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동 김작가 Sep 23. 2020

모자를 쓰고 십 년이 젊어졌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을 들라면 한 가지 일을 한 번에 멀티 태스킹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노련해졌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육개장을 끓이려고 구입한 재료인 고사리, 파, 버섯, 소고기, 숙주 버섯을 반 나눠서 갈아놓은 녹두에 넣어 지지미를 만든다. 같은 재료로 전혀 다른 두 개의 음식이 같은 식탁에 놓인다.

멀티 태스킹을 하는 사람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사람보다 성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맛은 나도 보장 못한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도 줄거리는 물론 주인공의 의상과 집안 인테리어 그곳의 경치까지 감상한다.

Tv도 마찬가지다.

내가 '꽃보다 할배'를 보고 감탄한 것은 그곳의 경치뿐만 아니라 할배들의 패션이었다.

어찌 보면 연예인이라는 직업만 빼면 우리 남편과 다를 게 없는 할배들은 영상 속에서 무척 멋져 보였다.

남방 셔쓰에 헐렁한 바지를 입은 여든살이 넘은 이순재 씨가 젊은이들보다 활력이 넘쳐 보이고 아픈 다리 때문에 일행과 보조를 맞추지 못해서 항상 뒤처지는 백일섭 씨의 모자 달린 후드 집업과 반바지 패션은 마냥 귀엽기까지 했다.

그중 우리 남편과 가장 비슷한 체구의 신구 씨의 패션을 관찰해 보았다.

조끼, 남방, 티셔쓰. 별다를 게 없는 옷인데 왜 세련돼 보이는 걸까?

옳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자..., 모자였다.

패션의 정점은 머리라고 하지 않던가, 그들의 흩어진 반백의 머리를 감추고 대신 멋으로 포장한 것은 모자였다.


우리 남편은 머리숱이 많은 편에 속했다. 그런데 40년 후에 이렇게 대머리 남편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금은 머리카락 한 올이 아쉬운 민머리 할아버지가 됐다.

우리 손녀딸은 짓궂게도 할아버지를 그림으로 그리 둥근 머리에 머리카락을 정확하게 세 올만 그린다.

''에이 좀 더 그려줘''

하고 할아버지가 아양을 부리면 선심쓰 듯 한 올을 더 그려 넣어 주기도 한다.


어느 해인가는 패키지여행을 떠났다. 가이드가 남편에게 깍듯하게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게 어찌나  불편하던지..., 어르신과 함께 사는 나는 덤으로 할매가 된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이 없는 머리는 나이를 훨씬 들어 보이게 한다.


돌아가신 시어머님은 퍽 세련된 분이셨다. 당신 아들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게 속이 상하셨던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부부를 앞세우고 쇼핑을 나가자고 했다.

머니가 권하는 대로 가발 가게에서 온갖 디자인의 가발을 써봤지만 남편은 한사코 싫다고 했다. 어색함을 무릅쓰고 가발을 쓰면 좋으련만..., 곁에서 아무리 부추겨도 가발을 쓰고 다닐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차라리 나도 남편이 어색해하는 모습을 바라보기보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대신 모자를 사기로 했다. 모자는 옷과 달라서 본인이 꼭 써보고 사야 한다.

인사동에 있는 모자 전문점에서 다양한 모자들을 골랐다.

흔히 야구모자라고 부르는 베이스볼 캡은 예비군 아저씨처럼 보였다. 탈락.

정장에 어울리는 페도라는 근사했지만 정장을 입을 일이 자주 없기에 보류,

입고 간 일상복에 어울릴 것 같아서 써본 버킷햇은 자칫 아들내미 꺼를 빌려 쓴 거 같아서 탈락,

진열장에 걸린 베레모가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꽃보다 할배들도 베레모를 즐겨 썼던 것 같다.


내 맘에 쏙 드는 베레모를 발견했다. 조각보처럼 천을 이어 만든 모자였다.

약간 중성적인 디자인으로 여자들이 써도 될 만큼 세련된 모자였다.

역시... 남편에게도 잘 어울렸다. 머리를 모자로 가리니 십 년은 족히 젊어 보인다.

같은 디자인으로 여름 모자와 겨울 모자를 샀다.

처음에는 모자를 쓰고 밖에 나서기를 쑥스러워하던 남편도 어느덧 모자와 한 몸이 되었다. 어디서든지 핸드폰과 함께 벗어둔 모자를 챙긴다.


아빠가 모자를 필수품으로 여기다 보니 아이들이 모자 선물을 자주 한다.

런데 모자라는 게 캡이 조금만 짧거나 길어도 얼굴에 어울리지 않고 또는 베레모의 경우 모자의 깊이에 따라 머리에 앉은 딱정벌레처럼 납작하게 보이거나 아니면 부풀린 빵처럼 수북하게 떠있는 경우가 있다.

아이들에게 제발 모자는 사 오지 말라고 해도

어떤 노부부 할아버지가 썼는데 너무나 잘 어울려서, 아니면 카페에 앉아있는 노신사가 쓰고 있는 걸 보고 아빠 생각이 나서 샀다고 한다.


                                    신발보다 많은 남편의 모자들



장식장엔 어느덧 남편의 모자가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다.

등산 갈 때  쓰는 카우보이 모자. 여름 한철 마바지에 어울리는 왕골 페도라. 색색깔의 베레모.

운동할 때 쓰는 야구모자 등...


단지 민머리 하나 감추려고 쓰는 모자인데 그 종류가 다양하다. 지금은 모자가 남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렸다.

어쩌다 모자를 벗으  어르신이 되는 우리 남편.

모자를 쓰면 또 다른 나의 남자가 된다.

이전 07화 손녀에게 하듯이 내 아이를 키웠더라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