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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영의 Oct 23. 2024

타자로 향하는 길

4.임철우『백년여관』

 야스퍼스는『책죄론』에서 “타인을 죽이는 행위를 막기 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고 팔짱 낀 채 보고만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내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 뒤에도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어 나를 뒤덮는다.”고 말한다. 5·18의 기억을 원죄처럼 지니고 살아가는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아직 살아 있음에 대한 죄의식’에 시달린다. 이 죄의식- 부끄러움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날의 피해자는 말할 것 없거니와 가해자들 못지않게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외상 변증법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게 5·18에 대한 소설적 재현과 윤리적 해석을 말하는 맨 앞자리에 임철우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임철우 소설 <봄날>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의 산물이다. 광주항쟁에 관한 기념비적 소설『봄날』다섯 권(문학과지성사, 1997)을 통해 5·18에 대한 충실한 기록을 남겼던 임철우의 소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날에 함께 하지 못했다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이다. 그러한 정념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봄날』이전에 발표한 단편「봄날」(1987)이다. 


   임철우는 단편「봄날」로부터 장편『봄날』다섯 권의 완성을 보지만,『백년여관』에 이르러 비로소 제주 4·3의 비극과 만난다. <백년여관>의 서사는 “정체불명의 음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서술자인 이진우는 “시간이 없어! 시간이!”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를 듣고 홀리듯 영도의 갯가 모퉁이에 혼자 불쑥 돌출해 서 있는 해묵은 왜식 목조 적산 가옥 한 채. 그리고 그 집 앞 흐릿한 골목 어귀에 내걸린 간판 하나, 백년여관을 떠올리고, 그곳에 가기로 결심한다.


   <백년여관>의 주요 인물은 5・18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사건, 제주 4・3, 베트남전 등의 사건과 관련된다. 백년여관은 이러한 여러 사건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을 끌어들이는 공간이다. 특히 백년여관을 운영하는 주인 강복수의 가족은 제주 4・3과 직접 관련된다. 이진우의 첫 번째 환청이 제주 4・3 특별법안이 가결된 1999년 12월 16일에 발생했다는 점은 이진우를 비롯하여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환청과 연결하면 제주 4・3 특별법안 가결이 소설 속 각각의 환청이 발생하는 주요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을 지으면 “시간이 없어”는 시간 곧 때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 환청이 계기가 되어 이진우는 영도로 향한다. 


   백년여관의 또 다른 손님인 김요안도 “돌아와! 이젠 때가 되었다!”라는 환청이 계기가 되어 40년의 미국 생활을 접고 영도로 돌아온다.(101쪽) 이들은 “그들을 부르는 소리” 즉 “무엇인가로부터 똑같이 호출되어” 백년여관에 이르렀다. 영도의 무당인 조천댁 또한 “서둘러야 해.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렇듯 ‘시간이 없어!’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백년여관> 속 각 인물에게 행위의 동인으로 작동한다. 한국현대사에서 제주 4・3은 오랫동안 말할 수 없는 혹은 말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4・3은 말할 수 없음의 상징적 사건 중 하나였다.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말할 수 없고 말해지지 않은 것은 제주 4・3만이 아니다. 이 사건의 토대 전환은 그와 유사한 사건들을 재현의 차원으로 함께 이끌 내는 역할을 했다. 그러하니 소설 속 인물들의 저 “시간이 없다”는 외침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혹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는 외부에서 주어진 가능성(사회문화적 조건)에 힘입은 것이다. 


   소설에서 이진우를 비롯한 다양한 역사적 사건의 희생자와 각각의 사건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지만, 이는 동시에 5・18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상징화된다. 문제는 이것이 보여주는 자폐적 양상에 있다. 이를 드러내는 것이 ‘신지’의 자폐증인데, 이는 일련의 과정에서 획득한 이름으로서의 5・18의 상징화가 결국에는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임철우는 <백년여관> 쓰기를 통해서도 5・18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이 남긴 고통을 온전히 허구화하거나 상징화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 신지의 자폐는 <백년여관> 전체 서사의 구조와도 맞물린다. 전체의 서사 구조 또한 자폐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백년여관>의 프롤로그의 첫 문장과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이 동일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섬이 하나 있다. 그림자의 섬, 영도. 그것은 결코 환상도 허구의 이름도 아니다.” 이는 <백년여관>의 첫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이다. 프롤로그는 이진우가 집에 돌아가 써야겠다고 생각한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처럼 <백년여관>의 프롤로그의 첫 문장과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장은 동일하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의 맞물림은 서사의 시간을 순환하는 고리 즉 원환 속에 가둔다. 이를 통해 <백년여관>의 서사는 시간의 원환에 갇혀 순환한다. 이진우는 이 시간의 사이클 속에 갇힌다. 그는 곧 잔여로서의 목소리를 쓰는 원환의 시간에 갇힌 시지프스이다. 이를 통해 <백년여관> 속 다양한 사건들 또한 반복되는 원환의 틀에 유폐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데리다의 언어를 빌려 말하면, “비극적인 것의 필연적 반복성”이다. 즉 <백년여관> 속에서 다루어진 역사적 사건과 당시 그들이 겪은 고통은 고유한 일회적 사건이다. 하지만 이것이 외상(trauma)이 되는 순간, 이는 반복 가능한 일회적 사건이 된다. 사건이 발생한 날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고유한 시간이지만 달력이라는 틀을 상정하는 순간 그 날짜는 해마다 반복해서 돌아온다. 이는 한 번 일어난 사건으로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의 “유령 같은 귀환”이다. 데리다에게는 이와 같은 유령적 귀환을 통해서 기억은 탈구의 가능성을 얻는다. 


   소설 <백년여관>에서도 각 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기억은 이러한 방식으로 귀환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사건이 서로 접합하지만 귀환은 원환의 시간 속에서 지속적 재래를 통해 반복된다. 즉 <백년여관>의 시간 속에서 계열체 속 비극은 되풀이하여 발생한다. 원환에 갇힌 시간은 흐르는 듯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이를 통해 과거는 현재가 된다. 즉 <백년여관>의 다양한 역사적 사건은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행의 사건이 된다. 동일한 비극적 사건이 부단히 재래하는 역사, 이것이 <백년여관>의 시간이요, 임철우가 백 년의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이요, 국가폭력 이후에도 여전한 통증으로 재현되고 있는 ‘이후’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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