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영의 Oct 23. 2024

타자로 향하는 길

5.한강『작별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과 관련하여, “타자에 대한 책임은 타자의 요청에 의해 내가 타자를 대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소년이 온다』(창비, 2014)를 통해 결코 삭제되지 않는 5월의 기억을 소환했던 한강은 장편소설『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만주와 베트남 등에서 역사를 통과한 여성들이 1948년의 제주와 1980년의 광주에서는 또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이야기한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등장인물 ‘경하’와 ‘인선’은 모험을 떠나기 전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겪는다. 제주도의 집에서 목공 작업 중 손가락이 절단된 인선은 서울의 병원으로 후송되어 봉합수술 후, 손가락이 재생되고 혈관 속 피가 흐르도록 3분마다 바늘로 상처를 찌르는 시술을 받는다. 마치 삶이 매 순간 고통을 동반하듯. 한편 경하는 인선의 부탁으로 폭설이 내리는 제주에 도착해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가까스로 인선의 집에 당도한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폭설에 집을 찾는 여정은 진실로 향하는 구도의 길일까? 역사적 비극의 당사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동참하듯 이 작품은 비밀의 문을 열기 위한 통과의례로 인물들의 고통을 택한다. 고통에의 참여가 바로 사건 현장에 들어서는 패스워드가 된다. 


   경하는 제주의 집에 도착한 후 자신이 집에 온 까닭을 ‘죽기 위해서’라고, ‘죽으러 이곳에 왔다’(172쪽)고 생각한다. 인선이 경하에게 제주의 집에 가 줄 것을 부탁한 이유는 집에 있는 앵무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막상 경하가 인선의 집에 당도했을 때 작고 약한 새는 이미 죽어 있었다. 경하는 새를 정성스레 묻어 주지만 어찌 된 일인지 새는 그날 밤 다시 집에 나타난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영혼처럼 나타난 앵무새는 어떤 메시지를 간절히 전달하려는 듯 보인다. 하얀 앵무새가 넋이 되어 다시 집에 찾아든 것은 어쩌면 경하가 이제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했다는 암시가 아닐까? 실제로 인선의 집은 이 사건 즈음부터 낯선 시공간으로 변모한다. 눈에 파묻혀 순백색이 된 제주의 깊고 깊은 하룻밤, 공교롭게도 집은 정전이 되고 촛불에 의지해 주위를 둘러보면 바람 소리만 들리는 외딴 공간이 된다.

 

   그런데 집으로 찾아 든 것은 새뿐만이 아니다. 이번에는 서울의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나타난다. 동시에 두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의 물리적 속성을 위반한 인선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우리를 일상의 공간 너머로 이동시킨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만나 그들의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기 위해 우리는 이제 ‘사이’의 시공간으로 들어간다. 어둠과 빛의 사이, 밤과 새벽 사이, 죽음과 삶 사이에서 비로소 진실의 기록은 봉인이 풀린다. 인선과 경하가 떠난 모험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한 것이다. 경하와 인선이 만난 과거를 통해 독자 역시 마침내 ‘강정심’이라는 여인과 마주하게 된다. 인선의 어머니인,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강정심’에게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인선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 정신이 흐려지고 난 후 인선의 엄마가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   

  

   두 자매가 학교로 돌아왔을 때, 시신들은 국민학교 운동장이 아니라 교문 건너 보리밭에서 눈에 덮여 있었어. 거의 모든 마을에서 패턴이 같아. 학교 운동장에 모은 다음 근처 밭이나 물가에서 죽였어.(249쪽)      

   거기 있었어, 그 아이는. 팥죽에 담근 것같이 피에 젖은 한덩어리가 되어서 세 자매가 집에 들어서니까…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인선의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 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251쪽)


   그렇게 한 여인의 사연을 복원하는 것, 즉 그가 사랑했던 사람의 흔적을 찾는 개인적 행위는 곧 역사적 비극을 되살리는 일이다. 어두운 밤 경하와 인선이 촛불 하나에 의지해 강정심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걸으며 바스러지는 종이 한 귀퉁이에 적혀 있던 역사적 기록을 읽어내는 행위는 곧 사람의 내면을 읽는 것이고 그 사람이 차마 발설치 못했던 증언을 듣는 것이다. 


   소설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야기하지만 역사에 대한 소설이라기보다는 ‘여기 사람이 있었다’는 나직한 외침이다. 작품 속 한 장면을 빌려 인선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버지를 위한 것도 역사에 대한 것도, 영상 시도’ 아니라고 했던 것처럼 이 소설 역시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극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인선과 경하의 ‘읽어내기’ 역시 뒤를 돌아보는 행위다. 그리고 ‘읽어내기’는 ‘기억하기’와 ‘복원하기’를 거쳐 ‘애도하기’에 이른다. 


한강 소설『작별하지 않는다』전체가 하나의 애도의식이다. 폭설은 모든 것을 덮으며, 물은 모든 것을 씻어내고 불은 모든 것을 태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선과 경하는 희생된 백성처럼 서 있는 통나무들을 심기로 한 땅으로 간다. 경하는 가지고 간 마지막 촛불이 꺼지자 성냥을 그어 작은 불꽃을 만들어낸다. 이 소설에서 인물들의 애도 행위를 다시 레비나스의 방식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얼굴과 얼굴이, 내 얼굴과 타자의 얼굴이, 서로 만나 비로소 “내가 내 자신이 되는”지 점이며, “내 자신을 그의 죽음에 포함시킬 정도로”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고, 그래서 타자의 죽음은 늘 “첫 죽음”이다. 레비나스에게 그런 것처럼, 데리다에게도,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도, 죽음은 어떤 것이 종결되는 게 아니라 새로 시작되는 지점이다. 


   5・18 이후 ‘책임’은 가해자 몇 명의 ‘책임자’ 표상으로 고정되었지만,『소년이 온다』에서 묻고 있는 것은 고통하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내는 타인을 향한 책임이다. 그렇듯이 한강은『작별하지 않는다』에서 광주와 제주를 연결하고 있다. 그것은 애도를 넘어선 자리에서 가능한 타자와의 연대, 새로 시작되는 지점이다.

이전 01화 타자로 향하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