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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Aug 01. 2021

날카로운 첫 대나무 숲의 추억

담양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2019년 3월)

울창한 대숲이 인상 깊던 담양 죽녹원




 아내는 나무 중에서 대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수많은 나무들이 있는데 왜 하필 대나무인지 물어봤더니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다. 늘 푸르러서, 댓잎 모양이 예쁘니까, 곧게 쭉 뻗은 마디가 시원해서 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딱히 이유 없이 그냥 좋다고 한다. 하긴 좋아하는 데 이유가 어딨겠나. 김현철도 '연애'라는 노래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굴 좋아한다는데 이유가, 그런 이유가 어딨겠어. 그저 어느 누가 맘에 들면 그냥 맘에 드는 거지." 이유를 굳이 추측하자면, 아내는 수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쓸데없이 화려한 꽃망울을 자랑하거나 구불구불 굽어있는 나무들 따위보다는, 이쪽과 저쪽을 잇는 유일한 최단거리이면서 가장 효율적인 직선이라는 이미지를 몸으로 표현하는 대나무라는 존재에 필연적인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그토록 대나무를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몇 해 전엔 담양 죽녹원으로 향했다. 그곳의 대나무 숲이 근사하다는 말을 예전부터 많이 들었더랬다. 올해의 첫 여행이라는 설렘과 함께 이른 봄의 남도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기차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김밥과 사이다를 정신없이 집어삼키면서, 아내에게 대나무에 대한 내밀한 기억을 하나 털어놨다.


 "나는 사실 대나무를 생각하면 좋다, 싫다의 2지선다형 느낌보다는 '무서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라."

 "대나무가 무섭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너는 커다란 대숲에 가 본 적 없지? 댓잎이 빽빽해서 한창 대낮인데도 볕도 하나 안 들고 엄청 어둡다. 혼자 걷고 있으면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되게 무섭게 들려."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어렸을 때 기억 때문인 것 같은데. 그때 이야기 한 번 들어볼래?"


 아직 꼬마 아이였던 무렵, 경남 고성의 외가댁에 종종 갔었다. 진주 집에서 차를 타면 30분 거리라서 굳이 명절 때가 아니더라도 자주 들렀다. 지금이야 가세가 기울었지만 외할아버지께선 예전에 나름 지역 유지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너른 기와집에 살면서 고봉밥을 먹이며 부렸던 머슴들도 꽤나 있었고, 본인은 딸자식이라서 늘 남은 부스러기만 먹었지만 귀한 고기며 생선 반찬도 끼니마다 빠짐없이 밥상에 올라왔으며, 힘깨나 쓰던 지역 정치인이나 공무원들도 사랑방에 들락날락거렸던 기억이 남아있다고 하신다. 나중에는 이런저런 좋지 않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바람에 살림살이가 형편없이 쪼그라들긴 했지만.


 예전의 기세가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너른 집터 뒤쪽으로는 외할아버지 소유의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은 끝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넓은 대숲 사이로 자그맣게 나 있었다. 길의 양 옆엔 오래된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리 잡아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댓잎이 시선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캄캄했다. 아주 한낮에도 햇볕 한 줌 없이 시커먼 그늘이 지고 한여름에도 더위 한 조각 스며들지 못해 서늘하기만 했다. 일이 있어서 집에 어른들이 아무도 안 계시면 혼자 대숲을 걸어서 지나가야 했는데 어린 나이에 그건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게 되면 그대로 숲이 나를 집어삼키는 건 아닐까. 혹은 어두컴컴한 대나무들 사이에서 이름 모를 괴물이 튀어나와 나를 해치면 어떡하지 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빨리 어른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돼. 무서움이 커질수록 발걸음은 이에 비례해서 점점 빨라졌고, 대숲이 끝날 때 즈음이면 심장이 터질 듯한 뜀박질로 쉼 없이 다리를 놀리고 있었다.

 

 어른들과 함께 대숲을 걸을 땐 바람이 댓잎에 이는 소리가 한적한 바닷가의 파도소리처럼 시원하게 들렸다. 하지만 혼자 걸을 땐 소리가 달리 들렸다. 서늘한 그 소리는 댓잎들이 바람결에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아파서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사그락거리는 소리는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귓가에 속삭이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진짜 이렇게 들렸다니까. 나랑 같이 가자. 대숲에서 나랑 같이 살자. 날 두고 가지마아아아아아악."

 어느 날엔 거의 울면서 뛰어갔을 때도 있었다. 사방을 가린 대나무 줄기도, 무서운 소리를 내던 댓잎도, 아무리 달려도 끝나지 않던 길도, 모든 게 무서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외가댁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날이었는데, 안방 이부자리 머리맡에다 소형 라디오를 가져와서 어린이 전래동화 카세트테이프를 크게 틀어둔 채 잠을 청했다. 밤결에 사그락거리는 댓잎 소리를 이야기 소리가 조금이나마 막아줄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전래동화도 무서운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가 사람들 간을 빼먹고 다니는 내용인데. 어휴,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덜덜덜 떨면서 잠아, 빨리 와라 빨리 좀 와, 아이 참 무서워 죽겠네, 이러면서 잤지."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나이대의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해서 지레 먹은 겁에 송두리째 삼켜질 수도 있었겠구나 싶다. 다 커 버린 지금의 나에게는 이젠 대나무가 그냥 평범한 나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무성했던 예민함은 죄다 어디로 간 걸까. 그리고 그때 그 대숲은 이제 찾아보려야 찾을 수도 없게 돼버렸다. 외가댁의 재산이 꽤 됐던 탓에 외삼촌들과 이모들, 나의 어머니까지 한데 모여 다툼이 일어났고 종내에는 큰외삼촌께서 모든 걸 가져가셨다고 한다. 나는 직접 보진 못했지만 싸움은 대단했다고 들었다. 고성과 삿대질이 오가고 크리스털 재떨이까지 날아다녔다고. 어머니께서는 '가관'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햇빛에 반짝이며 무지개를 그리고 날아갔을 재떨이를 상상하면 '장관'이었을 수도 있겠다. 집안 망신은 여기서 그만하자며 분쟁은 법정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다. 큰외삼촌은 많은 땅과 산을 처분했고 그렇게나 넓었던 대숲의 대나무들도 모조리 베어서 팔아넘기셨다. 그렇게 사라진 대나무들과 함께 어린 시절 나의 예민함과 두려움과 상상력마저도 모두 어져 사라져 버렸나 보다.


 이제는 대나무 하면 떠오르는 감정을 한 가지만 지금 빨리, 오래 고민하지 말고, 당장 대답하라면, 무서움 다음으로 드는 게 배고픔이다. 죽순 무침이 떠올라서다. 대나무의 어린 순인 죽순을 데친 후 새콤달콤한 양념을 무쳐 만든 요리. 한여름에 입맛이 도통 없을 때 먹으면, 집 나갔던 입맛을 금방 귀로에 들어서게 만드는 밥도둑으로 이것만한 게 또 없다. '죽순 무침 진짜 맛있는데. 캬아, 그거 새콤하이 맛난 반찬인데. 갑자기 배고프네. 밥 먹자 밥.' 따위 생각을 하면서 어느새 입맛을 쩍쩍 다시고 있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오로지 먹고사는 데에만 열중하며 살았던 결과물이 이렇다 결국.


 아내는 나의 대나무 숲 이야기를 한창 듣다가 집안 가족들의 재산 다툼 묘사에 이어서 죽순 무침이 먹고 싶다는 다소 생뚱맞은 결론에 이르자 혀를 끌끌 찼다.


 "무슨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만 결국 죽순 무침 맛집 찾아가자는 거였잖아."


 담양 여행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 끝.




(2019년 3월, 담양에서)

선비의 원림 소쇄원에서


담양 국수거리에서 비빔국수 한 그릇


죽녹원에서 대나무 아이스크림



여기도 대나무 저기도 대나무


문제의 그 새콤달콤한 죽순 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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