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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ul 10. 2021

수화기 너머 그의 안위가 궁금하다

광주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3년 11월)

광주의 국립 5.18 민주 묘지에서




 몇 해 전 광주에 들렀다.


 일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행도 아니고, 다소 이상한 연유로 인해 들른 광주였다. 여의도 금융권 종사자였던 여자 친구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이직을 결심했다. 이대로 살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럴 만도 한 것이, 바로 앞 건물 증권사에서 근무하던 친구 K 역시 매일 늦은 밤 서강대교를 건널 때마다 종종 이런 생각에 빠진다고 했다. 지금 한강에 뛰어들면 고되기만 한 삶을 끝내고 평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여자 친구는 여의도보다는 덜 힘들어 보이는 이런저런 회사에 자기소개서를 내고 필기시험을 치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어느 날엔 광주은행 면접을 보게 됐는데 면접 장소가 광주라는 것 아닌가. 혼자 가긴 조금 무섭다고 하여 별수 없이 나도 동행하게 됐다. 그러니까 이건 출장도 아니고 여행도 아니고, 일종의 보호자 역할로서의 광주행이었다.  


 면접일 전날 야심한 시각에 광주에 도착해서 1박. 다음날 오전 일찍 시작된 면접은 금방 끝났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온 것 치고는 면접에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아서 왠지 아쉬울 정도였다. 면접은 잘 봤으려나. 하지만 여자 친구의 얼굴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면접 어땠어? 붙을 것 같아?"

 "아니. 떨어질 것 같아. 근데 붙어도 문제야. 아무 연고도 없는 광주에서 혼자 다녀야 될 수도 있잖아."

 맥없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이미 불합격을 예감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여행이나 해야겠다. 어설픈 남도 사투리로 애써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아무리 일이 있다지만 요로코롬 광주까지 왔으니껜, 거시기 허벌나게 맛나는 것을 먹어부러야지 않것소잉."


 이제 광주에 들른 연유는 여행 때문으로 바뀌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배를 채우기로 했다. 면접의 찜찜한 기분은 맛난 음식으로 밀어내 버리면 그만이다. 곧바로 인터넷에서 검색한 유명한 게장집으로 향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게장을 그리 좋아하지 않던 때라, 실은 먹을 줄 모르던 때라 맛이 기억나지 않는다. 여자 친구 입맛에는 맞았는지 손가락을 쪽쪽 빨아대며 먹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는 지금은 그나마 발전했지만, 간장게장보다는 양념게장을 선호하는, 게장계에서 보자면 한참 린이스러운 입맛에 머무르고 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소위 전국 5대 빵집 중의 하나라는 '궁전제과'였다. 나비파이와 공룡알빵으로 이름난 곳. 유명세를 탄 이유를 증명하듯 빵은 정말 맛있었다. 밥보다는 빵을 더 좋아하 나는 부인할 수 없는 어린이 입맛이 맞는 건가. 그나저나 전국 3대니, 5대니, 10대니 하는 순위는 누가 정하는 걸까 대체. 저마다 입맛은 다르기 마련인데.


 배가 불러오니 이제 걸어야 할 때. 광주에서 가 볼 만한 곳은 어딜까. 문득 국립 5.18 민주 묘지가 떠올라서 들러 보자고 했다. 여자 친구도 두말없이 민주 묘지행 버스에 함께 올랐다. 어차피 둘 다 광주의 명소 같은 건 전혀 알아보지 않고 온 탓에 가고픈 곳이 없었다.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돌이켜 보면. 광주에 대해서 잘 알지를 못하니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접했던 5.18밖에 생각나지 않기도 했거니와, 아마도 어머니께서 예전에 해 주신 이야기 하나기억나서였 때문일 수도 있다.


 어머니께서는 젊었을 적 전화국 교환원으로 일하셨다.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80년대 초. 그때만 하더라도 시외 전화를 걸면 상대방과 바로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전화국에서 교환원이 먼저 받은 뒤, 해당 지역에 라인을 연결해 줘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굳이 찾자면 <응답하라 1988> 같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을 게다. 아니, 1987년 전국 자동 교환망이 완성돼서 전화 교환 업무가 필요 없어졌으므로 <응답하라 1979> 정도는 나와줘야 볼 수 있는 풍경이겠다. 기술의 발전으로 졸지에 기존 업무가 사라지게 된 교환원들은 114 전화번호 안내, 국제전화 안내, 전신 전보, 고객센터 등 다른 업무로 전환됐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도 내가 태어났을 무렵부터는 114에서 일하셨다. 요즘에도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114 서비스라는 게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아직 전화 교환 업무를 맡고 계셨던 1980년 5월의 어느 날. 그날도 어머니께서는 다른 평범한 날처럼 야간 근무 중셨다. 이 업무는 언제 걸려올지 모를 전화기 앞에서 내내 대기를 해야 하므로 낮 근무, 밤 근무 등 교대 근무가 잦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광주 쪽에서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오는 게 이상했단다. 받아 보니 범한 전화가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에선 한 남자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더란다. 동시에 단말마의 비명,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같은 것들이 뒤섞이는 바람에 남자가 외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무서운 기분이 드셨다고. 누군가에게 채 연결해 주기도 전에 전화는 금방 끊겨버렸다.


 몇 시간 동안이나 그런 전화들이 광주를 발신지로 해서 계속해서 걸려 왔.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전화가 뚝 끊어졌고 더 이상 광주에서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정전 때문에 도시의 불빛들이 탁탁탁 차례로 멸등하는 것처럼, 전화 신호도 하나 둘 모두 끊어졌다 말씀을 하셨. 게 뭔가 싶어 름이 끼쳤다고. 아마도 계엄군이 광주의 통신을 차단했던 때문일 텐데 전화국 교환원이 그런 것까지는 알 수 없었을 . '광주에서 뭔가 난리가 났구나.' 하는 짐작만 할 뿐이었는데, 한동안 TV 뉴스나 신문서는 광주에 대한 소식은 한마디도 없었기에 어머니께서는 더욱 무서우셨다고 한다.


 종종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머니께서는 그때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남자의 안위가 궁금하다 하신다. 그는 그토록 급박한 순간, 어떤 이와 통화를 하고 싶었던 걸까. 난리통에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갔을까. 어딘가로 끌려가서 모진 일을 당한 건 아닐까. 몸의 어느 곳을 영영 못 쓰게 되진 않았을까. 혹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여주인공처럼 외진 곳에 묻혀 있다 훗날 백골로 발견을지도 모른다. 그동안도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일이다. 그 나이대 영남 사람 치고 으레 호남에 대한 적대적인 지역감정을 가지지 않은 이가 없는데 어머니께서는 그러지 않으시다. 광주의 얼굴도 모르는 한 남자에 대한 부채 의식 같은 게 남아 있어서가 아가 싶다.


 5.18 묘지로 던 버스 차창 밖으로는 김대중 컨벤션센터 보였다. 번에대학 동아리 후배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속했던 동아리는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패였다. 새천년이 밝았는데 우리는 무슨 생각으로 민중가요 같은 걸 불렀을까. 풋내나는 대학생 주제에 잘 알지도 못하는 노동과 역사와 민주주의와 평등과 자유를 소리 높여 줄곧 불러댔다. 그럼에도 서로가 정치 이야기는 별로 하질 않았더랬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다.


 딱 한 번, 정치인 이야기를 했던 때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였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광주 출신 후배 P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는데 괜찮냐."

 "많이 슬퍼요." 

 한참 후에 짧은 답문이 돌아왔다. 슬프다. 많이 슬프다고. 나는 그 슬픔의 정도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일가친척이 모두 영남에 살고, 앞 세대도 앞의 앞 세대도 줄곧 여기서만 살았다. 나의 가족이, 혹은 하나 건너 둘 건너 알던 누군가가 군홧발에 짓이겨 본 적 없고, 타향에서 출신지 때문에 차별받아 본 적도 없으며, 우리 고향의 정치인이 마침내 대통령이 돼서 그동안의 설움을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듯한 벅참 잠시나마 느껴본 적 역시 없었다. 그러니 너의 '많이'와 나의 '많이'는 얼마큼의 간극이 펼쳐져 있을까. 어중간한 그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다 하더라도 후배가 생각하는 만큼의 많이라는 곳까지 내가 온전히 닿을 수 없을 거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민주묘지를 한참이나 걸었다. 밥과 빵을 먹을 때와는 달리 우리 둘 다 별말 없이 걷기만 했다. 불과 1시간 전만 하더라도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했었는데,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 곳이었다. 짧은 광주 여행은 거기서 끝이 났다. 이후로는 광주에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다. 여자 친구는 광주 은행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엊그제는 서울 연희동에 사는 그자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수많은 슬픔과 아픔을 만들어 낸 살인마는 별일 없이 살고 있었다. 전 재산이 29만 원뿐이고 알츠하이머를 앓는 중이라던 전씨 성의 그. 원래대로라면 이날 사자명예훼손 재판의 피고인으로 법원에 출석해야 하는 날임에도 불출석한 채 한가로이 동네 산책을 하고 있더란다. 값비싸 보이는 재킷과 면바지를 잘 차려입고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뒷짐을 진 채로. 사진을 찍는 기자에게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당신 누구요!"라며 큰 소리로 호통까지 쳤다고 한다.


 1980년 5월 수화기 너머 그의 안위는 알 수 없지만, 안위를 생각하기조차 싫은 그자는 보란 듯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의 어머니께서 그때 느꼈던 무서움, 그 비슷한 감정을 나 역시 느끼게 된다.


 광주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 이 글을 쓰고나서 몇 달 후인 2021년 11월 23일, 전두환이 죽었다. 끝내 광주 시민들에게 사과하지 않은 채.




(201311월, 광주에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게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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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묻어나오던 5.18 국립묘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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