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 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다른 사람들처럼, 나에게도 친구, 사랑, 그리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내가 무슨 길가에 서있는 소화전이나 가로등도 아니고..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벨기에 보리나쥬. 1879년 8월11일~14일.
브뤼셀에서 빈센트와 만났던 날은 지금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해요. 빈센트가 제 작업실로 온 건 아침 9시였어요. 처음에는 함께 지내기 어려웠지만 나중에 몇 번 같이 그림을 그리고 나니 괜찮아졌어요.
안톤 반 라파드가 빈센트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
1890년. 고흐가 세상을 떠난 뒤.
라파드가 아카데미에 등록하려 할 때였다. 빈센트는 그런 라파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편지에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화가는 스스로 깨달아가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라파드는 빈센트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화가가 된 것은 더 먼저였기에 이런 설교스러운 조언은 마냥 듣기에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파드, 내가 보낸 편지는 잘 보관해두고 있나? 시간이 된다면, 그리고 내 편지들이 아직 불속에 타 없어지지 않았다면, 내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게나. 이런 얘기도 거만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난 자네를 위하는 온전한 마음에 그것을 썼던 것이거든. 너무 노골적인가 싶긴 했지만... 아마 자네는 내가 정말로 고집 센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겠지, 내가 실제로는 무슨 교리 같은 거를 설파하는 중이라고 말이야.
라파드에게 다시 쓴 편지.
에텐, 1881년 11월.
라파드에게서 답장이 잘 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다.
아하! 내가 정말로 고집스러운 사람이었구나! (...)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네. 내가 (고집스러운지) 확신이 없었는데 자네가 확실히 해주었어. (...)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전 고집스러운 사람이었군요.
라파드에게 쓴 편지.
에텐, 1881년 11월.
윗 편지의 답장이 안 좋게 온 듯하다.
이 일 말고도 빈센트는 라파드의 일에 딴지를 자주 걸었는데,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식이었다.
라파드가 누드모델을 고용했을 때 -> 옷 입은 사람을 그려라.
라파드가 전시회에 응모할 그림을 그릴 때 -> 나는 안목 없는 사람들이 여는 전시회에는 관심이 없다.
라파드가 수채화를 그리려 할 때 -> 수채화보다는 흑백 그림을 그려보는 게 어떠냐.
빈센트는 도대체 왜 이런 말을..? 돈이 없는 자신은 못 하는 일에 대한 부러움에 내뱉은 말이었을 수도, 아니면 마음 맞는 친구와 공감대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다. 후자 또한 돈이 없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겠지만...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했고 그저 직설적인 성격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남겨진 빈센트의 편지에서 유추하건대, 유복한 집안의 라파드는 자기 스스로와 자신의 그림을 말할 때에 '귀족스러움'으로 포장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대인관계에서도 남을 얕보고 깔보는 건방진 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라파드가 빈센트에게 쓴 편지는 단 한 통만 남겨져 있긴 하지만, 라파드가 먼저 도발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난 고흐 자네가 이런 그림을 진지하게 그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네. 자네도 동의하겠지? 자네가 원래는 이거보다 더 잘 그릴 능력이 있다는 건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어. 그런데 왜 이렇게 사물을 피상적으로만 보는 건가? 왜 인물의 움직임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는 거야?
뒤쪽 여자를 보게. 교태를 부리는 듯한 손 모양을 하고 있어.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그림인가?!
그리고 커피 주전자랑 테이블이랑 손은 어떻게 된 건가? 주전자가 어떻게 돼있는 거야?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것도 아니고 손에 들린 것도 아니고, 도대체 뭐란 말인가?
또 오른쪽 남자를 보게. 그 사람한테는 왜 무릎, 배, 가슴이 없는 거지? 아니면 등짝에 붙어 있나? 왜 이 남자의 팔은 1미터나 짧아야 하지? 또 왜 코는 절반이 모자라야만 하는 건가?
그림 왼쪽에 있는 여자의 코에는 꼭 이렇게 각설탕을 붙인 것같은 담뱃대를 그려놓아야만 했나?
그림을 이런 식으로 그리면서 자네는 어떻게 밀레와 브레튼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단 말인가? 이보게. 적어도 내게 미술이란, 이렇게 대충 그려져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것이라네.
라파드가 빈센트에게 쓴 편지.
1885년 5월24일.
제3자가 읽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내 친구, 라파드에게.
자네 편지를 방금 받았다네. 놀라웠어. 여기 다시 가져가게나.
라파드에게 쓴(?) 편지.
뉘넨. 1885년 5월25일.
재밌게도 라파드의 모욕적인 편지는 빈센트가 이렇게 되돌려 보낸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빈센트는 자신이 받은 편지를 잘 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빈센트가 찾아와 석판화용 돌을 구해달라고 했어요. 돌을 구해주었더니, 빈센트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가게 안에서 말이에요. 그 사람은 사전 스케치도 없이 석판화 크레용부터 쓰기 시작했어요. 샘플 그림도 없었죠. 머릿속 기억으로 그림을 그렸죠. 굵고 거친 선으로 테이블과 농민들을 그렸어요. 램프 불빛 아래서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었죠. 그건 빈센트에게 있어 첫 번째 석판화 작업이었을텐데도 그는 주저함이 없었어요. 뾰족 칼로 스크래치 작업을 시작했고, 엄지와 다른 손가락에 덕지덕지 때를 묻혀가며 작업하는 데 마치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어요.
당시 그림 상인 Dimmen Gestel이 문제의 석판화 제작 과정을 목격하고 남긴 증언.
작은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는 사람들, 접시를 향하는 그 손으로 힘겹게 땅을 일구었고, 그렇기에 그들의 식사는 매우 정직하게 얻어진 것이지. 나는 여기서 우리 도시 사람들의 삶과는 온전히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이유도 모른 상태로 이 그림을 감상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원하지 않아.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뉘넨. 1885년 4월30일.
그림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소재한 반 고흐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빈센트 화가 인생의 첫 대작답게 다른 그림들보다 크기가 확연히 크다. 직접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그림은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소위 최종본이다. 빈센트는 이 최종본을 완성하기까지 세 번의 스터디 그림을 그렸다. 초기 스터디에는 그림 속 사람이 네 명뿐이었다. 추가된 한 명은 위 그림의 젊은 여인, 왼쪽에서 두 번째 사람으로, 빈센트가 좋아한 여인이라 추가되었다는 달달한 썰이 있다.
농촌의 젊은 여인은 도시의 부인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아. 그녀의 때 묻고 기워진 파란색 치마와 재킷조차도 날씨와 바람과 햇볕을 받아 가장 섬세하게 아름다운 색을 하고 있지. 이 여인이 도시 여인의 옷을 입는다면, 그 진정한 아름다움이 사라져 버릴 거야.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뉘넨. 1885년 4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