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1. 한 걸음씩 나아가기

Leon – Villar de Mazarife

by 비아루나 Via Luna

밤새 옆 침대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깼지만,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바게트와 바나나로 간단히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설 채비를 하는데, 누군가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었다. 동양인 여성은 알고 보니 미국에 사는 한국 교포였다.


“한국 사람을 순례길에서 처음 봤어요”

그녀는 마치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아이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해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아보려 한다며, 쉰 번째 생일을 기념해 카미노를 걷는 중이라 했다.




순례길 가이드북에 밑줄을 수없이 그어온 그녀는 레온의 건물들에 얽힌 이야기를 줄줄이 풀어냈다. 아줌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레온을 떠나기 전, 아줌마와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첨탑 아래, 수백 년 동안 빛을 품어온 스테인드글라스가 벽과 천장을 물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기도와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공간에서, 빛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성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 앞에 서 있으니 신을 찾지 않더라도 ‘무언가 더 큰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길 위에서 경험하는 고요함과도 닮은 감각이었다. 그렇게 마음속에 잔잔한 울림을 품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아줌마는 삔 발목 때문에 오늘은 쉬엄쉬엄 갈 계획이라고 했다. 아줌마는 옛 순례객들은 짐이 여분의 신발 한 켤레뿐이었다고 했다. 옛 순례자들은 봇짐 하나의 의지해 자연에서 먹을 것을 얻고, 드물게 마주치는 인가에서 도움을 받으며 몇 달이고 길을 걸었다. 누군가 수백 년 전에도 걸었을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면 설렘과 숙연함이 함께 밀려들었다. 우리는 레온의 작은 바에서 커피를 마시고 아줌마는 조금 더 짧은 도로 옆 길로 나는 좀 더 먼 한적한 길을 따라 각자 걷기 시작했다.


한적한 시골길이 끝없이 펼쳐지고, 오직 내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를 깨고 있었다.

어제 다니엘이 보낸 이메일 중에 “ I feel strangely calm and strong”이라는 구절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바르셀로나에 돌아간 그가 회사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함께 나도 이 길의 끝에서 그런 부드럽고 단단한 마음을 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흡에 집중하며 한 발자국씩, 몸의 감각과 햇살이 가득한 대기를 느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어떤 조화로운 리듬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평화로운 에너지가 나를 감쌌다. 살아가며 나와 상관없는 많은 잡념 속에 얼마나 자주 나를 내버려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요 며칠간 평화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Caza Romana에서 내가 신을 만난 것인지 깊은 내면의 나의 일부를 만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날 이후부터 마음이 많이 가벼워지고 두려움이 옅어지고 있다.

삶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미지 속에 내가 완전히 홀로 던져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 혹은 어떤 자연의 섭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나는 조금씩 더 평화로워지고 강해지고 있다.


마지막 마을에 도착하기 전 한적한 밀밭 가운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십 분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롭고 그대로 충분하게 느껴진다. 나는 좀 더 느리게 걷는 법, 기다리는 법, 감사하는 법을 이 길에서 배우고 있다. 길을 걷기 시작할 때 날파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던 내가 이제는 내 안경을 향해 돌진하는 파리도 훠이 쫓아내고 그냥 무심히 걷는다.


오늘 내가 묶는 알베르게에는 조그만 수영장이 딸려 있었다. 영어 교사로 한국에 체류한 적이 있다는 캐나다 아줌마 안젤라랑 한참 동안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수다를 떨었다. 안젤라는 10년 전에 셜리 맥클라인이 쓴 글을 읽고 카미노를 걸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녀는 한국에서 4년을 살았는데 서울, 진해, 창원, 제주까지 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오늘 방을 함께 쓰게 된 덴마크에서 온 순례객은 아이가 생기지 않아 이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걷다 보면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있다. 인생의 모든 일들에 이유나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우리의 태도야말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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