자들은 쉽게 가닿을 수 없는 동네 깊숙한 곳으로 종종 나를 데려갔다. 나무판자로 지은 허름한 미용실에 들어가 몇 백 원짜리 비닐 샴푸를 사면 미용실 아주머니는 아주 시원하게 내 머리를 감겨 주었다. 그다음엔 라오스 전통 치마를 지어 입으러 시장에 나갔다. 라오스의 젊은 여자들은 친구 결혼식이나 졸업식, 생일파티 같은 행사가 있으면 색깔을 맞춰 새 옷 지어 입기를 잘했다. 에스더 언닌 파란색을 좋아해서 꼭 하늘색 블라우스에 금실로 수가 놓인 진한 파란색 치마를 지어 입었다. 나도 언니를 따라 치마를 지어 입고 친구 결혼식에도 가고 교회 행사에도 갔었다. 그러면 나도 꼭 라오스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카오니온과 땀막훙을 손으로 먹는 게 자연스러울 때도, 그 더운 나라에서 감기에 걸렸을 때도 나는 꼭 라오스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비엔티안에 대한 글을 쓰면 쓸수록, 써야 할 것들이 쏟아진다. 어쩌면 그리운 생활에 관하여 글을 쓰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보낸 날이 백 날이면 나에겐 백 개가 넘는 글감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써야겠다. 혹시 오늘 밤엔 메콩강과 카페 조마와 에스더 언니가 꿈에 나오지 않을까 싶다.


2010, 비엔티안, 라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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