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불교 유적지 순례기 : 쿠시나가라 편
2018.10.18
바이샬리에서 쿠시나가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했다. 버스와 기차를 타고도 편하지 않은 이 길을 80세의 늙고 병든 몸으로 어떻게 걸어가셨을까 하는 생각에, 설사 하나에도 힘들다고 징징대는 내가 부끄러웠다.
쿠시나가라로 향하기 전의 많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마지막 식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발췌해왔다. 마지막 공양을 한 춘다가 죄책감을 느낄 것을 염려하여 남긴 말씀이 인상 깊다.
부처님은 보가 거리에 머물면서 수행승들을 위해 여러 가지 설법을 했다. 다시 아난다 등의 제자들과 함께 파바의 수도로 가서 그곳 교외의 과수원에 머물렀다. 그곳은 금속 세공인 춘다의 소유지였다. 부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춘다는 나와서 맞으며 부처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설법을 듣고 기뻐서 이튿날 식사에 초대했다.
이 식사는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이 되었는데, 한역<열반경> 네 책 중에서 세 책까지는 다른 때의 공양과 같이 묘사해 특별히 음식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한역의 한 책에 따르면, 이때 보통 음식 외에 ‘전단나무 버섯’이라는 세상에 드문 음식을 세존에게만 올렸다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이 “이 버섯은 수행승들에게 먹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춘다는 그 말씀대로 따랐다고 한다. 부처님은 그곳에서 돌아오는 도중 다시 등에 아픔을 느껴 자리를 깔게 하고 앉았다. 이때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춘다가 바친 공양이 마지막이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춘다가 후회할 필요는 없다. 여래가 처음 도를 이루었을 때 바친 공양과 입적하기 전에 바친 공양은 다 같이 공덕의 결과가 커서 그 가치도 비슷하다.” 이 경전은 이 구절을 다시 다음의 시로 맺고 있다.
춘다의 집에서 공양을 하시니
여래의 병이 무거워지고
목숨의 끝에 가까워졌다네.
전단나무 버섯을 드시고
병이 더욱 도졌지만
병을 안고 길을 걸어
쿠시나가라로 가셨네.
이곳 쿠시나가라에서 부처님이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수밧다라는 수행자는 부처님을 찾아온다. 그리고 마지막 제자를 맞이하신다. 수밧다의 질문은 재미있다.
그 무렵, 쿠시나가라 거리에 수바드라라고 하는 늙은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여래께서 한밤중에 지나 입적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는 일은 아주 드물며 이 기회를 잃어버리면 평생 의문을 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라나무 숲으로 가서 아난다에게 청했다.
“친구 수바드라여, 여래를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세존께서는 지쳐 계십니다.”
이와 같이 말하며 아난다는 안내를 거절했다. 수바드라는 그대로 돌아서지 않고 두 번 세 번 아난다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아난다는 세 번 다 거절했다.
두 사람의 문답을 들은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아난다야, 수바드라를 막지 말라. 수바드라는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알고 싶어 하니, 질문을 듣고 대답해 주겠다. 그는 반드시 곧 알아차릴 것이다.”
아난다는 부처님이 허락했다고 전하고 수바드라를 안내했다.
“고타마여, 세상에는 이름 있는 종교가들이 몇 사람 있습니다. 다들 자신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정말로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아니면 모두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까요? 또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고 얻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일까요?”
“수바드라여, 그런 의심은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오. 그것보다도 당신에게 진리를 말하겠소. 그러니 주의해서 잘 들으시오.”
“세존이시여,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
쿠시나가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고락푸르로 가야했다. 바이샬리에서 고락푸르로 가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 것 같지만 가장 안전한 것은 하지뿌르로 돌아가서 기차를 타고 고락푸르로 가는 것이었다. 무자바스푸르역에서 고락푸르로 넘어가는 방법이 있다고 슈퍼아저씨가 이야기 했지만, 차편은 많이 없는 것 같았다.
6시 반 쯤 스리랑카 사원에서 나와, 버스가 내려주었던 큰 길가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30분 정도를 기다리자 합승지프 한 대가 도착했다. 이미 꽉 차서 넘쳐 창문에 엉덩이까지 나온 차에 탈 수는 없어 포기하려 했지만 차장은 위를 가리켰다. 루프탑. 이미 한 분이 타고 있었는데, 나도 얼떨결에 지붕 위에 타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종의 안전장치가 없는 익스트림 엑티비티였다. 위험한 것은 둘째 치고 시속 40~60의 차는 엄청난 바람을 만들어 냈다. 너무 추워서 숄을 꺼냈지만 바람을 막아주진 못했다. 결국엔 구석에 박아놨던 바람박이 하나를 꺼내 입었다. 추운 것이 해결되는 그다음 위험한 것이 보였다. 만약 갑자기 차가 정지하거나 커브를 돌면 나는 하늘을 날아 바닥에 처박힐 것이 분명했다. 지붕 위에 프레임에 두 손을 꽉 묶었다.
1시간 30분 정도를 그렇게 지붕위에서 보내 하지뿌르에 도착했다. 합승지프의 요금은 40루피였다.
하지뿌르 역에 가는 길에 약국에 들렀다. 아직 설사가 다 낫지는 않아서 비상용으로 약을 샀다. 영어를 하지 못하셔서, 구글 번역기로 설사를 쳐서 보여드렸다. “아! 다스트!” 하시면 나에게 몇 번이나 화장실에 갔는지 물어보셨다. 손가락으로 8번을 갔다고 하니, 약을 챙겨주셨다.
근처에 바나나 도매상도 있어서 또 10개를 샀다. 약이 효과가 있기를 빌었다. 기차에서 화장실에 계속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뿌르에서 출발하는 고락푸르 열차 중 가장 빠른 것이 10 시 차였다. 거의 여섯 시가 되어서 도착하는 기차였다. 어차피 가서 숙소를 잡고 쉴 계획이었으므로 일단 기차를 탔다.
먼저 제너럴 티캣을 사고 차장을 통해 남는 좌석을 다시 얻으려고 했다. 일단 타고 앉아서 차장이 오길 기다렸다.
차장이 와서 내 티켓을 확인했다. 자리에 앉아도 되겠냐고 하니, 320루피를 더 달라고 한다. 아무리 봐도 320이면 3A를 탈 수 있는 가격이었다. 나는 슬리퍼 클래스에 타고 있었고, 고락푸르까지의 슬리퍼 가격은 120루피 정도 였다. 총 405루피를 지불한 셈인데, 거의 정가의 2배 이상이었다.
불만이 생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었겠지 하며 넘어갔다.
다행히 약효가 있었는지 화장실에 가는 일 없이 고락푸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섯 시 반쯤 고락푸르 역에 도착했다. 고락푸르는 여행자들이 네팔로 가기 위해 무조건 통과해야 하는 교통의 요지다. 또 쿠시나가라와 스라바스티로 가기 위해서 이곳을 지나야 했다.
역 앞에는 많은 숙소가 있었다. 가격도 다양했지만, 가장 싼 곳을 찾았다. 지하에 허름한 도미터리였는데 침대 하나에 150루피였다. 침낭을 깔고 누우니 아늑했다.
내 뒤에 오신 아저씨가 나를 신기한 듯이 계속 쳐다보셨다. 대충 씻고 옆에 있는 식당에가서 볶음음밥을 시켜 먹었다. 굳이 볶음밥을 선택하는 이유는, 볶음밥은 웬만해서는 중타는 치기 때문이다.
어제 그 아저씨가 나가려는 나에게 충전기를 빌려달라고 하셨다. 난생 처음 보는 인도 아저씨가 충전기를 빌려달라고 하여 망설여졌다. 더군다나, 나는 쿠시나가라에 갔다 와야 하기 때문에 직접 받을 수가 없었다.
망설여졌지만, 그냥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빌려드렸다. 충전기는 여분이 하나가 더 있어서 아저씨가 만약 가져가시더라도 괜찮았다. 쓰시고 카운터에 맡겨 달라고 말씀 드렸다.
오후에 다시 짐과 충전기를 찾으려 직원에게 물으니, 자기는 그런 것 모른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서랍을 한 번 확인 해봐도 되겠냐고 묻고, 열어보니 내 충전기가 있었다.
알고 보니, 새벽 직원에게 맡겨놓고, 그 직원이 서랍에 놓은 채 인수인계를 하지 않은 것 이었다. 새 충전기가 생긴 기분이었다. 순간 화가 치밀러 올라, 그 아저씨 욕을 속으로 엄청 했었다. 충전기를 찾은 후, 속으로 욕한 것을 속으로 반성했다.
역을 정면으로 왼쪽으로 걸으면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골목이 나온다. 가는 도중에 소나울리와 쿠시나가라 방향으로 가는 지프들이 대기중이었다.
가장 처음에 만난 지프차에 올라탔다. 트렁크에는 사람이 꽉 차 있었다. 타지 못할 것 같아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트렁크의 짐 위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보기에는 괜찮았는데, 앉아보니 엉덩이가 자꾸 배겼다. 그래서 중심을 좌우로 바꿔가며 한 쪽 엉덩이만 희생했다. 역시 자리가 있는 지프를 탔어야 했다.
같이 뒤에 탄 아이가 계속 멀미를 하는지, 얼굴을 밖으로 뺀 체 구역질을 했다. 아이의 아빠와 형은 등을 쳐주며 토닥였지만 결국에는 도로 위로 토를 했다.
아이가 계속 토를 하는 사이, 나는 그들을 구경했다. 아빠의 눈도, 아들들의 눈도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휜자 위의 핏줄이 곤두 서 있는 눈이 기억에 남았다.
1시간 30분 정도 달려 쿠시나가라에 도착했다. 바이샬리와 같이 큰 대로의 시작점에서 나를 내려주었다. 요금은 70루피였다.
널찍하게 쭉 뻗어있는 대로를 10분 정도 올라가면 좌측에 열반당이 있다. 처음에는 그곳이 *열반당인지 모르고 **다비장까지 30~40분 정도 걸어갔다.
걸어가는 도중 다시 신호가 왔다. 급똥이었다. 다행히 한국절 대한사가 보였다. 급한 나머지, 달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로 한국말이 유창하신 관리자분을 만날 수 있었고 흔쾌히 화장실 이용을 허락해주셨다.
다비장 위치도 다시 확인해주셨다. 이 절은 한국에서 스님들이 정기적으로 오신다는 것 같았다.
*열반당 : 돌아가신 장소
**다비장 : 화장하신 장소
부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가르침을 주신다. 시자인 아난다를 위로하고, 부처님이 그리우면 어떻게 하냐는 아난다의 질문에 부처님이 태어난 곳, 깨달은 곳, 첫 번째 가르침을 펼친 곳, 돌아가신 곳을 생각하라고 답하신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발췌했다.
“비구들이여,누구든지 부처건 법이건 교단이건 도건 수행방법이건, 의문이 있는 사람은 서슴지 말고 물어라. 뒷날에 가서,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 물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물어라.”
...
“그럼 비구들이여, 너희들에게 할 말은 이렇다.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실로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고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불타 석가모니, 와타나메 쇼코, 법정 옮김
다비장에는 벽돌로 된 탑이 이었어다. 이곳에서 바라나시의 화장터에서처럼 거대한 나무더미 위에 눕혀진 부처님이 계셨을 것이다. 이 밑에서, 재가신자들과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슬피 울고, 깨달은 제자들은 그들을 다독였을 것이다
나는 딱히 슬픈 감정은 들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벌여졌을 일들을 상상해보았고, 머릿속의 의문들을 계속 나열해보았다. 어쩌면 마지막 제자 수밧다의 질문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책 속과 동영상 속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동의하고 재미있어 하지만 의심은 항상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고 있었다. 그저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처님은 정말 깨달으신 분이실까?, 깨달음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그런 깨달음을 얻을 수는 있는 것일까? 깨달음을 얻으면 항상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럼 어떻게 얻어야 할까?
가이드 북에서는 어떤 스님들을 지적하시며, 내 식대로 이해해선 안 된다고 말했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다. 내 식의 이해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볼 것이다. 내 식대로라도 이해 해보는 것이었다. 마지막 가르침 전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시간을 가진 것처럼, 나는 하나하나 의심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이 게임에서 내가 진다면, 나의 종교는 자본주의에서 불교로 넘어가게된다.
다비장에서 나와 열반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오토바이 하나가 히치하이킹을 하려 손을 흔드니 흔쾌히 태워 주셨다. 금방 열반당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이름과, 전화번호, 국적을 적는 곳이 있는데 적고나면 팁을 요구하신다. 이렇게 방명록을 적는 곳은 처음이었다. 공식적으로 일하시는 분들처럼 보이는 옷을 입으셔서 얼떨결에 돈을 내버렸다. 저렇게 받으시면 금방 부자가 되실 듯 하다.
열반당에는 황금색의 열반상이 놓여 있다. 삼배를 드리고 예불을 모시고 있는 팀 뒤쪽에 앉아 책을 읽었다. 미얀마 그룹인 것처럼 보였는데 예불을 드리고 황금색 천으로 열반상을 덮으셨다.
의식을 본 후, 열반당을 나와 열반탑 세 바퀴를 돌았다. 난간과 탑을 도색하고 계신 분들께 인사를 했다. 손벽을 맞대고 인사를 하니, 나에게도 똑같이 인사를 해주셨다.
탑을 돌면서, 50년간을 맨발로 인도의 곳곳을 떠돌다가 이곳에 위에 누우신 부처님을 생각해 보았다. 땅 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이미 날아갔지만, 그 발자국에서 생겨난 가르침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끊임 없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인가? 물었지만, 선뜻 대답하지는 못했다.
고락뿌르로 돌아갈 때는 버스를 탔다. 배가 좀 잠잠해진 듯, 입맛이 돌아왔다. 검색 해보니, 아메리카 프라이드 치킨이라는 페스트푸드 점이 역 근처에 있었다. 돌아가는 길 중간에 내려서 그곳으로 갔다. 가는 길 한편은 빈민촌이였다. 애들은 많았고, 노인은 적었다. 엄마와 아마빠도 바닥에서 뒹굴고, 애들도 따라서 뒹굴고 잇다.
치킨집에 들어가 250루피짜리 세트를 시키고 벽을 바라보고 앉았다. 햄버거와 치킨은 정말 정말 맛있었다.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다 먹고 앉아 있는데, 내 옆으로 인도에서는 보기 힘든 통통한 아이와 엄마가 들어온다. 아이는 나만큼 잘 먹었다.
아이가 먹는 모습을 보고 밖으로 나갔다. 빈민촌 아이들 몇 명이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발걸음을 역 쪽으로 굴렸다.
철학은 이해만을 요구하는 가벼운 관계다. 이해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을 내가 이해한 철학이라 부를 수 있지만, 그것에 의지할 순 없었다. 왜냐하면, 이해는 가장 포기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에는 힘이 많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힘든 상황에서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이 이해다.
종교는 믿음을 요구한다. 믿기만 한다면 종교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믿음은 미술시간의 물감통처럼 여러 색에 물들기 쉽다. 이렇게 뒤틀린 믿음은 마약과 비슷하다. 마약은 감각의 제한을 없애 보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믿음은 감각을 제한하여 보고 싶은 것만을 보여준다. 믿음은 강력하지만, 오염되기 쉽다.
두가지 도구 모두, 장단점이 있다. 나는 이 두 도구를 이용하여 나의 의심을 풀어보는 수밖에 없다. “나 주제에 무슨 점검을 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 엄청 똑똑한 사람들이 맞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그 울림이 전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계속 내 뒤를 쫓아 다닐 질문들이다. 100세 시대라고 생각하면, 아직 나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더 이러고 놀아도 되고, 30세까지 산다고 하더라도, 얼마 못살기 때문에 좀 알고 죽어야겠다.
들고다니기 정말 무거운 “이해”와 부식되기 정말 쉬운 “믿음”이라는 양날검이 제발 내 발등만 찍지않길 기도한다.
이제 룸비니로 가야한다. 인도보다는 낫겠지.
-E4. 저못믿으시잖아요[바이샬리, 쿠시나가라]에서 계속-
바이샬리에서 하지뿌르로 향하는 트럭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