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시 ‘주체’의 문제
이 글에서는 5・18소설(들), 특히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항쟁의 주체란 누구(혹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다. 그날 광장에 나갔던 행위 주체(들)은 홍희담 중편 소설 「깃발」에서처럼, 각성된 (여성)노동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임철우 장편소설 <봄날>이나 문순태 장편소설 <그들의 새벽>이나 정찬 장편소설 <광야>에서처럼, 전두환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던 이름 없는 민초들이었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5・18소설들이 대학생 그룹을 비롯한 지식인 계층의 배반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류양선 장편소설 <이 사람은 누구인가>에서는 예술가를 비롯한 지식인의 죄의식을 행위 주체의 자리에 놓기도 한다. 문제는 그러한 관점들이 개개인의 다양한 이해와 참여 동기를 무시하고 단일한 구도로 그날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기억과 역사를 전적으로 동일하게 보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회상된 기억이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되지 않을 때, 그 기억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에서 읽었던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에서도 여타 5・18소설(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날의 참혹한 죽음/죽임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진술들이 요란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기억을 이야기하는 자와 듣는 자,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자가 결국 동일인이기 때문이다. 그(혹은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참혹했던 기억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혹은 그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자기 구성이 산산이 부서지고, 인간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는 신념 체계의 토대가 침식당하며, 자연과 신성의 질서에 대한 피해자의 믿음이 배반당하고, 존재의 위기 상태로 내던져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그(혹은 그녀)는 여타의 5・18소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섣부른 화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화해라니. 누구에게 화해를 이야기한단 말인가. 인간 심층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저 잔인한 폭력성과 어떻게 화해가 가능할 수 있는가. 그러니 이 소설은, 그날의 참혹했던 기억들을 잊지 않는 것, 과거를 직시하는 것에 바쳐지는 헌사가 아닐 수 없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타 5・18소설(들)과는 달리 이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는 그날 광장에 나가 죽었거나 운 좋게 살아남았던 이들을 영웅이라거나 전사의 이름으로 호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그들을 함께 묶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라거나 저항의 역사를 되살린다거 나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에 대한 존엄, 그리고 충격과 분노라는 감정의 공유 곧, 공통의 느낌 구조(그것이 양심이든, 윤리적 분노이든)에 의해서라는 것의 확인에 있다. 물론 행위 주체가 인물인가, 인물의 행위를 추동하는 감정인가의 논의가 이 글에서 충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소설의 인물의 내면에 주목하면서 항쟁의 주제란 누구였는가와 관련한 질문을 통해 그것이 민초라거나 민중이라거나 무장시민군이 아니라 개개인의 ‘감정(emotion)’ 그러니까 사건을 마주한 개개인의 감정이 모인 ‘집합적 감정’이 라는 점을 강조한 데 이 글의 특징이 있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