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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8시 출근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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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수 Jan 31. 2022

28인치 캐리어로 첫 출근한 그녀

그녀 이야기 1.

나로 하여금 측은함과 한숨을 오가게 만들었던 그녀의 장면 몇 가지.


<장면 1>

그녀가 처음 출근하던 날 사무실 직원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28인치는 족히 돼 보이는 크기의 캐리어와 그 위에 얹은 짐, 양 어깨에도 잔뜩 짐이 든 가방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나.  도대체 이것들이 다 뭐예요?

그녀.  오늘 아침 출근하려고 집에서 나오면서 짐 챙겨 온 거예요

직원 A.  아니, 이사를 미리 안 하고 왜?

그녀.  미리 정해뒀던 곳엘 갑자기 못 들어가게 됐다고 어제저녁에 부동산에서 연락을 받았어요. 그래서 오늘 다른 데로 가야 해서 이렇게 됐어요

직원 B.  하루 만에 또 집을 구했다고요?

그녀.  네. 부동산에서 미안하다고 자기들이 책임지고 오늘 들어갈 수 있는 곳 소개해준댔어요

나.  만약 안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리고 집이 마음에 안 들면?

그녀.  무조건 들어가야죠 뭐.

직원 A.  차 가져왔어요?

그녀.  아뇨. 저 차 없어요. 그리고 엄마도 운전을 못 하시구요.

나.  그럼 그 먼 데서 택시 타고 왔어요?

그녀.  지하철요.

       (--라며 해맑게 웃었다.)

사무실 직원 10인 일제히:  네에????


그녀는 그런 여자다.

앞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데도 혼자서 저 이삿짐을 들고

출근 시간대의 복잡한 지하철로 1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오는.

에스컬레이터 없는 곳에서는 저걸 두 손으로 낑낑대며 옮겼을 것이다.



<장면 2>

고용센터 주무관이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나를 찾았다.


"팀장님, <그녀> 샘 있잖아요. 일을 어떤 식으로 하시나요?"

"아주 열심히 하지요. 근데ᆢ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상담사 바꿔 달라는 민원이에요. 민원인이 센터로 바로 전화를 하셨네요. 그 샘이 열심히 하는 건 잘 알아요. 저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서 물어보고 해서 잘 알죠. 그런데 그 민원인이 하는 이야기가 너무 취업 압박을 한다고.. 그래서 제가 샘을 좀 두둔하기도 했는데 뭐 암튼 계속 상담은 힘들 것 같아요."


하----- ㄴ숨.


"잘 알겠습니다. 제가 면담고 조치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민원인이 <그녀> 샘이랑 통화하기 싫다고, 무조건 바꿔 달라고 해서 아예 기관을 바꿔야 할 것 같으니까 관련 서류 챙겨서 보내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뭐 잘하려다가 그런 건데요.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하하"


'?.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네.. 서류 챙겨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곧바로 그녀를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어떻게 된 건지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해명을 들을 수 있었다.


"아, 그분. 제 문자도 씹고 카톡도 씹고 해서 다른 샘 폰 빌려서 전화했더니 받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좋게 얘기하고 그분도 뭐 알았다 하고 좋게 좋게 전화 끊었는데 왜 그러지?.. 오늘 통화 됐거든요."

"샘 연락을 왜 씹어? 뭐라고 했길래?"

"전 그냥 하루에 두 번씩 취업정보 준 것밖에 없어요."

"그건 누구라도 하는 거잖아. 그 외는 없어? 잘 생각해봐"

"취업 압박이라고 했다는 걸 보니 그럼 그거네요.

제가 상담할 때, 제가 주는 취업정보에 대해 지원하지 않으면 지원이 끊긴다고 좀 강하게 말하거든요.

다른 분들은 제가 주는 취업정보로 열심히 지원하는데 이 분은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우리 일이니까 계속 문자, 카톡으로 제공했더니 언젠가부터 1이 사라지지 않더라구요.

차단했나 싶어 전화했더니 전화도 안 받고..아마 전화도 차단했던 모양이에요"

"그럼 좀 놔두지 다른 사람 폰으로 전화는 왜 했어?"

"진짜 차단했나 궁금하기도 하고, 차단했다니 괘씸하기도 하구요. 정부가 세금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인데..."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쌍방향 소통이 문제였다.

내가 왜 그녀를 보며 질주하는 경마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확실히 알 것 같다.

자기가 달려야 할 길만 볼뿐, 주변은 안대로 눈을 가린 말.


조금만 더 그 민원인의 반응을 세심하게 챙겼더라면 좋았을 걸 그렇게 숨 막히게 몰아붙였으니.. 게다가 번호를 속이고 전화까지..

자기가 이루어내야 할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이런 실수를 하게 된다.

일은 되겠지만 사람을 잃는다.


그건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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