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옷 입는 재미를 알아버렸다. 예전에도 옷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지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전에는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기 위해 급급했던 것 같다. 적당히 남들과 비슷하게 입어야 촌스러워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름(나름이 아닌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로서 보여지는 모습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옷 입는 일이란 조금은 벅찬 일이었다. 끊임없이 사회적인 틀에 나를 껴 맞추고자 하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옷을 입는 게 진정으로 즐거워졌다. 매일 밤 나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어떻게 옷을 코디할지 연구한다. 마치 실험실에서 분주히 돌아다니는 과학자처럼 가설을 세우고 - 이렇게 입으면 어울릴 것이다 - 실험을 하고, - 마구 입어 본다 - , 변인을 통제하고 - 난 이 바지는 꼭 입어야겠으니 바지에 맞는 상의를 고르겠어. , 가설을 수정하고 - 뭐야, 영 아닌데? 다른 거 입어보자 - , 결론을 내린다. 전에는 옷을 입었다 벗는 게 그렇게 귀찮았는데 지금은 흥미롭다. 오호라, 전에는 이렇게 입을 생각을 못했는데 이것도 괜찮네. 이런 스타일은 내 분위기와 맞지 않는 것 같네. 등등 다양한 생각을 하며 여러 시도를 해보니 꽤 즐겁다.
옷을 이렇게 저렇게 조합하다 보니 컬러에도 욕심이 생겼다. 톤이 서로 비슷한 옷에 쌈박한 색으로 포인트를 주면 딱 괜찮겠네, 싶어지는 것이다. 전에는 튀는 색깔의 아이템이 부담스러웠는데 이젠 편하게 느껴진다. 쨍한 초록색 운동화가 생각보다 많은 색깔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구입한 지 1년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 괜히 샀나 싶었던 특이한 옷도 잘 매치하니 센스 있어 보인다는 것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더 과감해지기로 했다. 평소 컨버스 하이를 좋아했는데 검은색만 있는 게 좀 아쉬웠다. 그래서 포인트를 줄 겸 쨍한 핑크색 컨버스 척테일러를 질렀다. 택배가 오자마자 박스를 열어보고 조금은 걱정했다. 생각보다 너무 튀는데? 하지만 심심한 컬러들의 옷 아래에 컨버스를 신으니 이게 무슨 일이야. 벚꽃 피는 이 봄에 찰떡이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컬러감 때문에 그냥 앉아서 신발만 봐도 기분이 좋다. 운동장 나가는 날에 신고 갔더니 애들이 색깔 예쁘다고 난리다. 이렇게 뿌듯할 수가. 항상 남들과 비슷함을 추구했는데, 이 컨버스는 거리를 아무리 싸돌아 다녀도 똑같은 색상을 신은 사람이 없다. 나만의 특별한 개성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다.
멋진 패션은 단순한 허영심의 산물이 아니다. 내가 어떤 모습일 때 가장 매력적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또한 나의 장점과 단점을 완벽히 알고 있으며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 능력이다.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무리해서 입으려다 오히려 있는 매력도 가리는 실수를 하지 않는, 그런 현명함이 필요하다. 인생이랑 비슷하다. 나를 잘 알고 있으면 인생이 훨씬 수월해진다. 물고기는 물에 사는 게 어울리고, 원숭이는 나무를 타는 게 어울리듯 나도 나 자신의 본질을 알아줘야 쓸데없는 비교의 늪에서 시간 낭비하지 않는다. 그래서 옷 입는 것은 철학적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가지고 있는 본질-두 가지를 잘 조율해서 멋진 나만의 코디를 완성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한쪽에 치우치면 어딘가 어색하고 아빠 양복 입은 것 마냥 되니까 주의해야 한다. tv 속 연예인이 입은 옷을 예쁘다고 따라 샀다가 거울 속 내 모습에 실망하는 것처럼 (그게 내가 못났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남들 하는 게 멋져 보인다고 그대로 따라 하다간 괜히 돈 낭비만 하게 된다. 남들 가는 길에 생각 없이 따라가다간 내 인생에 남는 게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그러니 옷을 입는다는 것은 중용이요, 적절한 절제요, 내 욕망의 현명한 조율 능력이다.
화려하든 수수하든 그건 상관없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을 좀 더 뚜렷하게 살릴 수 있다면, 그리고 내딛는 걸음마다 자신 있어진다면 난 그걸로 옷의 소명은 다했다고 본다. 분홍 컨버스를 신고 당차게 거리를 걷는 내 모습 - 그건 내가 추구하는 진정한 내 자아의 모습이니 더 좋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봄을 맞아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하나 구해 당당히 거리를 활보해 보기를 바란다. 괴로웠던 아침과 출근길이 꽤 즐거워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