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분홍돼지
[너 막걸리 좋아한댔지? 인사동에 '분홍돼지'라고 맛있는 막걸리집 알아놨는데, 우리 주말에 거기 갈까? 수육이랑 막걸리가 맛있다더라!]
월드컵의 만남 이후, 우리는 메신저로 연락을 지속했다. 막걸리를 좋아한다는 내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 새 맛집까지 검색해 둔 것을 보니, K도 마음이 있는 걸까? 또다시 내 입가엔 배실배실 미소가 떠올랐다.
인사동은 나에게 꽤나 의미 있는 장소이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난 처음 서울 땅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서울의 그 어떤 것 보다도 한강과 지하철을 좋아라 했다. 어린 시절, 만화영화 영심이를 보며, 한강 다리 위로 지나는 지하철의 장면을 동경했었다. 어른이 되면 꼭 서울에 살고 싶어서 서울로 오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서울 생활을 시작하며, 인사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 우리 부모님은 학비와 생활비, 용돈까지 모두 지원해 주셨다. 혼자 서울살이 하는 딸이 안쓰러워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반대하는 분들이었다. 그래서 몰래 아르바이트를 했다.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무조건 인사동으로 향했다. 인사동만이 가진 고즈넉한 분위기가 그리 좋았다.
그런 인사동에서 K와 만났다. 그동안은 동아리 친구들과의 만남이라는 핑계가 있었지만 이번엔 단 둘이 잡은 약속이다. 너도 나도 모두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누가 봐도 썸이다 이건.
인사동 초입에 있는 금강제화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다 보니 저 멀리 서 있는 K가 보인다. 낯설다 정말.
-쿵쿵쿵
심장이 또 울렁인다. 마음을 가다듬고 얼굴에 미소를 드리운 채 천천히 걸어가 본다.
인사동은 여전하다. 관광객들이 줄지어 걸어가고, 우리도 그 뒤를 따라 어색한 거리를 둔 채 걸었다.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호떡집에서 뜨거운 호떡 하나씩을 사 먹었다.
아르바이트하던 가게 앞을 지나며 올려다보니 간판 이름이 바뀌었다. 하긴, 세월이 많이 흘렀지.
분홍돼지라는 식당은 인사동 쌈짓길 안에 있었다. 구불구불 경사진 길을 올라 식당으로 들어가 통유리 옆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이내 뽀얀 막걸리 한 잔씩을 따라 마셨다.
“짠-!”
알싸한 알코올 기운이 입안을 지나 목을 넘어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K를 바라보았다.
우리, 이제 어쩌지?
넌 무슨 생각이니?
난 이 감정에 솔직할 수 있을까?
“우리 이 참에 막걸리 맛집 투어 해볼까?”
“재미있을 것 같아!”
이후에도 K와 난 주말이면 서울에 있는 막걸리 맛집을 함께 찾아다녔다. 월드컵이라는 핑계가 사라진 후 새롭게 찾아낸 만남의 이유였다. 다행히 2010년 당시, 한참 막걸리 붐이 일면서 수제 생막걸리를 파는 가게들이 많았는데, 진짜 막걸리가 너무 맛있었다!
그 여름, 어색하던 우리의 관계는 막걸리와 함께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