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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영의 Jul 17. 2024

역사적 기억과 화해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소설은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생을 마감한 것이다.”(7쪽)로 시작한다. 그런데 소설의 서술자 ‘나’와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이자 남편인) 고상욱의 그러한 죽음을 되려 안도한다. 까닭은 여든두 살이 된 그가 치매에 걸렸기 때문이다. 합리주의자였던 남편이 치매에 걸린 뒤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나’의 어머니는 혈압에 당뇨에 고지혈증에 오만 병을 다 얻었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 (아버지가) 실수할까 봐 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을 나서는 것도 한사코 만류했다. 

    그래서 지금 서술자‘나’는, 아버지가“누구도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를 때, 아직 남 앞에서 무너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때, 어쩌면 전봇대에 머리를 박게 한 것은 아버지의 마지막 이성일지도 몰랐다.”(92쪽)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가난과 늙음과 병듦과 소외는 노년이 마주하는 가장 비참한 현실의 목록들이다. 한때 빨치산이라는 혁명가로서의 정체성을 지녔으며, 그것으로 평생의 삶을 지탱해온‘나’의 아버지도 노년에 다가오는 저 비애의 목록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런 탓에 스스로 전봇대에 머리를 박아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두고 한 서술자‘나’의 저 말은 늙어가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보편적 숙명을 피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주고 싶은 딸의 헌사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정지아 소설『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죽고, 서술자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찾아온 문상객들을 맞고, 아버지의 유해를 화장해서 뿌리는 가운데 그동안 충분하게 알지 못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와 화해에 이르는 소설이다. 나는, “아버지는 혁명가였고 빨치산의 동지였지만 그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이었다는 것”(248-249쪽)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소설은 그런 아버지와 아버지의 동지였던 어머니의 인간적 측면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아버지의 해방일지』는‘아버지의 해방일지’라기보다는 빨치산의 딸이라는 멍에를 짊어져야 했던 작가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그 족쇄에서 풀려나고 있는 것(해방)으로 보인다. 작가 정지아의 그동안의 소설적 궤적으로 보아 이 소설은 일종의 성장소설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성장소설의 주요 담론전략은 기억을 바탕으로 한 회고와 고백의 방식이다. 그런데 회고와 고백의 담론은 과거의 문제와 현재의 문제를 단절시킴으로써 종종 어떤 대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희석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정지아 소설『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결국 가족주의와 온정주의적 화해로 귀결되고 있는 것은 성장소설의 문법으로 보자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정지아는 199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고욤나무」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지만, 그보다 앞서 계간《실천문학》에『빨치산의 딸』을 연재하고, 1990년에 전 3권으로 출간했던 이력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항상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정지아는 장편『빨치산의 딸』에 대해 “소설이라기보다 소설적 형식을 띤 역사서”라고 말한다. 기록의 충실성은 지난 역사를 소설화하는 데 있어 필요한 요소이지만, 그것은 또 허구를 본질로 하는 소설 미학에서 일종의 난제가 되기도 한다. 사실적 기록이 어떻게 소설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일 것인데, 중요한 점은 작가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기억(관점)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수용함으로써 객관화가 가능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또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던 시기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시기에 작가가 그러한 시대의 격랑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측면과 함께 바로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빨치산들의 영웅적 투쟁 담론이 일정하게 운동의 대의와 연결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 물론 소설『빨치산의 딸』에서 서술자 ‘나’는 대학 시절부터 8년을 만나 연애했던 선배, 자신 때문에 판사를 포기하고 변호사가 되었던 선배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식을 치르기 하루 전, 그의 부모님은 며느리 될 사람이 빨치산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부모냐 여자냐 둘 중 하나를 결정하라고 그의 아버지가 식칼을 당신 목에 겨누고 있다는 선배의 전화”(214쪽)를 받고, 이유 불문 결혼을 취소하고 만다. 화장한 아버지의 유골을 수목장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서울대 연습림으로 들어가려 하는 장례 차량은 입구에서 제지당한다. 허가받지 않은 수목장 자체가 불법이었을 수도 있으나, 젊었던 한때, 겨우 4년을 빨치산으로 살았던 이유로 평생을 빨갱이로 낙인찍은 아버지의 초상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하니 기억을 바탕으로 한 회고와 고백의 방식이 일정하게는 대상(빨치산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문제의식을 희석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하더라도, 또한 아버지와의 화해를 통해 소설이 결국 가족주의와 온정주의적 화해로 귀결되고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만 정작 자신은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었다”(76쪽)고 말하는 서술자-작가의 묵은 해원이 풀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게 의의 있지 않겠는가 싶다. 나는 그의 오랜 독자로서, 이제 아버지의 과거로부터 해방된 작가가 좀 더 자유로운 조건에서 당대의 삶을 섬세하고 풍부하게 소설화할 것으로 기대한다.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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