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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Jun 03. 2020

단독주택에 살면 걱정도 재미도 두배가 된다

나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여기저기 늘어진 전깃줄이 있는 우리 동네를 보면서

저 전깃줄을 타고 트램이 딩동댕동 종소리를 울리며 언덕길을 올라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달에 한 번쯤, 서울시내의 모든 가로등과 집집마다 켜진 전등을 잠시 끄고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현될 수 없는 생각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가끔씩 행복해 진다.


단독주택에 살면서 나는 약간의 귀차니즘을 즐긴다. 현관문만 닫으면 자연과 차단되는 아파트와 달리 바람이, 빗물이, 벌레가 자연이랍시고 수없이 드나드는 주택에서 잡초도 꽃으로 여기며 산 지 20년이 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이들이 활발하게 뛰어놀기라도 한 날이면 아래층에 사는 노부부에게 백배사죄를 드려야 했고 가해자였던 내가 피해자가 되어 위층에서 울리는 소리를 참아낼 때는 몸에 사리가 생길 정도였다.


서울살이 40년 동안 반절은 아파트에서 나머지 반절은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아이들이 다 자란 뒤에 단독주택에서 살아보니 좀 더 일찍,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이사를 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뛰어놀기 좋아하는 아이들을 주눅 들게 한 게 몹시 안되었다는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렇다고 주눅이 들진 않았다 다만 아래층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무서워하는 부작용이 약간 있었을 뿐이다)

 

아파트와 단독주택 모두 각자 장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굳이 묻는다면 나는 단독주택이 좋다. 둘 중 나에게 정을 더 많이 준 쪽이 좋은 건 당연한데 단독주택은 나를 한시도 편하게 놔두지 않는다. 내 손 때가 묻은 집,

그래서 정이 더 든 것 같다.

집안에 들어서야 내 집처럼 편한 아파트와 달리 단독주택은 내 집으로 들어서는 골목부터 편안하다,


단독주택이라 하지 말고 그냥 우리 집이라 부르자. 우리 집은 봄부터 겨울까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봄이면  땅 속 여기저기서 돋아나는 새싹과 함께 걱정도 돋아난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수도관과 보일러 관이 안녕하지 못하다. 지은 지 20년이 되면 집도 여기저기 몸살이 난다. 강추위가 계속되었던 어느 해 겨울은 약속이나 한 듯이 집 안의 모든 보일러가 멈춰버렸다.


아파트에서는 집에 물이 세거나 고장이 나면 맨 먼저 윗집을 의심한다. 우리 집은 멀쩡한데 아래층 화장실에 물이 샌다고 우리 집 화장실을 뜯어 재낀 적이 있었다. 다용도실에 곰팡이가 끼는 건 관리실에서 해결해 줘야 한다고 원성을 높이는 이웃도 있었다.

 

단독주택은 죽어도 남 탓은 못한다. 고스란히 내 탓이다. 또 돈이 들겠군, 속상해하면서 전문가에게 맡기면 어느 해인가는 여행 갈 밑천을 집수리에 날리고 어느 해인가는 남편의 보너스를 고스란히 집 수리비에 넣은 적도 있다  하지만

돈이 수중에서 사라지는 것은 잠깐, 화단에서 요 작은 새싹들이 앙증맞게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면 은행에서 이자가 불어나는 것보다도 더 행복하다.


대신 햇볕 부자가 된다.

한여름 장마 중에도 하루쯤 쨍한 볕 좋은 날이면 이불을 털어 말리고 봄날의 따뜻한 햇볕에는 향기로운 봄나물을 삶아서 말린다. 표고버섯과 고사리 취나물. 토란대를 말리면서 살림의 재미를 톡톡히 보고 산다.


못하나 제대로 박을 줄 모르던 우리 부부가 단독주택에 살면서 기술자가 되었다. 봄이면  나무 울타리에 왁스를 바르는 일쯤은 까짓것 물구나무서기보다 쉬어졌다.

          햇빛 좋은 날 옥상에서 나물 말리기


봄이 되면 한 차례 집 단장도 우리 부부가 한다.


내 땅에서 상추가 토마토가 가지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덤으로 얻는 행복이다. 처음으로 아기가 뒤집기를 하고 첫 발자국을 뗐을 때와 같은 환희를 매일 아침 느낀다.


사람이 살면서 과연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 누구는 혼자 누울 만큼의 땅만 필요하다고 하는데 우리 텃밭은  보다도 작다. 옥상의 작은 박스에 심은 상추는 여름먹고도 남아 무공해라고 강조하며 아파트에 사는 친구 손에 들려주기도 하고 봄에 심은 고추 모종 여섯 그루는    고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매운 고추와 오이 고추를 각각 심어 두고 된장찌개가 끓기 시작하면 바로 매운 고추를 따서 찌게에 집어넣으면  농장 직송 고추 된장찌개가 된다. 아삭한 오이 고추는 작년 겨울 동안 과일 껍질을 묻은 흙의 영양을 먹고 오이처럼 크게 자란다. 찬밥에 물을 말아서 된장에 찍어   물면 내가 기른 고추라서 그런지  맛이 있다.

부추는 한번 씨를 뿌리면 해마다 싹이 튼다.  나는 부추를 자르지 않고 꽃이 필 때까지 그대로 두고 바라본다. 부추꽃은 난초만큼 예쁘다.

이런 쏠쏠한 재미를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 힘이 드는 만큼 보답해 주는 게 땅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맛이다.

              싱그럽게 자라고 있는 옥상농장의 채소들



비 오는 날의 빗소리를 도시의 소음과 섞이지 않고 고스란히 들어볼 수 있는 게 좋다. 톡톡톡  나뭇잎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앞집의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 낙엽으로 막힌 하수구를 터주면 콸콸콸 시원하게  빠져나가는 빗물의 재잘거림은 특별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나는 집을 사랑할 뿐, 집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집은 소라게처럼 자신이 등에 지고 다닐 만큼의 부피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내가 욕심을 부려서 넓은 뜰과 분에 넘치는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아이들이 모두 독립을 하고 난 지금은 버거워 졌을지도 모른다.

집은 쓸고 닦고 가꾸며 살다가 홀연히 떠나는 날. 마음이 가벼워야 한다.


서울에서도 유일하게 단독주택이 많은 우리 동네는 전날의 부유함을 느끼게 하는 담장 높은 집들이 많다. 그중에는 잡초가 무성한 뜰에 노인만 두 분이서 사는 집도 있다. 가을이면 감나무에 감이 가지가 늘어지도록 열려도 손 닿는 곳만큼만 따 먹을 뿐 나머지는 모두 나뭇가지에서 그대로 꽁꽁 얼어버린다.  분이서 단출하게 아파트로 가셔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대부분 집안일에 관심 없는 할아버지가 반대를 한다.

아파트는 답답해서.., 그것은 편견이다. 오래된 단독주택의 층고는 아파트보다 훨씬 낮다. 답답하다는 이유는 쾌적하지 못하다는 게 아니라 내 집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실내에서 입은 차림새로 밖에 나와 감나무 아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자유를 어디에서 맛볼 수 있겠는가,

나이 들어서도 단독주택에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이유가 된다.


냄새를  맡고 하늘을  바라 보면서 사는 삶. 눈도 비도 바람도 그대로 온몸으로 맞이할 수 있는 삶.

여름에는 모기가 틈을 노리고 길냥이가 제 집처럼 들락거리며 밤새 울어서 잠을 설쳐도 나는 걱정만큼 재미도 많은 우리 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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