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사 열 번째 이야기 : 풍요로운 사진에 대하여
지난 익선동에 이어 굳이 '이상의 집'을 출사 장소로 선택한 까닭은 학창시절 전공과 연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학창작에 기웃거려 관심이 많았다. 학사학위에 그쳐 문외한과 다름이 없으므로 깊이 알지 못한다. 작품만 여럿 읽고 이상의 시세계에 대한 논문을 선배로부터 받아 읽었을 뿐.
그 당시는 학자로서 자질이 없다는 판단에 창작에 집중해 딱 '문학청년' 선에서 그쳤다. 흔히 대학문학상을 받고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부터 3대 문예지 등의 최종심과 본심에 이름만 올리는 경우다.
이쯤되면 교수님의 응원 메시지와 함께 대학원 입학 권유를 받는다. 최소 생계비는 제공한다는 제안인데 더 이상 골방은 싫었으므로 사회로 뛰쳐나왔다. (재능도 없다는 판단이 앞섰다)
이제 시인을 다소 객관적인 시선에서 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와서 정리해보니 문득 대학문학상 수상작 중 하나가 떠오른다. 무엇보다 김민정 시인이 당시 심사위원이라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제37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 닭꼬치>, 계명대신문, 2017
제37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 심사평 (김민정 님)
오래전 일로 자랑거리도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공개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시간에 도착해 이상의 집은 오픈 전이었다. 시간이 남아 인근 한옥마을에 들르기로 했다. 익선동과 달리 사람이 없어 한적했다. 골목을 걷다 대화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모여 다과를 곁들인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오간다. 먼 훗날, 배우는 자세로 품위를 갖추고 싶다 생각하며 다시 이상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상의 집에 들어서니 도슨트로 보이는 사람이 안내를 해주었다. 시인 이상의 연혁부터 각종 문학 작품, 그리고 이상의 집에 대한 내력까지 친절히 설명해줘 관람이 수월했다. 사진 촬영도 자유로워 좋았다. 관련 영상 시청도 가능했지만 관람객이 몰려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충분히 둘러보고 나서 도슨트 역할을 하던 그의 이력을 물어봤다. 관련 기관에서 나온 직원이었다. 문학 전공자는 아니지만 시인 이상에 대한 매력을 느껴 일을 자처하고 있단다.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발걸음을 옮겼다.
시인을 흠모해 도슨트에 자원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가장 인상 깊은 시집이 떠오른다. 물론 우리나라 시에 있어 대가는 많지만 나에게 박준 1시집은 특별하다. 소설에서 시 창작을 꿈꾸게 한 시인이다. 1시집은 몇 번이고 읽었다.
고시원 생활 중에 읽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는 문장에 힘을 얻었다. 또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 속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는 문장도 좋아한다.
이 외에 큰 관심을 가진 시집은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다. 박준 1시집을 비롯해 이 시집도 꽤 자주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외 시집은 공부를 위해 억지로 읽은 감이 있긴 하다.
상기 시인의 2시집 등에 대한 판단은 어렵다. 이미 오래 전 일이고, 더 이상 마음에 시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시 읽어도, 좋다.
경희궁 흥화문(興化門) 촬영에 앞서 상사에게 배운 것을 떠올렸다. 역광에서 F값을 조정하거나 (조리개를 닫고) 플래시를 활용한다. 이에 한번 역광 촬영을 시도했으나 별 소득은 없어 다음을 기약했다. 또한 지붕의 유려한 곡선을 활용해 여러 사진을 담기 위해 힘썼다.
인적이 드물어 출사와는 별개로 한적한 곳에서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초여름 오후에 불어오는 바람이 잎사귀를 흔들면 그 소리가 곳곳에서 울리는 듯 했다. 지난 문래동 출사 이후 오늘의 출사도 기진맥진한 채로 끝났다는 생각에 허탈했다. 그러나 분명 지금 하나하나 담고 있는 정경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전문 사진가가 되려는 게 아니다. 나만의 갤러리를 오픈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앞으로 풍요로운 인생을 누리길 바라며 조금 시간을 낸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왔다.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나는 한옥마을의 독서모임을 떠올리며 그 날의 출사를 마쳤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