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을 다녀와서
설 연휴 동안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다. 마치 정전이 되면 모든 가전제품이 올스톱 하듯 헬스장도 대형서점도 도서관도 동네 카페도 내가 갈만한 곳은 모두 휴무상태다. 어딘가에 나처럼 연휴 동안에 여가시간을 즐기려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검색을 해봤다. 극장과 고궁은 패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대형 쇼핑센터가 오픈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붐비는 곳은 싫다. 한 곳이 눈에 띈다. 서소문에 있는 박물관이 개관했다. 정확하게는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이다.
신유박해부터 병인박해까지 순교한 성인들을 기리는 천주교 성지인 이곳은 카톨릭 신자가 아니라도 종교를 떠나 누구라도 한번 다녀가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볼 때는 넓은 공원으로만 보였던 이곳을 층계가 아닌 비스듬한 비탈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마주하는 건물의 웅장함에 제일 먼저 놀란다. 하늘로만 솟구쳐서 빌딩숲을 이루는 도시건물과 달리 땅 아래에 지어진 건물이 막힘없이 트이고 넓으며 밝다는 것에 감동한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건물에서 느꼈던 건축예술의 웅장함을 이곳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핍박의 역사가 깃든 성지인 만큼 전시된 조형물과 조각, 공예품등 미술작품들은 생명을 걸고 지킨 44인 성인의 신념이 이식되어 있는 듯하였다. 특히 하늘광장에 세워진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보면서는 독일여행 중 아우슈비츠 감옥에 들렀을 때와 같은 뭉클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기차의 무게와 레일에 긁힌 상처, 기름때로 침잠된 침목을 재료로, 성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만든 작품은 그 위로 보이는 정사각형 하늘의 구름조차 작품에 의미를 더 해 주는 것 같았다.
조선시대 서소문은 당시 한양의 대표적 시장으로 상업활동의 중심공간이었으며 백성들의 활발한 상행위가 이뤄지던 곳이었다. 서민들의 삶의 장소였던 이곳이 죽음의 장소와도 맞물렸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소문은 조선시대 공식 참형장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죄인을 처형한 뒤 서소문 사거리에 전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죄의 대가를 알게 한 것이다. 종교를 빌미로 박해받던 천주교도들도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역사관의 지상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마른 갈대가 서걱거리는 서소문공원에서 나는 뜬금없이 반가운 소리를 들었다.
"땡 땡 땡"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기차가 지나가고 있다. 건널목의 차단기가 내려지고 종소리가 울린다. 자동차도 사람도 모두 멈춰 선 풍경. 그 옛날의 것이라곤 고궁밖에 없는 서울에서 나는 지금 세월 저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이 반갑고 왠지 고맙기까지 하였다.
오늘 하루의 나들이는 꽤 명상적이었다. 옛 자취를 훼손하지 않은 채 겸손하게 지어진 건축물도 그렇고 그곳에 전시된 작품들 역시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하였다.
월락제천 수상지진(月落在天 水上池盡)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서 다한다"
1801년 순교한 한국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베드로 신부가 남긴말이 양각으로 새겨진 벽을 바라보며 죽응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참 신앙인의 정신을 되새긴다.
정치색도 종교색도 과하면 거부감을 느낀다. 혹시라도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이 특정 종교인을 위한 곳이 아닐까 우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괜한 걱정이라는 걸 말해 주고 싶다. 역사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들은 누구라도 언제든지 와서 조용히 바라봐 주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