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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영의 Oct 22. 2024

한강 소설『소년이 온다』

4. 기억을 기록하는 자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은숙’은 항쟁의 마지막 날, 도청에서의 동호(소년)의 눈을 기억한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떨리던 소년의 눈꺼풀”(92쪽)을 기억한다. 소년은 아마 죽었을 것이다. 연극배우의 대사를 빌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 갔다”(102쪽)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은숙’은 그날의 기억들을 기록하는 자가 된다. 


  출판사에서는 수배중인 번역자의 이름 대신,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편집장의 친척의 이름을 넣어 책을 출간하고, 연극 무대에 올린다. 은숙은 그 책의 서문을 읽으며,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빠져든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95-96쪽)


  이처럼 외상 사건은 우리의 기본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가족, 우정, 사랑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깨진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자기 구성이 산산이 부서진다. 인간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념 체계의 토대가 침식당한다. 자연과 신성의 질서에 대한 피해자의 믿음이 배반당하고, 피해자는 존재의 위기 상태로 내던져진다. 한편 그와 같은 은숙의 진술은 기억을 기록하는 자의 책무에 걸맞다. 근대적 주체는 본질적으로 관찰자다. 관찰자가 되는 인간은 자신의 주변 세계를 자기 자신처럼 객관화한다. 관찰하는 자는 시간의 강을 넘어선 사람이다. 그녀가 출판사의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가 살펴보고 있는 번역본의 서문은 이러하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들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95쪽)     


  위의 진술-서문을 통해 우리는 항쟁에서의 참여자-주체들의 행위를 규제했던 것은 일종의 집합감정(혹은 배후감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의 서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바바렛은 “감정적 분위기는 공통의 사회구조와 과정에 연루된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에 의해 공유될 뿐만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정체성과 집합행동의 형성과 유지에 중요한 일련의 감정 또는 느낌”이라고 주장한다. 광장에 나왔던 군중들이 함께 공유했던 기억들은 그들에게 친밀성과 정체성의 경계를 같이 하도록 요구한다. 반복되는 죽음과 죽임의 체험을 통해 사람들은 연대의 감정(feeling of solidarity)-‘우리 모두가 여기에 함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공유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느낌-을 산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집합기억(collective memory)-‘우리 모두가 거기에 함께 있었다.’-을 산출한다. 경험한 것과 기억되어 있는 것은 이렇게 정체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항쟁에 참여한 행동이다.


  사복형사로 짐작되는 남자들 서넛이 객석에 흩어져 앉아 있는 가운데 연극은 시작된다. 꿈속처럼 느린 걸음으로 남자들(배우들)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여자(배우)가 말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99쪽) 공포와 증오와 원한의 감정 말고 달리 어떤 감정이 그날에 살아남은 이들의 정서를 대표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이렇듯 “그들의 죽음은 산 자에게 현재의 삶을 바라보게 하며, 삶의 존재 증명을 위해 다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산 자에게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선택하는 일은 자신의 존재방식을 결단하는 일이기도 하며, 타인의 죽음은 그 사람과 나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함은 물론이고, 자신의 주체를 이전과는 다르게 구성해 나가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날에 살아남은 자들이 무슨 수로 자신의 주체를 새롭게 구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과거의 기억에서 한 발자국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아니 나아갈 수가 없다. 한편 이 소설에서는 체포되고 갇혀있던 이들의 배고픔에 관한 기억이 여전히 문제가 된다. 


  “꺼진 눈두덩에, 이마에, 정수리에, 뒷덜미에 흡반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배고픔. 그것들이 서서히 혼을 빨아들여, 거품처럼 허옇게 부풀어 오른 혼이 곧 터트려질 것 같던 아득한 순간들을 기억합니다.”(106-107쪽) 이 진술은, 그날 상무관에서 주검들을 수습하던 대학생 김진수와 함께 상무대 영창에서 지냈던 스물세 살 먹은 교대 복학생의 기억이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은숙을 괴롭혀온 것이 “허기를 느끼며 음식 입에서 입맛이 도는 것”이라 했거니와, 이렇게 인간 존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심연에서 발원된 욕망이나 두려움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거나 행동이 유발된다. 무의식은 고통스러운 경험과 감정의 저장고다. 


  받아쓰기로서의 기록자는 ‘양심’에 관해 적고 있다. 그날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이들은 물론,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 그것을 이 소설에서는 ‘양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찬은 그의 소설 <광야>에서, “그들이 죽음을 초월했던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세계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음을 앞에서 보았다. 결국 같은 이야기다. 그날에 광장에 나왔던 사람들은, 그래서 죽음/죽임을 당했거나 운 좋게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민주주의라거나 민중봉기라거나 하는 관념이나 개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공통의 느낌 구조(그것이 양심이든, 윤리적 분노이든)에 의해 서로의 관계를 보다 더 잘 인식-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날의 참혹했던 기억을 이야기하고, 듣고, 기록하는 것의 참된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 베트남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 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 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134-135쪽)      

저는 그 폭력의 경험을, 열흘이란 짧은 항쟁 기간으로 국한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르노빌의 피폭이 지나간 것이 아니라 몇십 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162쪽)  

   

  그것은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는 것, 과거를 직시하는 것, 그 참혹한 기억이 지나간 이야기로서의 과거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광주를 넘어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폭력적인 것에 대한 저항과 연대가 그날의 죽음의 의미를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수렴된다. 기실, 이야기하기를 통한 과거 회상은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행해지는 제의의 일상적 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제의의 반복성은 인간 삶의 보편성과 본질적 측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과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개인의 심리적 억압기제를 분석, 치료하기 위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허먼에 따르면, 트라우마의 치유는 악이 전적으로 승리할 수는 없었음을, 그리고 치유를 가능케 하는 사랑이 여전히 세상 속에 존재한다는 희망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허먼은, 외상의 완결에는 종착지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던 한강 소설 <소년이 온다>의 경우, 외상의 치유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과 맞설 것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부연하자면, 「타자로서 자기 자신」에서 리쾨르가 강조하듯이 어떠한 단계(혹은 상황)에서도 ‘자기’는 그의 타자와 분리되는 않는, 즉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주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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