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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영의 Jul 16. 2023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국가

-2022년 이태원 참사와 2023년 폭우에 의한 비극

  지난 2022년 10월 마지막 주말에 이태원에서는 156명이 압사하고 그 이상의 사람들이 상해를 당한 참극이 일어났다. 사고 발생 이전에 십여 차례 이상 112등에 긴급한 상황을 알리고 신속한 조처를 요청하는 시민들의 긴급 전화가 쏟아졌으나 경찰의 대응은 한없이 더디고 무책임하기까지 했음이 드러났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는 지난 2014년 4월에 겪은 ‘세월호 참사’라는 비극적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전체 탑승자 476명)이 사망·실종된 대형 참사였다. 그때도 국가는 없었다. 

   이렇게 재난은 거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낳고 이로 인한 희생자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여파를 갖는다. 우리는 재난이 빈발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애도하고, 망각하는 것을 반복하는 시대에 살고있는 셈이다. 애도와 망각 이외에 재난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서구에서 재난에 대한 개념에 근대적 변화가 일어난 사건으로 흔히 리스본 지진을 들곤 한다. 이성적 능력에 의해 자연 현상은 물론 도덕적 현상까지 설명할 수 있다는 신념이 강하던 초기 계몽 시기에 해당하는 1755년 11월 1일에 포르투칼의 수도 리스본에 엄청나게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다. 현대 전문가들은 당시 지진을 리히터 규모 9의 강도였다고 추정한다. 이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와 3일 동안 계속된 대화재로 리스본 도심 전체가 파괴된 것은 물론 전체 시민 27만 명 가운데 9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역사가들은 리스본 대지진 사건이 유럽의 정신세계를 바꾸어놓았다고 평가한다. 지진과 같은 재난을 도덕적 타락에 대한 신의 응징으로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유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리스본 대지진 이후 국제 재난구호라는 개념이 만들어졌으며, 재난을 극복하는 주체가 교회에서 국가로 바뀌었다.

   그런데 우리가 자연 재난(natural disaster)으로 여기는 지진, 태풍, 홍수 등의 재해의 경우, 비슷한 정도의 자연적 위력이 닥친 경우라 하더라도 나라에 따라 그 피해가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구상의 자연재해의 피해 규모는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2008년의 재난 상황의 목록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미국은 2월부터 미국의 테네시, 아칸소, 앨라배마, 켄더키, 미주리에서의 토네이도로 인해 55명이 사망했다. 버지니아주에서 3차례의 토네이도가 200명이 넘는 부상자와 140채의 주택 파괴의 피해를 입혔다. 5월 아칸소주의 폭풍으로 인해 7명이 죽고 13명이 다쳤다. 미얀마 이라와디 삼각주와 양곤을 덮친 사이클론 나르기스로 인해 78,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중국 서부에서의 진도 7.9 지진으로 인해 67,000명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다쳤다. 미얀마의 사이클론 나르지스와 중국 서부를 강타한 지진은 26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2004년 환태평양 쓰나미에 비견되는 규모의 심한 자연재해로 나타난다. 

   위의 재난 목록에서 미국에서의 한두 자리 수 사망자와 아시아의 수만 명의 사망자 수가 뚜렷이 대조된다. 비슷한 규모의 자연 위력이 대규모의 인명 피해를 낳기도 하고 소수의 피해를 낳기도 하는 차이는 재해에서 자연적 요인보다는 사회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을 증명해 주기에 충분하다. 국제사회에서는 사회적 재난과 자연적 재난의 구분 자체를 오늘날 무의미하다고 여겨 실제로 재난 연구에서 이 구분을 하지 않기에 이르고 있다. 재난의 원인이 인위적인 것이냐 자연적인 것이냐를 따지는 것 보다, 관리됨과 관리되지 못함의 구분이 재난 문제에 더 중요해진 것이다. 재난의 원인을 어디에 귀속시키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재난으로 인한 피해의 책임을 어디에다 지워야 하는지의 질문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태원 참극에 대한 국가의 책임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존 로크는 ‘정부론’에서 정부 없는 “자연 상태” 보다 정부가 있는 시민사회가 인간의 안전과 행복에 더 낫다는 것을 근거로 정부가 성립되었고 그 존재가 합법적으로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토마스 홉스 역시 ‘사회계약설’을 통해 자연 상태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비극을 벗어나기 위해 국가가 성립되었음을 강조한다. 곧 국민의 위임을 받은 국가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그 존립 근거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태원에서의 참극과 같은 재난을 당하는 개개인에게 그것은 예상치 못한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경험이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보자면 그것은 돌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예측 가능했던 위험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개인이 안녕하지 못한 것을 운이나 우연의 문제로 돌리게 되면 사람들이 재난을 그저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는다. 재난의 불이익이나 고통을 불운 탓으로 돌리다 보면 사회적 부정의를 수용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재난을 막기 위해 행동을 취할 의무감을 크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2023년 7월엔 우리나라 전역에 쏟아진 폭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삶의 터전이 황폐화되었다. 올해 장마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호우 피해로 인한 사망자와 실종자가 12년 만에 가장 많은 수준으로 올라갔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공식 집계한 호우 사망·실종자는 지난 2023년 7월 9일부터 16일 오전 11시까지 모두 43명이며, 충북 오송 지하차도 침수사고 등 추가 피해 집계에 따라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오창 궁평 지하차도 참변의 경우 순식간에 들어찬 물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 대부분이 시신으로 발견되고 있다. 당장은 구조와 후속 조치가 중요하지만 사전에 좀 더 대비를 하였더라면 충분하게 막을 수 있었던 재난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을 때 시민사회는 그 국가에 대하여 정당한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래야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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