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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8시 출근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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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수 Feb 02. 2022

워라밸의 오해

누가 현명하다 하는가

일과 생활의 밸런스, 균형.

'라떼'세대의 헌신, 봉사, 희생은 'X세대'의 워라밸로 대체되기 시작하더니 'MZ세대'는 아예 일하지 않는 파이어족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건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일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싶다.

'라떼' 세대라도 파이어족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MZ세대라도 헌신, 봉사, 희생하는 사람은 분명 존재하니까.

'일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닐까.


출근하는 차 안에서부터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꾸역꾸역 시작하는 것이 지긋지긋하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이 일이 끔찍하게 싫은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일 때문이 아니라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쓰고 싶다는 일탈의 유혹이 큰 것이다.


그러나 사무실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변신'을 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이 직장을 다니는 이상은 얼마를 받느냐와 상관없이 '나의 쓸모'를 증명해내야 한다.

[카프카의 벌레]가 되지 않으려면.


아마 이 생각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갖는 생각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일과 (개인) 생활 사이 어느 정도의 선이 현명하게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것일까?

난 시대에 맞는 상식을 가진 사람인가?


8시.

이누리는 벌써 출근해 있다.


나는 출근길 교통 정체를 끔찍이 싫어해서 이 시간에 나오지만 아무튼 사무실에서 두 번째 출근도장찍는 사람이다.


느긋하게 커피도 마시고 간단한 아침 요기 하며 하루의 뉴스를 훑어보온라인 커뮤니티를 들어가 보기도 하고 달력을 보며 다가오는 이벤트를 체크하는 등 대체로 개인적인 볼일다. 

아침에 집에 있는 시간 30분을 줄이면 한 시간의 여유가 생기는 셈이다.

나의 오랜 출근 습관이다.


긴 사무실 끝, 그러니까 출입문 근처에서 이누리가 앉았다 섰다 구부렸다 하며 한참을 부시럭대고 끙끙거렸다.


아마 또 사무실 정리를 하고 있겠지.

입사한 지 1년 6개월이 지나 막내 벗어난 지도 제법 됐는데 이누리는 참 여전하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서.


언젠가 한 번은 농담조로 내가 그랬다.


"성질 급한 놈이 손해야. 좀 두면 다른 누군가가 할 걸 뭐하러 그렇게 다 자기가 하려고 그래? 다른 사람도 일할 기회를 좀 줘!"


내가 안타까워하거나 말거나 이누리는 그렇다.

일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약은 꾀를 내며 적당히 도망가거나 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일을 한다.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었다.


실적은 평균 정도 되지만 온갖 사무실 돌아가는 사정에 훤하다. 다른 사람이 해야 할 몫의 일까지 해내니 당연히 직원들과도 잘 지낸다.


8시 45분.

대부분의 직원들이 이 시간대에 출근을 마친다.

가방을 정리하고

줄 서있는 1층 커피집에 가서 미리 주문했던 커피를 받아오고

컴퓨터 부팅을 하고 자질레한 개인 일을 본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나의 잔소리가 한 차례 있었다.

가만 놔둬보니 누가누가 출근 땡을 잘하는지 마치 내기라도 하듯 거의 9시에 임박해서 출근하고는 9시가 넘어가도 커피, 냉장고에 도시락 넣기, 개인용품 사러 가기, 화장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9시는 업무가 시작되는 시간이지 사무실 도착 시간이 아니 일갈한 후는 대체로 시간을 잘 지키는 편이다. 물론 그날 교통상황이나 개인 사정에 따라 들쭉날쭉 하기는 해도 어쨌든 9시 전에는 최소한의 업무 준비가 끝난다.


물론 이것해 혹자는 컴퓨터 전원을 누르는 시간이 업무 시작이라고 하는 등의 반박이 있을 수도 있으나 다들 수긍하고 넘어가 줬다.


8시 55분.

김예진 도착.

내 잔소리가 있기 전에 전광석화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모든 준비를 세팅하고 끝낸다.

김예진의 칼출근은 칼퇴근과 한쌍의 조합이다.

김예진의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라는

6시 알람이 이젠 익숙하다.


김예진은 책 잡히지 않도록 일과 자기 생활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매우 잘하는 편이다.


영리하고 업무처리가 빨라서 일이 쌓이지 않 제시간에 끝내고는 쿨하게 퇴근한다.

퇴근시간 1~2분 차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의 10분을 좌우하는 것에 대해 무용담 얘기하듯 하는 걸 들었다.


한 번 김예진의 퇴근시간에 맞춰 같이 지하철을 타봤더니 한 번을 안 쉬고 뛰다시피 해서 승강장에 도착하자마자 들어오는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딱 정해진 규정에 맞추어 최대한, 요만큼도 자신의 노력이나 땀을, 시간을 손해 보지도 않으려 했고 그렇다고 조직에, 일에 해를 끼치지도 않았으며 요구받는 만큼만 실적도 냈다


그래서 내 잔소리 원천 차단되는데 그래도 뭔가 한 마디 하고 싶은 찜찜함을 남긴다.

영리하고 일손 빠른 사람에 기대하는 뭔가가 충족되지 않는 그런 씁쓸함 같은 거.


9시.

드디어 <그녀> 도착.

일찍 오면 5분 전, 보통은 1~2분 늦게 오는데

그나마 오늘은 제시간에 도착했다.


되도록 그녀 쪽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대신 테러진압요원처럼 잔뜩 웅크리고 낮은 자세로 들어오는 모습을 난 내 미간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실적은 여전히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다. 늘 책상 위는 자료와 각종 사무용품들로 정신이 없고 전화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며 업무 정리를 하느라 자발적 야근이 잦다. 그리고 민원도 가장 많 발생한다.


이누리, 김예진, 그녀.

솔직히 말해 난 이벤트나 프로젝트가 생기면 이누리를 찾게 된다.

물론 기계처럼 정확하고 분석력이 탁월한 김예진도 필요하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 좌우 살피지 않고 돌파해야 할 일에는 <그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체 일을 기획하는 단계나 마무리하는 시점이 되면 이누리를 찾게 된다.

지극한 정성이 있는 일꾼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의 감동을 만들어내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성과를 내주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이누리가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자청해서 퇴근 후 추가 작업을 하는 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기회란 부지불식간에 생각지 못한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도 사람에 의해서ᆢ

 이누리는 확장 오픈하는 새 사무실의 최연소 책임자로 인사발령됐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혀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용 23장/ 영화 '역린'에 나오는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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