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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Dec 20. 2023

제주 밤바람


제주 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일주일의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갔다. 낮에 마신 커피 탓일까? 잠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머리는 점점 더 맑아지고 잠은 올 기척이 없다. 이번 여행의 멤버인 오빠 부부와  친구부부가 자고 있는  방에서는 낮은 코 고는 소리가 들리고 남편 역시 곁에서 곤하게 자고 있는데 내 잠은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지 돌아 올 기척이 없다.


오지 않는 잠을  애써 기다리기보다 책을 읽든 글을 쓰든 혼자서 할 수 있는 걸 하자며 살며시 거실로 나왔다. 집안의 고요함과는 다르게 창밖 세상은 역동적이었다.


가로등에 비친 바깥 풍경이 심하게 흔들리고 다. 마당에  우뚝 솟아있는 종려나무 잎사귀가 머리를 산발한 채 나부끼고 있고 어둠보다  삼나무 군락은 마치 큰 불이라도 난 것처럼 바람에 휩쓸리고  있다. 


 어제는 하룻 내 비가 내렸다. 밤이 되면서 비는 그쳤지만 지금은 바람이 몹시 불고 다.


삼다도라는 이름에  한축을 기여한 제주의 바람은 육지에서 부는 바람과는 그 위력이 달랐다. 더구나 바람을 견디는 숲은 더욱 달랐다. 눈앞에 거대한 파도가 일렁거리는 듯하다


나는 거실   전망 좋은 자리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바람의 유희를 관전하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바람은  멜로디일 뿐 그 선율에 맞춰 춤을 추는 건 나무들이었다.  방금까지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청하던 내가 지금은 잠을 잊고 자연의 웅장한 무대를 감상하는  관객이 되었다.


침과 주사, 약, 물리치료, 이런 것들이 지난 두 어달 동안 나를 흔든 바람이었다. 아픈 허리는 완쾌는 아니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유연해졌다. 이제 일상생활을 해도 무리가 없겠다 싶어 오빠네와 친구부부를 불러 함께 제주도로 왔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다. 비행기로 겨우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일 뿐인데 이국의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곳,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낯선 언어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내 나라에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수년 전 제주에 왔을 때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가  지금 바로 이곳이다. 서귀포에 위치한 펜션은 넓고 깔끔하고 아늑했으며 무엇보다도 편백나무로 둘러쳐진 울타리가 뒷 숲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연 속에 있는 별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후로도 제주에 올 때마다 나는 친척집을 찾아오듯 지금 이곳 펜션으로 오곤 하였다.


제주는 계절마다 다른 느낌이 있지만 12월의 제주는 계절감이 모호하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잎은 가을을 품고 있고 언덕 위에 쑥부쟁이와 제비꽃, 꽃봉오리가 맺힌 수선화와 유채꽃 군락은 봄을 품고 있다. 가을과 봄을 동시에 연출하는 이곳 제주, 하지만  어디서나 보이는 한라산 정상의 하얀 눈이 지금은 겨울이라고 말한다.


올 겨울은 유난히 따뜻하다. 영상을 웃도는 날씨가 계속되면서 제주는 초여름 날씨였다. 잔디 위에서 공을 치다가 웃옷을 벗어 걸어두는 사람들이 많다.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마지막 날인 어제는 비가 내렸다. 여행자들에게 날씨는 또 하나의 행운이다.


비 오는 날엔 무엇을 할까, 노천탕이 있는 온천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운동을 목적으로 이곳에 왔기 때문에 일주일 중 하루는 비를 핑계 삼아 몸을 쉬어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가운 빗방울을 얼굴에 맞으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려니 또 다른 행복이 찾아온다.


여행의 맛은 기대하지 않았을 때 불현듯 찾아오는 데 있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피로를 녹여낸 오늘 하루도 감사한데 한 밤중, 바람의 유희가 또 나를 감동시킬 줄이야...,


흔들리는 삼나무를 바라보며 불꽃의 터치로 바람을 그린 고흐를 생각했고 웅장하고 열정적인 바람의 소리를 느끼며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을 떠올렸다. 그리곤 팝페라가수 임형주가 부른 '천 개의 바람이 되어'에 이르러서는 숙연해지기도 했다.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나는 두려움보다 자연의 힘에 순응하는 자연의 몸짓,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다.


제주의 밤, 바람이  이번 여행의 가장 정점이 될 줄 몰랐다. 삶도 그렇겠지, 늘 달콤하고 행복하기만 하면 재미없을 거야. 때론 아프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면서 저 나무들처럼 살아내야 하는  진실한 삶일지도 몰라,


지체한 잠이 돌아오려나 보다. 이어폰 속 임형주의 노래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내 사진  앞에서  울지 말아요

나는 지금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로  

자유롭게 날고 있죠

.....

                      (천 개의 바람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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