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같이 보자!
2010년 6월 7일 월요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성산동
고단한 하루였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니 벌써 아홉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다. 회사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긴 했지만 살짝 배가 고팠다. 뭘 좀 먹어볼까 싶어 냉장고를 열었지만 저녁을 먹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지금 먹으면 내일 후회하겠지. 이내 단념하고는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시며 TV 앞에 앉았다.
제법 더워진 날씨에 목이 말랐는지 시원하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맥주의 넘김이 정말 짜릿하다. 노곤해진 몸을 소파 깊숙이 구겨 넣었다.
난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내향적인 성격이었지만, 몇 년간 회사생활을 하면서 외향적인 성격이 훨씬 이득임을 깨닫게 된 뒤로는 본성을 숨기고 발랄한 모습의 가면을 쓴 채 생활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늦은 저녁 이렇게 TV를 켜 놓고 앉아 멍 때리며 쉬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 종일 시달리던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는 순간이다.
아홉 시 뉴스에서는 곧 치러질 남아공 월드컵의 본선 조별리그 경기에 대한 분석이 한참이었다. 월드컵이란 말을 들으니 문득 2002년 한일월드컵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월드컵이 온 나라가 들썩일 만큼 큰 관심사였다. 나 역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마다 광화문광장에 나가 목이 터져라 응원하며 월드컵을 즐기곤 했다.
'이번 주 토요일에 그리스랑 축구하는구나. 이번 월드컵은 누가 우승하려나?'
어느 나라가 우승을 하게 될지 궁금해하며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려는데, 문자 알람이 울렸다. 몸을 돌려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같이 맥주 마시며 월드컵 볼까? 12일 토요일 저녁 7시 영등포역 샤브샤브, 참석여부 회신 바람]
동아리 단체 문자 알림이다. 반복되는 하루 일과에 조금 무료하다 싶은 요즘이었는데,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이라니 꽤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오호, 축구는 역시 같이 봐야 제맛이지! 오랜만에 애들 얼굴이나 볼 겸 나가봐야겠다!'
참석을 알리는 문자를 보냈다. 그러고 보니 동아리 친구들과 꽤 오랜만에 잡은 약속이다. 많이들 나올까?
2010년 6월 12일 토요일 저녁
서울, 영등포
누가 나올까 기대하며 일찌감치 약속 장소로 들어섰다. 단체 약속이 늘 그렇듯 약속 시간이 지났지만 역시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출입문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곧 들어올 친구들을 기다렸다.
드르륵.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K가 들어왔다. 나를 발견한 K는 손을 번쩍 들어 인사를 하고는 환한 미소와 함께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앞자리 의자에 앉으며 인사를 건넨다.
"일찍 왔네! 잘 지냈어? 우리 진짜 오랜만이지?"
"...... 아, 난 뭐 그냥 회사 다니지 뭐.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내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오랜만에 만난 K는 적당히 컬이 있는 머리칼에 은은한 회색의 캐주얼한 재킷과 면바지를 입어 훤칠한 키가 돋보였다.
'어라, K가 이라 잘생겼었나?'
고등학교 2학년, 열여덟 살에 학교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알고 지낸 지 벌써 10년이 넘어가는 오랜 친구다. 긴 시간 동안 K를 만나 오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던 나는 꽤나 당황스러웠다. 앞에 앉은 남자 사람 친구 K가 남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애써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뭐야! 나 왜 이래? 너무 오래 연애를 쉬었나? 얘를 보고 왜 심장이 뛰는 거야. 이런 이런. 침착하지 침착해.'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K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오늘 너랑 나랑 H랑 셋이 나오기로 했는데, H는 좀 늦는다네. 우리 먼저 먹고 있자."
"그, 그래. 배고픈데 얼른 주문하자."
샤브샤브 2인분을 주문하니 기다렸다는 듯 육수와 야채가 세팅된다. 금세 보글보글 육수가 끓기 시작하자 K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고기와 야채를 육수에 넣는다. 살짝 익은 고기 한 점을 따끈한 국물과 함께 입에 넣었다.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회사는 다닐 만 해? 꽤 오래 다녔지?"
"그렇지 뭐. 이 회사 벌써 5년이나 다녔다!"
"이야~ 사회 선배님이네. 난 일 시작한 지 한 달 됐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얘기를 나누자 잠시나마 어색했던 기류가 사라졌다.
"그래, 요새 연애는 잘 되고? 난 여자 친구 없는지 오래야."
"나도 지금 남자 친구 없어. 헤어진 지 좀 되었지!"
난 당시 남자 친구와 헤어졌었다. 2년가량 만나던 전 남자 친구는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사귀어본 사람이다. 처음 겪는 이별에 꽤나 힘들었다. 낮엔 식욕이 없어 식사를 제대로 못 했고 저녁엔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한강 공원을 한 시간씩 달리곤 했다. 덕분에 한 달 동안 살이 8kg이나 빠졌다. 나름 예쁘장했던 얼굴은 살이 빠지며 선이 더욱 고와졌다. 이별 후유증에서 간신히 벗어나 거울 속 모습을 보았을 때, 달라진 그 모습이 꽤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K가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여자 친구는 내 오랜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K와 J는 동아리 내 오랜 공식 커플이었다. 둘이 예쁘게 만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래서 둘이 헤어졌다는 J의 연락을 받고 많이 놀랐었다. 이별 얘기를 전하던 J와 함께 이태원에서 늦은 밤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J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을 했다.
"넌 J랑 헤어지고 다른 사람 안 만나는 거야? J 얼마 전에 결혼한 거 알지? 마음 이상하지 않아?"
"하하하, 뭐... 좀 이상하긴 하더라. 서로 잘 살기를 바라 줘야겠지! 자자, 한잔 하자!"
K와 함께 소주 한 잔을 비웠다. 오늘 함께 만나기로 했던 H는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치킨 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도착했다. 그 덕분에 난 K와 오롯이 둘만의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치킨집은 월드컵의 열기로 시끌벅적했다. 구석자리에 자리를 잡은 우리 셋은 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야~ 이게 얼마만이야. 반갑다 얘들아. 늦어서 미안. 요새 왜 이리 일이 많은지, 내가 아주 살 수가 없다!!" 뒤늦게 도착한 H가 엄살을 부리며 이야기를 주도해나간다.
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만난 세 사람은 경기는 뒷전이었고, 오랜 친구들과의 대화에 조금씩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H는 눈치챘을까? K와 나 사이에 흐르던 그 묘한 기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