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부처님[E.4 저 못 믿으시잖아요?(1)]

인도 불교 유적지 순례기 : 바이샬리 편

by 노루



저 못 믿으시잖아요?

괜찮아요 전 팀장님 믿으니까


영화 *독전, 영락의 대사 중



바이샬리


“바이샬리를 꼭 들려야 할까? 그냥 쿠시나가라로 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 결국에는 가기로 했다.


석존은 바이샬리 근처에 사는 모든 비구들을 모아서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한다. 바이샬리를 떠나면서 석존은 *아난다를 향하여 “이로써 내가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마지막이 되리라.“고 말하고 ‘코끼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뒤를 돌아다 보았다고 한다.


불타의 세계, 나까무라 하지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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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찍어 놓은 바이샬리의 시내(?)이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내렸다.

바이샬리는 *자인교의 발상지이기도 하고, 자이나교 신자도 많았다고 한다. 또 바이샬리의 주민들은 부자들이 많았고, 자유를 숭상해 전제정치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진보적인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아마 이러한 성향 때문에 주민들도 불교와 자인교에 더 매력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바이샬리로 오시게 되었을까?


바이샬리는 왜?


이 거리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부유하고 번창해, 귀족들은 아름다운 저택과 동산에서 생황을 즐기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혹심한 가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아서 거리에 버려진 시체를 처리할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질병이 유행하고, 그로 인해 병으로 죽는 사람도 점점 더 늘어났다. 사람들은 이 같은 질병을 악귀가 퍼뜨린 것이라고 믿었다.
곤경에 빠진 백성들이 이를 나라에 호소하자, 나라에서는 회의를 열어 대책을 강구했다.

어떤 사람들은 바라문교에서 하는 방법에 따라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 신흥종교의 교조를 불러오는 것이 좋겠다고도 했다.

그때는 불교 외에 자이나교를 비롯해 여섯 개의 신흥종교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사람들은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마침내는 부처님의 힘을 빌리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자인교, 자이나교 : 니간타 나타풋타를 교주로 하며 그는 마하비라라고 불렸으며 산자야의 회의론을 극복하려고 상대주의적 인식론을 수립하고 이원론적 우주론을 제시했다.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은 물질과 업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영혼 해방을 위한 방법으로 고행을 제시한다.



그 당시 부처님은 마가다의 수도 라자그리하 교외에 있는 죽림정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바이샬리의 릿차비인 가운데 마하리라는 사람을 뽑아 부처님을 모셔오도록 보냈다. 마하리는 바이샬리 정부 종교 고문의 아들이며,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젊은 시절 인도 서북부에 있던 학문의 도시 탁샤시라에서 배웠는데, 코살라의 프라세나짓왕과도 학우였다. 그는 어찌나 학문에 열중했던지 만년에는 실명할 정도였다고 한다.


마하리는 바이샬리 정부의 의뢰를 받고, 먼저 라자그리하에 가서 빔비사라왕을 만났다.

“부처님을 좀 보내 주십시오.”

왕은 그다지 탐탁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저 마하리는 죽림정사로 가서 직접 부처님을 만나 죕고 부탁드렸다.

부처님은 바이샬리의 불행을 동정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빔비사라왕의 허락이 있으면 가겠소.”

빔비사라왕도 어쩔 수 없이 동의한 뒤 부처님의 여행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라자그리하에서 갠지스강 기슭가지 닷새 동안의 여정을 빈틈 없이 준비한 뒤, 부처님과 5백 명의 비구들을 전송하기 위해 왕 자신이 동행했다. 갠지스강을 건널 배도 왕이 마련했다.

한 경전에 의하면, 배를 가지런히 띄워 다리를 만들어서 부처님 일행을 건네 주었다고 한다.

갠지스강 건너편에서는 릿차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부처님 일행을 맞았다.

부처님이 밧지족의 영토에 한 발을 들여놓자마자 천둥소리가 울리고 큰비가 내려 바짝 말라 버렸던 땅이 순식간에 젖었으므로, 사람들은 혹심한 가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행은 거기에서 사흘을 걸어 바이샬리에 도착했다.
그날 밤 부처님의 애제자인 *아난다에게 보경을 설하시고, 이 경문을 거리에 퍼뜨리라고 했다.

아난다는 밤을 세워 이 경문을 외며 부처님의 바리때를 손에 들고 물을 뿌리면서 거리를 걸었다.
이렇게 이레 동안을 똑같이 되풀이했다. 그래서 재해가 그친 것을 확인한 부처님은 바이샬리를 떠났다.

*아난다 :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두 기억하고 있기에 다문제일일이라고 불렸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며, 부처님이 돌아가시기까지 20년 동안을 옆에서 보필했다.



바이샬리는 또한 여성의 출가가 허락된 곳이다. 처음부터 여성의 출가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셨을까? 그 이야기를 발췌했다. 부처님의 친어머니 마야부인은 아이를 낳은 후 2일 후에 돌아가신다. 그 후,마야부인의 자매인 마하프라자파티에 의해서 길러진다. 부처님의 깨달음 이후, 고향인 카필라성에 방문을 하고, 카필라 족의 친척들은 부처님을 따라 출가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성의 출가만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시다


슛도다나왕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부처님은 카필라 교외에 있는 니그로다 동산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마하프라자파티는 부처님을 찾아와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세 차례나 간청했지만, 그때마다 거절을 당했다. 마하프라자파티는 소리를 내어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다.며칠 뒤 부처님은 카피라를 떠나 바이샬리 교외에 있는 마하바나정사에 머물게 되었다.


일단 성으로 돌아온 마하프라자파티는 아무리 생각해도 출가를 단념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손수 머리를 깎은 다음, 황색 옷을 몸에 걸치고 부처님의 뒤를 쫓아갔다. 이 때 석가족의 많은 여성들도 그녀를 따랐다. 맨발로 걸어가니 발은 부어 터지고 먼지투성이인데다 얼굴은 눈물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정사 밖에 서서 울부짖고 있는 여성들의 소리를 듣고 아난다가 문을 열었다. 여성들은 출가를 허락하도록 부처님께 힘을 써 달라고 시자인 그에게 부탁했다.

아난다가 부처님께 세 차례나 간청해 보았지만, 세 번 다 거절을 당했다.

그러자 아난다는 다시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했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성이 이 가르침을 따라 출가해서 수행을 한다면 남자와 같이 수행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난다야, 물론 그럴 수 있다.”

이 대답을 듣고 용기를 얻은 아난다는 다시 마하프라자파티가 부처님에게 바친 은혜를 말하고 꼭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몇 번이고 간청했다.

마치님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덟가지 조건이 따랐다.
...

아난다는 마하프라자파티한테 가서, 만일 이 여덟 조항을 받아들인다면 여성의 출가가 허락되라는 뜻을 전해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젊은이가 머리를 감고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듯이, 나는 이 여덟 조항을 한평생 소중하게 지켜가겠습니다.”

이와 같이 이 여덟 조항을 받아들임으로써 마하프라자파티는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그때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아난다야, 불교 교단에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수행의 순결이 유지되어 1천 년 동안 정법이 존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여성이 출가하게 되었으니, 수행의 순결은 오래 유지되지 못하고, 정법도 5백 년밖에 존속되지 못하게 되었다.

비유를 들어 말하면,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은 집안에는 도적이 침범하기 쉽다. 또 논밭에 물것이 성하면 열매를 거둘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출가하면 수행의 순결은 유지되기 어렵다. 큰 연못 둘레에 미리 둑을 쌓아 물의 범람을 막듯이, 나는 비구니들에게 이 여덟 가지 조항을 배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교 교단에 여성의 출가가 인정되었다.
...

그렇다면 어째서 부처님은 여성의 출가를 그토록 인정하지 않으려 했을까.

그 까닭도 앞에서 인용한 글에 의해 명백해진다.

즉, 부처님이 여기에서 문제 삼은 것은 여성의 능력 그 자체가 아니라, 여성이 승단에 들어올 경우 출가 승단이 변질될 양상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불타 석가모니, 와타나베 쇼코, 법정 옮김




1. 바이샬리! 바이샬리!


빠트나에서 바이샬리행 버스가 많이 없다고 가이드북은 소개했다. 보통은 하지뿌르로 이동을 하고 거기서 다시 바이샬리로 가는게 편하다고 한다.


하지만 밤새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한 번에 가고 싶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이샬리를 외치며 정류장을 돌아 다녔다.


한 분은 안 쪽으로, 안 쪽으로 가서 만난 분은 밖으로 손가락을 가리키신다. 병든 닭처럼 왔다갔다 하는 나를 불쌍하게 보셨는지, 한 남성분이 나를 이끌고 바이샬리 버스를 찾아 주셨다. 다행히 출발 직전의 바이샬리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정말 감사했다.


혹시나 화장실에 가고 싶어 질까봐 물조차 먹지 않았다. 제발 신호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새벽 내내 비워낸 이후로, 내 배도, 정신도 텅 비어 있었다.



2. 바나나 먹방


바이샬리까지는 약 2시간 30분이 걸렸다. 턱하니 도로 한 가운데에 떨어트려 주셨는데, “바이샬리이?” 물으니 맞다고 고개를 저으신다. 허름한 상점 몇 개만 있는 레알 시골이었다.


목이 너무 말라서, 과일가게에서 물과 작은 바나나 10개를 샀다. 이제 마려워도 쌀 수 있었다. 하정우가 김을 쑤셔 넣듯이, 나도 바나나를 입속에 우겨 넣었다. 배가 너무 고팠다.


바나나가 설사에 좋다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다. 어떤 분들은 라씨를 먹어야 한다고도 하고,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도 하고, 물은 먹어야 한다기도 하고, 병원을 바로 가야 한다고도 했지만, 일단은 버텨 보기로 했다.


뿌리에서 몸살이 났을 때 약을 약국에서 사서 먹었다가, 알러지 반응이 난 적이 있어서, 약은 거부감이 들었다. 요즘 병원은 괜찮다고 하나, 감염의 위험성도 있었고, 거기까지 갈 바에 그냥 앉아서 쉬고 싶다는 귀찮음도 컸다.


바나나로 치료가 되길 기도하며 산 자리에서 바나나 10개를 먹어 치웠다. 그런 나를 사장님이 신기하게 쳐다보신다. 작은 바나나 하나의 5루피 였으니, 시세보다는 비쌌지만, 훌륭한 양식이 되었다.



IMG_6273.JPG 스리랑카 절로 가는 길, 송아지가 어미 소의 젖을 먹고 있다.사람도 손으로 젖을 짜고 있었다.



3. 할 만해


베트남 절과 스리랑카 절이 멀지 않은 곳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가이드북에서는 베트남 절에는 무서운 개들이 살고 있다고 하여 스리랑카 사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스리랑카 사원은 크고 멀끔했다 타일이 바닥 전체에 깔려 있었고, 스리랑카에서 온 단체 신자들로 북적거렸다. 나는 깔끔한 2인실을 배정 받았다. 다행히 설사는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11시 정도였고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냥 쉬고 체력을 회복한 뒤, 내일 유적지를 보고 고락푸르로 이동을 하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또 하나는 12시쯤 나가서 근처의 유적지를 보고 4시~5시쯤 돌아와 휴식을 한 뒤 내일 아침부터 고락프르로 이동하는 방법이었다.


힘이 들긴 했지만, 이곳도 편히 쉴 곳은 못됐다. 특히 사원에서 밥을 제공해 주지 않아서 밖으로 나가서 밥을 해결해야 했다. 얼른 둘러보자는 생각으로 짐을 싸서 밖으로 나왔다. 카메라는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가지고 가길 포기했다.


스리랑카 사원은 기부제로 운영된다. 체크아웃을 할 때 돈을 드리면 영수증도 주셨다. 나는 500루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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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스리랑카 사원은 찍지 못했다. 맨 오른쪽은 스리랑카 사원 앞에 위치한 베트남 절이다. 무서운 개가 있다고 한다.



4. 네히이? 네히이?


이곳에서도 산치스투파가 있었다. 인도 산치스투파는 다 일본에서 만든 것인가 싶다. 같은 양식에 일본 절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곳에 오려고 하지 않았는데, 길을 착각해서 이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한 인도 친구 하나가 옆에 앉았다. 한 일 분 정도 있다가, 내 물병을 가리키며 먹는 행동을 보였다. 내가 “빠니?”(물) 하면서 건네주니 물을 벌컥 벌컥 마셨다. 시원하게 마시니 나도 시원한 기분이었다.


근본 8탑 중 하나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길에 꼬마 애들 2명이 와서 말을 걸었다. 아이들은 다짜고짜 이상한 물건을 사라고 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안 산다고 하니, 내가 하는 엉성한 인도어를 따라하며 놀리기 시작했다.


“꾸츠 네히!”(저리 가!)하면 “네히이? 네히이?” 외국인이 신기해서 애들이 신난 것이겠지만, 몸이 지치지 마음도 팍팍해졌다. 나도 삐져서, 놀리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사리가 모셔졌던 탑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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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스투파라고 나와있는데, 이런 탑이 있는 곳은 보통 일본 사원이 관리를 했다. 라즈기르에서 본 것과도 비슷했다.

5. 잊혀져서, 남을 수 있던걸까


산치 스투파에서, 15분 정도 걸어가 탑에 도착했다. 사이에 놓인 직사각형의 큰 연못을 돌아가야 했는데, 그 흔한 릭샤 하나가 없었다. 걸어가던 중 만난 릭샤 하나는 사람을 꽉채우고 가고 있었다. 내가 손을 흔드니, 씩 웃으며 쌩하고 가버렸다.


근본 8탑은 부처님 열반 후 사리와 재를 8개로 나눠 보관한 탑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출토된 사리를 빠트나 박물관에서 모시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입장료가 없다는 것이다.


탑은 흔적만이 남아 있었고, 역시나 관리는 거의 되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바람이나 재해, 홍수에 손상이 심할 것이 뻔했다.


뭐, 그런 모든 것을 겪고도 지금가지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오랜시간 잊혀져서 오히려 지금까지 형태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것이기에, 상처를 주기 위한 파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 반대로, 이미 기억속에서 잊혀졌기에 보존될 수 있기도 하다.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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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샬리의 근본 8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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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그러산책을 온듯, 가족들이 풀 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니 터만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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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8탑의 터 유적지 바로 옆이다. 몸이 너무 힘들어,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부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바이샬리 주변의 마을을 돌면서 설법을 하셨다고 한다. 주변 마을들을 돌고, 다시 바이샬리로 돌아 왔을 때, 바이샬리에서는 암바팔리라는 유명한 창녀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바이살리는 상업도시로 외부인의 출입이 잦았는데, 그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여인을 창녀로 만들어 그들을 대하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공인된 창녀는 재산과 지위가 있어 자유스런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이 암바팔리가 부처님이 도착한 소식을 듣고 찾아가 인사 드린뒤, 망고 숲을 기증을 했다고 한다. 이 때쯤 부처님의 몸에는 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입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시고 고통을 참았다. 병세가 완화된 모습을 본 제자 아난다는 부처님께 이렇게 말을 했다.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세존이시여, 지금 부처님의 얼굴을 뵈오니 병이 좀 나은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병드시자 저의 마음은 걱정과 근심으로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갑자기 열반에 드시면 어찌하나 생각하니, 사방이 캄캄해지고 전신의 힘이 빠져 아무 것도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아무런 가르침과 분부를 남기지 않고 입멸하시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니, 그것만이 위안이 되었습니다.”

아난타는 이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아직 열반에 드시지 않았습니다. 세간의 눈은 아직도 멸하지 않았습니다. 왜 지금, 모든 제자들에게 부처님 가신 뒤의 일에 대하여 가르침과 분부를 내리시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였다.
“아난타야, 교단이 지금도 나에게 무엇을 기대한다는 말이냐.

나는 지금까지 안과 밖을 구별하지 않고 법을 설하여 왔다.

법을 가르치는데 아낀 것은 하나도 없다.

만약 내가 교단을 통솔한다든가, 교단이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면, 교단에 대하여 내가 간 다음의 일을 지시할 것이지만 특별히 그러한 일은 없느니라.

아난타야, 나는 이미 여든 살이다. 나는 마치 낡은 수레와 같다. 낡은 수레를 수리하여 좀 더 운행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나의 몸도 겨우 지탱하고 있다.

방편의 힘으로 좀더 목숨을 연장하고 있다. 힘서 정진하면서 이 고통을 참고 있다.

나는 모든 사물을 생각하지 않고, 정에 들어 있을 때, 나의 몸은 안온하고 번민도 고통도 없다.

아난타야, 그러므로 마땅히 자기 자신을 등불을 삼고 자기 자신에 의해야 한다.

부디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아니된다. 자기를 등불을 삼고, 법을 등불 삼아라. 자기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여라. 내가 죽은 뒤에 능히 이 법대로 수행하는 자는 곧 나의 진실한 제자이며, 참다운 수행자이니라.”

신팔상록, 동국대학교



6. 무엇을 힘으로


스물여섯이라는 시간동안 빌려왔던 살아가는 힘이란 나와 남을 비교하거나, 미래의 내 모습과 현재의 나를 비교하면서 나온 차잇값이었다.


이제까지 사용했던 힘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보면, 결국에 내가 남을 보는 시선이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갈라지는 위와 아래 속에서 나는 스스로 만든 시선이라는 중력 속에 갇힌 죄수였다.


이 죄수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도끼를 가지고, 자신이 서 있는 이 감옥의 바닥 자체를 부수는 것이다. 이 바닥이 부숴진다면, 나는 끝없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바닥을 딛고, 바닥을 부심과 동시에 나를 바닥에 가둬두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애초에 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


“무엇을 힘으로”라는 질문에 지금 답할 수 있는 것은, 죄수가 바닥을 딛고 바닥을 부셨듯이, 이 탈출의 시작 또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응시하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멍청한 나는, 내가 질문을 던지면 자꾸 도망친다. 마주하기가 싫나보다. 이 감옥이라는 울타리 속에서의 안도감이 아직 그렇게 싫지 않나보다.


7.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사람의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로 사람이 진심으로 변화할 수 없다면, 태어난대로 살아야하는 것일까?


지금과 같이 살아왔고, 문제점을 느끼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왔던 방식에 익숙하다. 오히려 이렇게 느끼고 있는 내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이런 관점은 요즘은 마치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관점과 비슷하다. 심리테스트처럼, 이러한 결정된 사실들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더군다나 “키 큰”과 “똑똑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유전자를 가졌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더욱 더.


다윈의 이론처럼, 실제로 물려받은 유전자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그가 가진 유전자들은 바뀌지 않는다. 다윈의 진화설만이 사실이라면 정말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전자의 발현은 유전자에만 달려있지 않다. 발현의 관건은 조절이다. 아무리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더라도 발현되지 않는다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발현의 조절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외부의 환경과 자극이다. 외부의 자극에 따라 유전적 발현은 큰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이 자극마저 없다면, 변화의 가능성도 없다. 나를 포기해선 안된다.


이와 같은 대화 이후에, 바이샬리 인근의 마을에서 있었던 부처님과 아난다의 대화는 인상 깊다.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네가 원한다면, 조금 더 머물겠다”라고 말하지만, 아난다는 조금 더 머물러 달라고 청하지 않는다.


열반을 알리시다

“아난타야, 자리를 펴라, 나는 등이 아프다. 여기서 잠깐 쉬어야 겠다.” 아난타는 곧 자리를 폈다. 부처님께서는 자리에 누워 아난타에게 말씀하시었다.

“아난타야, 여래와 같이 온갖 신통력을 갖춘 사람은, 만약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일겁이 넘도록 이승에 살아 있으면서 세상을 이롭게 할 수가 있느리라.”

그 때, 아난타는 마음이 악마에게 붙잡혀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였다.

아난타는 부처님께서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말씀하셨으나,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언제까지고 부처님께서 이승에 계시어 중생을 이롭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어야 할 기회를 잃고 만 것이다.


...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땅이 크게 진동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 세상에서 땅이 크게 진동하는 것은 여덟 가지 인연 때문이다. 그 중에 하나는 여래가 *무여열반에 들 때이다.

” 그리고 조금 전에 마왕 **파순에게 3개월 뒤에 열반에 들기로 약속하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난타는 비로소 깨닫고 놀라, 부처님에게 더 오래 머물러 주실 것을 간청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아난타는 정신이 아득하였다. 더욱 부처님께서 세 번이나 물었음에도 깨닫지 못하여 청하지 않은 자기의 허물은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난타는 이 일로 해서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뒤에 비구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신팔상록, 동국대학교


*무여열반 : 돌아가심

*마왕 파순 : 마라 파파야스, 불교의 마신으로 욕계의 최상층인 타화자재천의 지배자이다.[위키백과]


8. 불이 없어서


근본8탑에 향을 올리고 싶었지만, 향만 있고, 성냥이 없었다. 그곳에 오신 분들에게 불을 빌리려고 했지만 아무도 가지고 계시지 않아서, 울타리 사이에 향만 꽂아 두고 그늘 아래서 휴식을 했다.


갑자기 밀려오는 피로감에 그 자리에서 눕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러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앉아서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다시 기억해보았다. 이곳을 떠나기전 마지막으로 바이샬리를 돌아보셔면서 아쉬워 하셨다고 한다. 어떤 부분이 뒤를 돌아보게 하셨을까?


그 당시와 지금이 많이 다르지 않았다면, 여전히 척박한 땅이었을 것 같다. 이 곳 사람들의 반골적인 기질을 좋아하셨을까. 어디쯤에서 이곳을 돌아 보셨을까?



9. 사자가 바라보는 곳


중각강당은 대림정사라고 불리는데, 이 정사는 바이샬리의 기근을 해결하신 부처님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한다.


근본 8탑에서 중각강당까지는 걸어서 이동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릭샤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관광버스에라도 얻어 타려고 하는데, 버스는 출발할 생각을 안했다. 앞의 슈퍼에 릭샤를 부를 수 없냐고 물으니 오토바이는 가능하다고 하여, 100루피에 합의를 봤다. 중각강당을 본 후, 스리랑카 사원까지 데려다 주기로 하였다.


10분 정도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을 가로질러 목적지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300루피였다. 차양막 하나 없는 유적에 들어가자마자 큰 탑을 볼 수 있었다. 석탑 주위에 여러 유적지가 있었고, 이 중 하나가 중각강당인 것으로 보인다고 가이드북은 전했다.


그 뒤로, 조그맣게 튀어나온 아쇼카 석주 위에는 큰 사자 하나만이 앉아 있었다. 엉덩이가 상당히 매끈했다. 보통의 아쇼카 석주는 사자 넷이 사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혼자 앉아 있는 사자의 엉덩이와 등이 더 기억에 남았다.


사자의 시선을 따라 나의 시선을 허공 위로 옮겨본다. 어쩌면 이 직선의 끝에서, 부처님은 이곳을 돌아보시지 않았을까?


10. 난 힘든데, 사진 찍고 싶냐?


그늘이 있는 계단에 앉아서 가이드 북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한 무리의 남자 애들이 내 옆에 한 명씩 앉더니 사진을 찍고 가는 것이였다. 좀 멀쩡했으면 웃어도 주고포즈도 잡아주었을 텐데, 그렇게 해주진 못했다.


또 중년의 남성분께서 인사를 하시더니, 어디서 왔냐고 물으시곤 곧 바로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그래서 사진을 찍긴 했는데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알려달라고 하셨다. 악의는 없으리라 생각되지만, 실제 전화 올 것이 걱정되어 엉망 진창으로 써드렸다.


인도분들은 참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신다. 어렸을 적에 나도 외국인을 볼 때마다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었는데, 나를 바라보는 눈이 딱 어린 나의 눈과 같았다. 사진이라도 남겨서 자랑이라도 하시라는 생각으로 되도록 사진을 찍어드리려고 했지만, 쉽지는 않은 것 같다. 그 사람에게는 나 하나겠지만, 나에게는 하루에 열 번 이상이었으니 말이다.


조금 서럽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알아주지도 않고 사진만 찍고 싶어하는 그 사람들이 서운했다. 덜 아파 보였나 보다 생각하며 관람을 마쳤다.


중각강당을 끝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갔다. 그 입구에서 자몽을 많이 파는데 큰 것 하나에 50루피 정도였다. 자몽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사봤지만 맛은 더럽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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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각정당의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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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4형제인데, 혼자 남아있는 사자의 엉덩이가 쓸쓸해보였다.무엇을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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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색 가사를 입으신 스님들이 그늘 아래에 앉아 계셨다.



11. 새벽잠에서 깨어


설사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새벽에 잠에서 깼다 잤다를 반복하면서 계속 몽롱한 상태에 머물렀다.


잠깐 깬 그 순간이 기억이 난다. 꿈속에서는 훤한 대 낮이었는데, 꿈에서 깼을 때는 한 밤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뜬장님이었다. 눈을 감고 보았던 꿈속의 빛들은 온데 간데 없었다. 깨어 있을 땐 보지 못하고, 잠을 자야만 볼 수 있었다.


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빛인 줄말 알았는데, 꿈속에서는 머릿 속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뭔가 겪고 보니 벙쪘다.


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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