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부처님[E.3 믿을 만한 사람?(2)]

인도 불교 유적지 순례기 : 날란다, 빠트나 편

by 노루

날란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날란다 사원은 고대 인도 불교의 마지막 양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불타의 세계, 나까무라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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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그 운동장(?)이다 이른 아침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동물들도 많았다.
KakaoTalk_20190215_095919415.jpg 자세히 보면 왼쪽에서 똥을 싸고 있는 아이를 볼 수 있다.
KakaoTalk_20190215_095920413.jpg 운동장을 넘어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내 앞의 아이는 자기키보다 더 큰 수레를 밀고 있었다. 맨발로.



KakaoTalk_20190215_095921750.jpg 날란다로 가는 버스, 갑자기 내 앞에 있는 얘가 내 사진을 찍었다. 뭐하냐고 물으니, 날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나를 찍고 있는 그를 찍었다.


1. 쏘 쏘리


분명 미얀마 스님께서 날란다는 7시 30분에 연다고 하셨다. 그래 6시쯤 절을 나와 날란다로 향했다. 미얀마 절에 바로 앞의, 운동장(?) 하나를 가로 질러서 가면, 큰 도로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가는 버스를 아무거나 세워서 타면 날란다로 갈 수 있다.


딱 7시 반에 날란다 입구에 도착을 했다. 날란다대학 유적은 입구에서 약 8분 5분 정도 릭샤를 타고 쭉 이동하면 나왔다. 먼저 입구의 시장에서 바나나와 사과를 사서 먹고 짜이 한잔을 했다.


내가 짜이집에 들어온 것을 보고 릭샤꾼들이 어느새 가게 앞에 차를 대놨다. 한 분은 들어와서 짜이 한 잔을 하시며 말을 걸어 오셨다. 그곳 까지 가는데, 5~10루피면 충분해 보였지만, 왠지 관광객이라는 보너스로서, 실망시켜 드리기 미안했다. 나한테 더 받을 생각을 하시고 이리로 오셨을 것인데, 나도 많이 드릴 순 없었다.


내가 100루피~200루피 가격에 꼼작도 안하고 도망가자 결국엔 20루피에 유적지 입구까지 이동했다. 10루피나 5루피가 현지가로 보였다. 제돈 주고 타고 미안했다. 표정들을 보면 미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 식빵 두 조각


박물관과 유적지는 아홉시에 열었다. 약 한 시간 반 정도 시간이 남아서, 박물관 입구에 위치한 식당에 갔다. 식당의 음식을 내가 다 먹어본 것은 아니지만, 밖에서 무엇이든 먹고 오늘 것이 나았다.


시간이 남아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곳이지만, 식빵 두 개(60루피)를 구운 것 고는 상당히 비싸게 느껴졌다. 여기서는 그냥 차만 마시고, 자리만 이용하는 것이 좋을 뻔했다.


이런 부정적인 피드백에는 역시나 막타가 있다. 오픈 시간이 다 되어 계산하려고 영수증을 받았다. 사장님은 아침에 문을 열었으니, 팁을 받아야겠다고 하신다. “아니 아무도 이용 안하는 시간에 내가 이용 했으면 더 싸야 되는거 아니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10루피를 더 넣어 드렸다. 십루피를 넣으면서 괜히 쪼잔한 놈이 된 것 같아 또 기분이 상했다.


이 식당에서 관련 서적도 판매하고 있어 이곳에서 책 2권을 구매 할 수 있었다. 처음엔 책 가격도 후려치셨다. 내가 살랑 말랑하니, 드디어 가격을 내려주셨다. 정가가 정가가 아님을 기억해야 했다.




3. 200루피 이상 빌려줘


나에게 “남호호렌개쿄”를 물어보던 친구를 날란다에서 한 번 더 만났다. 날란다 대학 유적 매표소였는데,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를 우연히 3번이나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그는 그의 친구 2명과 같이 여행 중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마치고 나는 유적을 보러 반대편으로 갔는데, 나에게 급하게 달려왔다. 다짜고짜 나에게 200루피 이상을 빌려줄 수 있는지 물었다. 자기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빠트나로 갈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200루피가 그렇게 큰돈은 아니지만, 뭔가 수상했다. 나도 학생이라 돈이 없다고 하니, “정말 돈 없어?”라고 되묻는 그게 어이가 없었다. 200루피면 200루피지 200루피 이상은 뭐야?


결국 돈은 빌려주지 않았다. 낌새가 이상했다. 지갑을 잃어버렸으면 같이 다니는 친구 둘에게 빌리면 되는 거 아닐까? 굳이 왜 나에게 빌려려고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연히 만난 3번을 이용해, 그 반가움을 이용하여 사기를 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 아니면 말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에.






IMGP2193.JPG 여기였어요. 200루피 이상 빌려달라며 나를 쫓아온 곳이. 표지판은 유적지 입장 비용 차이를 볼 수 있다.

4. 유적지 입장 비용에 관하여


인도의 유적지 입장 비용은 상당히 비싸다. 현지인의 약 10배에서 15배 정도 차이가 난다. 타지마할의 입장료는 내가 갔을 당시 1250루피였다. 어쩌다 유적지 2군데를 들어거야하는 상황에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까지 온다.


나의 경우 여행 중에 입장료만 약 20만 원 정도는 쓴 것 같다. 작은 박물관은 가격이 5~10루피로 쌌지만 델리 박물관 같은 곳은 거의 유적지 수준으로 받고, 입장하지는 못했지만 빠트나 박물관의 경우에도 특별열람실 입장을 위해서는 600루피를 내야했다.(물론 들어가지는 못했다.)


실제로 보고나면 그 값이 전혀 아깝지 않은 곳들이지만, 10~15배 차이가 나는 가격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냥 안주고 안보는 경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실제로 나도 힌두 사원이나 불교관련 유적이 아니면 굳이 돈은 내지 않고 밖에서만 구경한 경우도 있었다.


유럽의 유로패스 같이, 인도의 유적지 프리패스 같은 것이 있으면 어떨까 생각이 든다. 한 곳 두 곳만 방문한다면, 기꺼이 냈겠지만...또 내가 돈이 많다면 그냥 냈겠지만.. 그들에게 비싸듯이 현재의 나에게도 그 돈은 적지 않은 돈이었다.



5. 학문의 중심지, 변질의 중심지


그 식당에 짐을 맡기고 날란다 유적으로 향했다. 날란다의 학생 수는 거의 6,000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들어오기 위해서 까다로운 면접을 봐야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정보를 책에서 읽고, 그 시대에 6,000명이나? 생각하며 믿지 못했는데, 가서 유적지의 크기를 보고나서 납득을 할 수 있었다.


이곳은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고, 또 그렇게 때문에 불교의 쇠태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또 이곳에서 공부하기 위해 인도는 물론 다른 나라의 많은 스님들이 와서 입학을 기다렸다고 한다. 면접도 상당히 어려워서,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은 인도 전역에서 난다긴다 하시는 분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고한다.


스님이나 수행자들은 장학금처럼 그 지역의 왕에게 지원을 받았다고 하고, 일반 학생들은 모든 비용을 자비로 내야 했다고 한다. 교육기관이라는 특성상, 일반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었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외부와의 교류가 끊긴 채 힌두교의 주술적이고 제사적인 특징들이 불교와 융합되었다고한다. 불교 교육의 중심지가 변함으로써, 인도 불교의 쇠퇴와도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고 한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외관은 주황색 벽돌로된 비슷한 건물의 연속이었다. 낸 돈이 아까워서 구석구석 돌아다녀 봤지만, 우리나라 대학교 캠퍼스 구경하는 것이랑 비슷했다.


날란다에는 사리불존자의 탄생을 기념하는 탑이 있다. 사리불은 부처님의 십대 제자 중 지혜제일이라고 불렸는데, 그의 이야기를 발췌해왔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사리불과 목건련은 원래부터 친구였는데 우파팃샤와 콜리타라고 불렸다. 둘 모두 한날한시에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둘은 해마다 열리는 라즈기르의 축제에서 돈을 뿌리며 놀다가, 어느 해에는 이 돈 뿌리기에 마져 흥미를 잃는다.


당신의 가르침은 이것뿐입니까?


그날따라 두 사람은 재미도 없고 우습지도 않아 돈을 뿌려 줄 기분마저 일지 않았다. 다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걸 구경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소란스러운 축제도 얼마 안 있으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텐데.... 백 년 뒤에는 무엇이 남을까. 내가 찾고 있는 건 이런 것이 아닌데. 다만 해탈일 뿐인데. 그렇다 그 해탈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콜리타는 우파팃샤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 둘은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이야기 하며 해탈의 길을 찾기로 결심한다. 둘은 라즈기르에서 유명한 *산자야라는 회의론자의 제자가 되어 그 밑에서 수행한다. 두 제자는 며칠 만에 산자야가 가르쳐 준 것을 완전히 터득했다. 그리고 물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가르침은 이것뿐입니까. 아니면 이것 말고 따로 있습니까?”

“이것이 전부다”


*산자야 : 산자야 벨리티풋타로, 부처님 시대 당시의 **육사외도 중 하나이다. 진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회의론과 불가지론을 주장했다.


**육사외도 : 석가모니 부처님과 동시기에 활동했던 6명의 사상가를 뜻한다.



실망을 한 두 사람은, 다른 스승을 찾으러 길거리로 나왔고, 서로 진짜 스승을 만나면 서로에게 와서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르나트에서 첫 번째 가르침을 받았던 오비구중 한 명인 아슈바짓이 라즈기르 근처에서 탁발을 하고 있었다. 그가 걷는 모습을 본 우파팃샤는 그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임을 직감하고 그를 쫓아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 밑에서 출가했습니까?

“보건데, 당신의 몸은 빛나고 살갗은 아주 맑습니다. 대체 당신은 누구 밑에서 출가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까?”

그때 아슈바짓은 조용히 대답했다.

“위대한 사문이신 샤카푸트라는 석가족에서 출가하셨습니다. 나는 그 세존 밑에서 출가했습니다. 세존은 나의 스승이시고, 나는 *세존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

우파팃샤는 어떤 가르침을 설했는지 묻지만, 아슈바짓은 우파팃샤가 그저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줄 경계하면서 대답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아슈바짓은 제발 조금이라도 설명해달라며 간청했다. 그의 열성을 보고 아슈바짓은 시를 읊었다.

사물은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여래는 그 원인을 설했네.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위대한 사문을 이같이 가르쳤네.

*세존 : 세상을 이익되게하고, 세상에서 존중을 받는 사람


이 시를 들은 우파팃샤는 감사를 표하면, 부처님이 계신 곳을 묻고 콜리타에게 달려간다. 콜리타에게 들은 바를 전하고 둘은 같이 부처님께 가기로 결정한다. 둘은 스승이었던 산자야에게 가서 부처님에게 가 가르침을 받을 것을 권하나, 산자야는 이미 명성과 신망이 있었으므로 거절했다. 결국엔 산자야의 제자 500명 중 250명이 우파팃샤와 콜리타를 따라 죽림정사로 향하게 된다. 부처님은 그들이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이와 같이 말했다.

오라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두 친구가 함께 온다. 콜리타와 우파팃샤, 이들은 내 두 큰 제자가 될 것이다.” 이후부터는 우파팃샤는 샤리푸트라, 콜리타는 목갈라나라고 불렀다. 250명이 죽림정사에 이르자, 부처님은 손을 내밀었다.

“오라 비구들이여.”


이 두 사람을 제외한 250명은 부처님의 설법을 한 번 듣고 깨달음을 얻었지만, 목갈라나는 출가한지 7일 째 되는 날 졸다가 깨달음을 얻었고, 사리불은 15일 째 되는 날 사리불의 친척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것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 둘이 출가를 했을 때, 이런 노래가 라즈기르에 퍼졌다고 한다.

마가다 산골 도시에

고승이 나타나

산자야의 제자를 모조리 앗아갔네

이 다음은 또 누구의 차례일까


이 둘은 우리나라에서는 사리불과 목련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둘 모두 부처님보다 나이가 많았고, 부처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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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잘 정돈 되어 있었다. 붉은 색 벽돌들과 잔디의 푸른 빛깔이 잘 조화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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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규모다. 기숙시설부터 강의시설까지 모두다 있었을법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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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눈이 없어서인지, 내 눈엔 그게 그거였다.
IMGP2253.JPG 사리불 존자의 탄생을 기린 탑이다.가장 큰 탑이었다..


6. 사리불 존자의 탑과 박물관


사리불 존자의 탄생지가 이 마을이었다고 한다. 사리불과 목련 존자 모두 각자의 마을의 이름을 따 만들었으니, 이 마을의 이름은 우파팃샤 였을 것이고, 이 근처에 콜리타라는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돈을 뿌리고 놀았을 어린 사리불과 목련존자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너무 웃겼다. 전생이 있다면, 아마 나는 그 돈을 줍던 사람이 아니였을까 상상도 해보았다. 어쩌면 그 돈이라도 주워서 여기 있을 수 있는 건지도.


입구에서 들어가면 가장 크게 보이는 것은 사리불의 탄생을 기념하는 탑이다. 우파팃샤로 태어나, 지혜제일 사리불로 돌아온 그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탑은 보드가야 마하보디대탑과 비교 하여도 규모면에서는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유적지에서 나와, 반대편의 박물관으로 갔다. 다른 박물관과는 다르게 기억이 남는 점은 주조 도구와 같은 유물이 보였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석상과, 동상 주조 기술까지도 가르쳐졌다는 증거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종합대학이었던 것 같다.




7. 에드워드


관람을 마친 후, 박물관 밖 벤치에 잠시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중년의 남성분도 내 옆에 앉으셨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어디서 오셨냐고 물으니, 뉴질랜드에서 오셨다고 한다. “키아오라!”(안녕하세요!) 내가 외치니 에드워드는 어떻게 마오리어를 아냐고 물었다. 그곳의 질란디아라는 원예회사에서 일을 했었다고 하니, 자신도 그 기업을 안다며 반가워했다.


에드워드는 미국과 뉴질랜드에서 온 8분 정도의 여행자들이 같이 움직이면서 불교 유적지 순례를 하고 있다고 하셨다. 차를 하나 렌트하여서 움직이는데, 정말 편해 보였다. 부러웠다. 좋은 차는 에어컨과 와이파이도 된다는데 아마 그런 종류인 것으로 보였다.


뉴질랜드에서도 사람들이 모여서 수행을 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주로 명상을 하신다고 하셨다. 별다른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지만, 같은 여행길에 올라 있다는 것에 동질감을 느꼈다.


에드워드는 이제 빠트나를 거쳐, 쿠시나가라로 향한다고 하였다. 나도 빠트나로 향하는 길이여서, 내심 히치하이킹이 가능할까 기대 했지만, 에드워드는 나의 여행의 행운만 빌어 주었다. 아쉬웠다. 나도 그들이 무사히 이 여행을 마치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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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란다 박물관 내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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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석상뿐 아니라 힌두교 석상도 있었다. 또 주조도구 유물도 눈에 뛰었다.
IMGP2415.JPG 박물관 외부이다. 저어기 오른쪽에 에드워드가 내 옆으로 오고 있을 때 우연히 찍었다


IMGP2201.JPG 다시 버스를 탈어 돌아가는 길, 뒤돌아 본 날란다에 한 가족이 걸어가고 있었다.



빠트나


붓다 시대에 이곳은 겐지스 강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붓다는 대열반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에서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

인도불교 성지순례 가이드. 무념



1. 마! 두르가!


빠트나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비하르로 이동해야했다. 약 40분 정도가 걸렸고 가격은 20루피였다. 그곳에서 다시 빠트나로 가는 버스를 탔다 시간은 2시간에서 2시간 반 정도가 소요됐다. 빠트나 버스 정류장 근처에는 숙소가 많아서 쉽게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정류장 바로 앞의 300루피에 허름한 싱글 룸 하나를 잡았다.


올라를 불러 빠트나 박물관으로 갔다. 여기서는 올라 가격이 조금 쌨던 것 같다. 8분 정도 이동하는데 160루피 정도였다. 돌아올 때 탔던 릭샤는 약 60루피였는데, 현지인들은 20~30루피 정도 내고 타는 것으로 보였다. 빠트나 박물관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마 두르가 뿌자 때문에, 내가 도착한 날을 기점으로 3일간 휴관을 하였다. 빠트나에는 바이샬리에서 나온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었다.


9월 달에 인도에 왔을 때는 가네샤의 뿌자가 진행 중이었고, 10월 달에는 마두르가의 뿌자가 있었다. 뭐 달마다 신들의 축제다. 축제마다 박물관은 항상 일정 변동이 있는 것 같았다. 잘 알아보고 갔어야 했겠지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곳에서 지금 보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 아쉬웠다. 두르가가 얄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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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안으로 빠트나 박물관이 보이는데, 못 들어갔다.


2. 다시 기록, 물갈이


써 놓은 일기장에 따르면, 빠트나에서 써 놓은 글이 정신이 없을 때 써 놓은 글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날란다까지는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바라나시 휴식 이후부터, 사르나트, 보드가야, 라즈기르, 날란다, 빠트나까지 계속 이동을 하면서 체력이 많이 바닥나 있었다.


보드가야에서 3일 정도 체류 했지만, 개놈들 덕분에 푹 쉬지를 못했었다. 거기다, 빠트나에서 먹었던 콜라가 탈이난 것 같았다. 그때, 콜라 병의 입구에서 옮은 세균 때문에 설사가 걸린 것이 확실했다.


병으로 된 콜라는 입구 주위를 닦고 먹어야 한다는 글을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체력까지 많이 떨어진 시점에 시작된 물갈이는 지옥이었다.


새벽 내내 8번을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였다. 이제 휴지조차 다 떨어져서, 나는 일기장의 달력 부분을 찢어서 휴지로 사용을 했다. 하필 빠트나를 오기 전 휴지가 다 떨어지고, 빠트나의 슈퍼에서는 휴지를 팔지 않았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없는 곳에는 화장지를 파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마지막 설사부터는 종이까지 다 써버렸다. 일기를 써야 하는 부분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현지 식으로 물과 손으로 뒤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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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오늘이 두르가 뿌자의 마지막 날 인 것 같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IMG_6202.JPG 이 아저씨가 파는 콜라를 먹고 설사에 걸렸다. 아저씨의 고의는 아니지만...내 장내 미생물이 약한 탓이다.



3. 손비데


마날리에서는 콧물이 흘러서, 휴지를 계속 가지고 다녔다. 도하와 니모를 만났을 때, 화장실에 간다는 도하에게 휴지를 권했더니, 자기는 비데가 있어서 괜찮다며 사양을 했었다. 그래서 비데가 어디 있는지 물으니 손비데가 있다고 하자 그제서야 이해를 했다.


나도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어 계속 휴지를 사용했었다. 그러다,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현지 체험이다 생각을 하고 시도를 해봤다. 나름 괜찮았다. 처음에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고, 반복할수록 이질감도 없어졌다.


어떤 인도의 귀족? 여자 분이 오히려 휴지를 쓰는 외국인을 더럽게 생각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제야 그 분의 생각이 이해되었다. 오히려 절대적인 깨끗함을 보자면 손비데가 훨씬 깨끗했다.


깨끗함을 똥분자 수로 계산한다면 손비데를 사용한 측이 월등히 그 수가 적었을 것이다. 휴지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휴지 표면의 공간으로 인해서 손비데 만큼 깨끗이 닦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작은 똥분자들은 그 공간들을 통과하여 손에도 묻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휴지를 사용하지 않아서 절약 될 수 있는 나무들은 엄청날 것이다. 물론 문화의 다름이겠지만 말이다. 절대적 깨끗함이 아니라, 자기의 방식대로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뿐임을. 직접 닦고 나서야 감사할 수 있었다.


손비데를 사용해왔던 인도인들에게, 그들이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무심히 지켜온 나무들에 감사했다.


4. 믿을 수 있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화장실에 갈 때 마다 힘이 빠졌다. 힘이 빠지니 열이 나기 시작했다. 머리는 빙글빙글 돌았다. 배가 고팠지만 먹을 순 없었다.


기댈 수 있는 곳은 이곳에서 너무 멀었고,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여기에는 없었다. 여기에서 내가 믿고 의지 할 수 있던 것은 내 몸과 머리였는데 이것조차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니, 짐덩어리였다.


침낭 위에 누워 눈을 감으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냥 바로 델리로 가서 돌아갈까?, 아파서 온 것이니 그래도 가오는 상하지 않지 않을까?” 나쁜 생각에서 좋은 생각으로, 인도에서 한국으로 머릿속은 분주했다. 자신만만하게 여행하던 나는 이미 없었다.


아픈 몸에도 의지 할 수 없고, 계속 변하는 내 마음에도 의지할 수 없었다. 애초에 변할 수 있는 것에 의지하는 것 자체가 잘못 이었다. 변하는 것에 의지 한다면, 의지하는 대상의 변화에 맞추어, 의지하고 있는 나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믿을 만하다는 형용사가 사람이라는 명사 앞에 올 수가 있나?”


“나”라는 대명사 앞에도, “믿을만한”이라는 형용사도 올 수는 없다.


아주 무거운 닻처럼, 강한 해류 속에서도 절대 움직이지 않는 중량을 가진 것이 필요했다. 내가 기댈 수 있고, 내 존재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만이 가능했다.


-E4. 저못믿으시잖아요[바이샬리, 쿠시나가라]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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