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황석영『오래된 정원』
황석영은 군부의 억압이 극심하던 1980년, 광주의 기록을 담은『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창비,1985)를 통해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 1989년 정부의 허락 없이 북한을 방문했다가 3년여 동안 유럽과 미국 등지를 떠돌다 귀국하여 5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했다. 그가 출옥 후 처음 발표한 작품이 장편소설『오래된 정원』이다.
소설의 주인공 ‘오현우’가 운동권에 가담하게 된 환경적 계기는 “광주에서의 무자비한 양민학살을 보고 들었”던 데에 있다. 그는 광주항쟁이 발발하자 광주에서 몸을 피해 서울로 간다. 그는 서울에서 동료들과 함께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전단을 제작하여 뿌리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광주항쟁이 진압된 후 당국의 검거를 피해 친구 소개로 시골(갈뫼) 학교의 미술 교사인 한윤희를 찾아간다. 6개월 동안 그녀와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동거하는 동안 그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그가 도피 생활 중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로 평화롭고 목가적이다. 그러나 당국의 수배는 시골 마을까지 이어지고 그는 간첩단 사건의 수괴로 발표된 신문기사를 읽고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들의 불안하면서도 짧았던 행복은 끝이 난다. 그가 검거되어 18년 동안 감옥에서 온갖 폭행과 외로움과 굶주림과 추위에 싸울 때 한윤희에게는 그의 면회가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는다. 한윤희는 “우리에게는 여름 한 철이 두 사람의 모든 인생이었다.”고 기억-회상한다. 그녀는 결국 암과 싸우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 출옥 후 ‘갈뫼’를 찾아간 오현우는 한윤희가 남긴 일기와 편지를 통해 자신에 대한 그녀의 깊은 사랑을 이해한다.
그러니까『오래된 정원』의 인물들에게는 광주에서의 가혹한 경험이 혁명에의 갈급과 결렬한 저항의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고, 여기에 개인적 사랑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인식-조급증이 지배했던 시대에 시간을 정지시키는 듯한 개인적 사랑은(‘갈뫼’에서의 여름 한 철은 그 두 사람에게는 시간이 정지된 것) 기만적인 자유에 머물게 하는 소시민적인 영역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현우는 갈뫼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한윤희는 그의 아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초자 꺼내지 못한 채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들은 함께 지냈던 여름 한 철이 그들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기억하지만 이미 두 사람은 살아서는 만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윤희는 그에게 남긴 편지에서,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당신은 그 안에서 나는 이쪽 바깥에서 한세상을 보냈어요. 힘든 적도 많았지만 우리 이 모든 나날과 화해해요. 잘 가요. 여보.” (하권, 308쪽,)라고 말하며 지난 세월에 대해 화해의 손을 내민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조건은 본질적으로든 현상적으로든 변하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사회를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것이고, 이는 우리 사회가 전쟁과 분단체제의 지속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있는 한 그 변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80년 광주의 5·18은 분단체제와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기인한 것이고, 소설의 인물 오현우가 감옥에서 18년을 갇혀 지내고 있는 까닭도 다름 아닌 저 반공 이데올로기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난 시절과의 화해라니.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해 볼 수 있겠다. 80년 광주에서의 가혹한 경험으로부터 시작한 소설의 인물 오현우의 그 지난한 투쟁은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어떻게 ‘기억의 변형’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황석영은 “가치부정의 시대에 저항하고자 했던 방법론도 그 내부에 또 다른 도그마를 잉태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이종문의 경우 따라서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안들이 끊임없이 모색되고 있고, 그가 시도하고 있는 대안적 방법론으로는 “타자에 대한 화해와 변화 및 새로운 서사 형식과 하위주체들의 소통과 연대”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묻는다.
이 글에서 황석영의『오래된 정원』이전과 이후의 소설을 함께 검토하고 있지 못한 점은 그의 문학세계를 쉽게 평가하지 못하는 한계가 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5·18 이후의 소설들을 검토하면서『오래된 정원』을 살펴보는 까닭은 이 소설이 다른 작가들의 텍스트에 비교하면 ‘너무 일찍’ 80년대의 기억(문학의 정치성)에서 이탈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와 ‘함께 있다.’ 물론 그것이 언제 어디서건 명시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형태로 상존하는 것은 아니다. 드러남으로써 은폐되어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다른 이미지들에 가려 은폐되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현재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오래된 정원』의 인물 오현우와 한윤희는 그 과거를 폐기하고 말았다.
과거는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는 것이므로, 과거가 과거로 의식되려면(인물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했던 80년대의 기억) 과거와 오늘의 차이가 존재해야 하며, 이런 맥락에서 연속성이나 전통의 단절에 대한 의식이 과거를 존재하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오래된 정원』의 인물 오현우가 “무너진 건물 사이로 솟아나온 철골처럼 남아버린 몇 가지 명제가 소중해졌는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그 소중함의 새삼스러운 발견이란 일상의 행복일 것이다. 그는 18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고, 감옥 안에서는 체제의 악랄한 폭력-온갖 폭행과 외로움과 굶주림과 추위를 다만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한윤희를 비롯한 그 누구와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에게 이제 남아 있는 회상 기억이란 갈뫼에서 한윤희와 보낸 여름 한 철의 멈추었던 시간일지도 모른다.
황석영 장편『오래된 정원』은 결국 빨치산 출신 아버지가 한윤희에게 한 말, “내 동료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그저 허공 중에 빛나는 별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양쪽을 보니까 서로 거울을 맞대어 놓은 듯이 그저 사람살이의 좌우가 바뀐 데 지나지 않았어.”(상권, 147쪽)에서 보듯, “이념이란 덧없는 것이고 곧 이념이나 혁명에 의해서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한윤희로 표상되는) 영원한 모성과 같은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으로 세계를 품는 것”, 곧 일상의 강조라면, 그렇다면 한윤희의 아버지 세대(빨치산 투쟁)와 오현우로 대표되는 1980년대 저항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그들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따라 주체적으로 움직이며 세상을 바꾸고자 했전 시대의 주체가 아니라 다만 ‘헛깨비’를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일까. 아니라면 오현우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는 낡아버렸거나 불필요한 일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황석영은 지배담론의 폭력성과 함께 그것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저항담론(의 폭력성) 모두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