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냄새 나는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사람들. 폴 고갱과 에밀 베르나르
고갱과 베르나르, 두 사람은 각자 자화상을 그려 보내왔다. 이는 고흐가 원했던 방식(서로 초상화 그려주기)은 아니었음에도 고흐가 크게 기뻐했던 이유가 있다. 자화상의 뒷 배경으로 친구의 초상화를 그려 넣었기 때문이었다. 즉 고갱의 자화상 속에는 베르나르의 그림이 벽에 걸려있고, 베르나르의 자화상 속에는 고갱의 그림이 벽에 걸려있다. 저마다의 여건으로 고흐의 소원을 그대로는 들어주지 못했던 친구들이 보내준 센스있는 답장이었다. 빈센트가 그림을 받아 보고 테오와 고갱에게 쓴 편지에 그 날의 감동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고갱이 그려준 자화상은 내 그림이랑 맞바꾸지 못할 정도야. 맞바꿈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그림이거든. 그치만 고갱이 이곳 아를에 온다면 첫 달치 비용을 이 그림으로 내면 어떨지 물어볼까해. 아니면 교통비 내주기로 한 걸 이 그림으로 받을수도 있고.
빈센트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아를. 1888년 10월3일.
고갱 그림만 칭찬하는 것 같다.
고갱. 오늘 아침에 자네가 보낸 엄청난 편지를 받았어. 받자마자 동생 테오에게 보냈다네. 인상주의를 대하는 자네의 전반적인 구상을 이 자화상이 상징하고 있더군. 정말 엄청났어. 그림을 보면서 이보다 더 즐거울 순 없을거야. 이 그림은 나한테 너무 대단해서 내 그림과 맞바꾸자고 할 수도 없을 정도라네.
빈센트가 고갱에게 쓴 편지.
아를. 1888년 10월3일.
빈센트는 약속대로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자신의 그림을 나누어 주었다.
고갱이 받아간 반고흐 자화상은 단순한 자화상이 아니었다. 이 그림에는 남프랑스 아를에 그림 공동체를 세우고 싶어했던 빈센트의 꿈이 담겨있고, 그 꿈에 고갱이 동참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고흐가 애시당초 그림 교환을 제안한 것도 일본 화가들의 그림 공동체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고흐가 보기에 남프랑스의 아를은 마치 인상주의 미술을 위해 존재하는 곳 같았다. 그곳의 따스한 햇살로 힐링을 받는 동안, 고흐는 동료 화가들이 모두 모여 함께 그림을 그리는 낙원, <남쪽의 스튜디오>라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일본 화가들이 그림을 교환한다는 얘기에 감동해왔어. 그건 분명히 그들이 서로를 좋아했고, 함께 했으며, 그들 사이에 어떤 하모니가 있었다는 얘기거든. 그들은 실로 형재애로 가득한 삶을 살았다는 걸 보여주지. 서로 얕은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닌 자연의 방식으로 사는 삶 말이야. 그들의 그런 모습을 닮아간다면 우리에게 더 좋을 거야.
빈센트가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
아를. 1888년 10월3일.
고흐는 <남쪽의 스튜디오>에 고갱이 꼭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기 자신을 동양의 스님처럼 그려서 보낸 것이었다. 머리는 평소보다 더 민머리처럼 그렸으며, 눈매는 날카롭게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처음 고흐의 제안에 고갱과 베르나르는 선뜻 응해주지 않았다. 둘이 같은 지역에 있었다고는 해도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 몇시간씩 모델이 되어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베르나르는 고흐에게 "고갱의 초상화를 그릴 방법이 없어." 라고 답장했었는데, 이에 고흐가 쓴 답장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
베르나르, ‘고갱 초상화를 그릴 방법이 없어!’ 라고 쓴 걸 보고 좀 놀랐다네. 왜 못한다는 거야?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군. 이제와서 다시 강요하진 않겠네. 그리고 이제 분명히 말하건대, 그림 교환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을거야. 고갱도 자네 초상화를 그릴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내가 아는 인물 화가들이 있는데, 너무 오랫동안 곁에서 보아와서인지 서로를 위해 포즈를 취해줄 생각조차 못하고 서로를 그려주지도 못한채 헤어질거 같아. 그래! 난 강요하는게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교환 얘기는 더 이상 없을걸세.
왜인지 베르나르에게만 짜증내는 것 같다.
빈센트가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
아를. 1888년 9월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