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억을 듣는 자
아스만은, “우리가 기억을 소홀히 한다 해도 그 기억은 결코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억은 우리의 무의식 어딘가에 저장되었고 오랫동안 잠복해 있다가 무의식에서 순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의식은 셈하고, 기록하고, 모두 적어두고, 저장하며, 언제든지 그 정보를 불러낼 수 있다. 그런데,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기억을 말하고 있는 이는 소년이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이도 소년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소년의 사건에 대한 증언이면서 그 자신의 독백이다. 이 주절거림은 사실 원한을 잊고자 하는 정조-감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적 외상이라 번역되는 트라우마(trauma)는 “충격적인 체험이 잠재의식에 각인으로 남아, 때때로 무심코 떠올리는 기억으로 드러나서 지독한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병증”으로 설명된다. 정신분석학은 트라우마가 의식이 일차적으로 망각한 무의식의 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일정한 계기가 주어지면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것은 사진기의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나타나 신체에 고통의 흔적을 각인시킨다. 니체는, “무엇인가 기억에 남도록 하려면 그것을 낙인으로 찍어 넣어야 한다.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만이 기억에 남아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고통, 즉 기억의 문자는 마음이나 영혼이 아니라 예민하고 연약한 몸의 표면에 기록된다. 니체는 신체에 각인된 인상을 능동적 의무감(양심)으로 받아들이는 기억의 작용을 ‘의지의 기억’이라고 명명했다.
심상대 단편소설 「망월-望月」은 5・18의 와중에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넋두리를 통해, 그 날에 가족을 잃은 이들의 가슴에 각인된 트라우마와 그것의 해원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소설 「망월-望月」은 아들을 잃은 여인-어머니의 넋두리가 마치 무가(巫歌) 혹은 통과의례로서의 씻김굿과 흡사한 구조와 주제의식을 갖고 있어 흥미롭다. 달 밝은 밤길을 걸어 아들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은 그 자체로 제의의 공간이 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인의 “이제 다 잊어버렸다”는 넋두리는 큰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한과 죄의식이 그녀의 무의식에 수시로 출몰하면서 강박적으로 호출해낼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폭력적인 트라우마가 된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소년의 이야기는 심상대 소설 「망월-望月」에서의 어머니의 넋두리와 매우 흡사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그날의 기억에서 말미암은 씻을 수 없는 죄의식에서 발원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저주의 감정이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소년은, 여기(상무관)에 “왜 왔어?”(13쪽)라고 묻는 교복 입은 누나의 질문에, “친구 찾으려고요.”(13쪽)라고 답한다. 그는 군인들이 총을 쐈을 때, 친구 ‘정대’가 그 총에 맞는 걸 동네 사람들이 보았다고 해서 여기까지 찾으러 온 거였다고 (독자들이)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소년이 처음 누나를 만났을 때, 그가 한 말 중 사실이 아닌 게 있었다. 역전에서 총을 맞은 두 남자의 시신이 리어카에 실려 시위대의 맨 앞에서 행진했던 날, 중절모를 쓴 노인부터 열두어 살의 아이들, 색색의 양산을 쓴 여자들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던 저 광장에서, 마지막으로 정대를 본 건 동네 사람이 아니라 바로 소년,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모습만 본 게 아니라 옆구리에 총을 맞는 것까지 봤다.”(31쪽)
그러나,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라고 말하는 옆의 아저씨의 말과 총성과 함께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소년은 친구 정대의 주검을 향해 달려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니, 정적 속에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더이상 군인들의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때를 기다린 듯, 옆 골목과 맞은 편 골목에서 사람들이 뛰어나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들쳐 업을 때도 소년은 정대를 향해 그들처럼 달려나가지 않았다. 소년은 “겁에 질려, 저격수의 눈에 띄지 않을 곳이 어디일까만을 생각하며 벽에 바싹 몸을 붙인 채 광장을 등지고 빠르게 걸었던 것”(33쪽)이다.
그리하여 소년은 친구 ‘정대’를 잊지 못한다. 정대는 소년의 무의식에 수시로 출몰하면서 강박적으로 호출해낼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폭력적인 트라우마가 된다.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다’라고 매우 단순하게 진술한다. 어떤 주어진 언어에서 그 언어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관계들이 무의식적 요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진술들이 그러하다.
…… 공부보다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정대, 누나 때문에 할 수 없이 인문계고 입시준비를 하는 정대, 누나 몰래 신문 수금 일을 하는 정대, 초겨울부터 볼이 빨갛게 트고 손등에 흉한 사마귀가 돋는 정대, 그와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칠 때, 제가 무슨 국가 대표라고 스매싱만 하는 정대…….”(35쪽) 지금 정미 누나가 갑자기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달려 나가 무릎을 꿇을 텐데, 같이 도청 앞으로가서 정대를 찾자고 할 텐데, 그러고도 네가 친구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정미 누나가 그를 때리는 대로 얻어맞으면서 용서를 빌 텐데…….(36쪽)
이렇게 무의식은 양심과 죄책감, 혹은 프로이드가 말한 초자아의 형태로 다른 사람들의 말, 다른 사람들의 대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목표, 열망,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소설에서 자신의 기억을 말하면서 듣는 자, 소년은,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 자신마저 용서하지 않겠다.”(45쪽)고 말한다. 이것은 치유가 가능하지 않은 원한과 저주의 정서-감정이다. 죽은 정대는 죽어서 소년에게 말을 건넨다. 소년은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제 죽은 친구의 이야기까지 들어야 한다.
이미 죽은 정대는 말한다. “이 낯선 덤불 숲 아래에서, 썩어가는 수많은 몸들 사이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나는 무서워졌어.(50쪽)” “더 무서워진 건 다음 순간이었어. 두려움을 견디며 나는 누나를 생각했어. ……(그러나)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하려고 하자, 눈물 대신 피와 진물이 새어나오는 통증이 느껴졌어.”(50쪽) 소설에서, 죽은 자들은 존재하기를 멈췄지만 존재로서 무엇인가를 의미하기는 멈추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이 무의식적이고 기습적인 기억을 듣는 자 곧, 살아남은 자들에게 끝 모를 죄의식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감정에 대한 반응은 행위자가 그 감정의 원인을 어디에 귀인(attribution)시키느냐에 따라서 상이해진다. 심리학자 프리츠 하이더(Fritz Heider)에 따르면 행위자는 특정한 귀인을 내적 요소(개인의 능력)에 결부시키느냐, 아니면 외적요소(운명적인 상황)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 사회학자 테오도르 켐퍼(Theodore Kemper)는 여러 감정 중에서도 ‘공포’에 대한 행위자의 귀인에 주목했다. 행위자가 공포가 발생한 상황을 외부의 잘못이라고 이해하면, 책임을 추궁할 타자가 뚜렷하게 형성되고 이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반대로 그 원인을 주체 스스로에게서부터 찾는다면, 그 공포는 ‘미약한 자신’이 극복할 수준이 아닌 것으로 인지된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신념과 자아개념을 구성하는 시기인 아직 어린 소년에게 이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은 이중 삼중의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심상대 단편소설 「망월-望月」에서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의 소년(들) 역시 상흔의 회복은 가능하지 않다.
소년과 함께 주검들을 수습하던 소녀들 역시 그날의 기억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소녀는 열아홉 살이 되고 다시 스물넷이 되었으나. 그녀의 삶이란 그날의 기억이 다만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다. 그날의 진실은 검열이라는 폭압적 현실 앞에 여전히 봉인되어 있고, 총 대신 주먹이 자리바꿈을 하였을 뿐이다. 이제 소녀의 이야기를 듣는 주체는 오늘, 살아남은 우리 모두가 된다. 그래서 그녀와 함께 기억-고통의 진창에서 몸서리치게 된다.
잡지사의 편집부에 근무하는 그녀(상무관에서 소년과 함께 주검을 수습하던 여고생 은숙)는 수배 중인 번역자의 연락처를 대라는 수사관에게 일곱 대의 뺨을 맞는다. 그녀를 때리던 사내의 얼굴은 평범했다. 전체적으로 요철이 없는 얼굴에 입술이 얇았다. 그 평범하고 얇은 입술을 열어 사내가 말했다. “개 같은 년,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 싫으면 내 말을 들어. 그 새끼 어딨어.”(67-68쪽) 목뼈가 어긋날 것 같던 충격을 은숙은 잊을 수가 없다.
그녀는 재수 끝에 들어간 대학의 학생식당에서 ‘학살자 전두환을 타도하라’는 유인물이 뿌려지고, 그 유인물을 들어 올리는 순간 억센 손이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던 것을 기억해낸다. 그녀는 뜨거운 면도날로 가슴에 새겨놓은 것 같은 그 문장을 생각하며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77쪽) 그러니 이 소설도 여타의 5・18소설(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날에 살아남은 이들의 죄의식이라는 감정을 이야기한다. 문제는 그 죄의식이라는 씻어낼 길이 없는 감정-상흔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차이일 것이다.
기존의 5・18소설(들)은, 가해자의 일원이었던 진압군 역시 권력의 피해자였다는 인식(임철우 장편소설 <봄날>과 이순원 단편소설 「얼굴」)을 통해서,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영혼결혼식이라는 화해를 시도하거나(송기숙 장편소설 <오월의 미소>), 자매애적 연대-퀴어Queer를 통한 새로운 길 찾기(공선옥과 김승희의 소설들)를 모색하고 있다. 이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의 경우는 어떠한가.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 자신마저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절대로 그날의 일들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섣부른 화해의 모색이 아니라 끊임없는 기억의 갱신을 통해 처음에 지녔던 (기억에 대한)연속성과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은숙은 이제는 출판할 수 없게 된 희곡집에 실려 있는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더듬는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79쪽)
단순한 분노와 불안은 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반해 증오와 복수에의 다짐은 기억을 오히려 강화한다.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은 부당함을 겪는 경우나 명예훼손처럼 오랫동안 그렇게 깊이 기억되지 않는다. 하지만 증오와 복수와 관련된 기억들은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의 인물들의 가슴에 각인된 저 죄의식과 절망과 원한의 감정들은 그렇다면 건강하지 못한 것인가.
은숙은 “처음부터 살아남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87쪽) 그러나, “입을 벌리고 몸에 구멍이 뚫린 채, 반투명한 창자를 쏟아내며 숨이 끊어지고 싶지는 않았다.”(89쪽) 그래서 그녀는 살아남았고, 그런 탓에 그녀는 빨리 늙기를 원했다. ‘빌어먹을 생명이 너무 길게 이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입에서 입맛이 도는 것.”(85쪽) 그러니 살아남은 이에게 삶은 치욕이고 형벌일 뿐이다. 건강이라니, 그건 위선이거나 사치의 수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