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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나할미 Jul 09. 2024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건

한평생 모르는 채 살다가 이렇게 잠깐 스쳐가는 인연이지만

#4 일본에서 온 아야나


뉘 집 딸내미가 저렇게 참하고 현명해 보일까


떨리는 첫날 모두가 어색한 그 틈사이로 마주한 그녀는 한눈에 봐도 참 차분해 보였다. 뉘 집 딸내미가 저렇게 참하고 현명해 보일까 싶을 정도로 그 눈빛과 행동에 흐트러짐 하나 없으면서도 안정된 모습이었다.


그런 첫인상은 그녀와 종종 시간을 함께 보내는 한 달 동안 내내 바뀌지 않았다. 자신과 그저 한두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동생들을 먼저 나서서 챙기고, 소외되는 친구가 없도록 주위를 살폈다.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세네 살 어렸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에 출근하기 전, 잠시 시간을 내어 호주에 어학연수를 온 것이었다. 당연히 나보다 어릴 줄 알았지만, 막상 그녀는 정말 어리더라. 친구들을 모두 챙길 수 있을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저 반짝이게 이끌리는 대로 경거망동해도 이상하지 않을 어린 나이라고나 할까. (물론 나도 아직 그렇다고 생각한다 허허)


알고 보니 그녀는 다가오는 새 학기부터 중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그녀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오래 보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그녀가 선생님의 역할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아,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을 잘 살피고 챙겼구나. 누구의 이야기도 따뜻하게 경청해 주었구나. 이런 사람이 담임선생님이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학생이 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12년 내내 담임선생님 복이 없었던 나는 선생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크게 기대한 적도, 실망한 적도 없었고 그로부터 내가 얻게 될 격려와 독려 혹은 지도는 애초에 성립하지 못할 바람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얼굴도 모르는 그 어린 학생들이 왠지 모르게 부럽더라.


그런 고민들을 내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동생이지만 동생같이 않은 그녀가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렀고, 어느새 그녀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왔다. 그녀가 떠나기 이틀 전 우리는 함께 근처 미술관을 갔다. 그동안은 여러 친구들과 함께 그녀를 봐왔기에 내내 누군가와 함께할 때의 모습만을 봐왔는데, 오늘은 나와 오로지 둘만 함께 있었다 보니 그녀 자체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참 성숙한 생각들로 나를 놀라게 했지만, 종종 풋풋한 어린 모습도 보여주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한 그녀의 이런저런 고민들이 참 예쁘더라. 그런 고민들을 내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도 나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털어놓았다.


아무리 흐트러짐 없이 성숙해 보여도 누구나 마음 한구석은 흔들리는 곳이 있듯이, 그녀 또한 나름의 고민들로 흔들리는 젊은 날을 보내고 있더라.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누구보다 잘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항상 나는 누군가로부터 그런 말들을 기다려왔던 것 같다. 문제없을 거라고, 네 자신을 믿으라고. 근거가 의심되더라도 일단은 믿고 싶어지는 그런 말들을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예쁜 흔들림 앞에 나는 너무나도 진심으로 그런 말들을 해주고 싶다.


결국 우리는 미술관 전시를 다 보지도 못한 채, 중간 즈음 경치 좋은 곳에 마련된 벤치에서 미술관 마감 시간이 될 때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가 털어놓은 이야기들과 내가 이어가는 그 사연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


한평생 모르는 채 살다가 이렇게 잠깐 스쳐 다시 각자 가던 길을 걸어가게 된 사이이지만, 그 작은 점으로 이어진 인연에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이곳에 와서 많이 했던 인사말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였다. 그녀와의 마지막 인사에서도 이 말을 건넸다. 하지만 진짜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더라도 이미 너무 충분하다. 그저 지나가는 점으로 기억될지라도 그 순간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고마웠다는 마음으로 이미 더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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