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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마니 Dec 11. 2023

호구라도 오구오구

불안정 애착에서 안정애착으로의 긴 여정

진상이 호구를 알아본다



'성인 애착'을 주제로 심리 교육 강의를 할 때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사람의 속성을 일컫기도 하고,

우리 주변에 어디에서건 볼법한 커플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혹은 주변에서 찾지 말고 당신이 '진상'은 아닌지 생각해보라 했을 때는 깔깔 웃는 분들도 많았다.

우리는 하루하루 '갓생'을 살고 있고, '홀로서기', '경제적 자유'를 꿈꾸며 살아가지만 이 모든 것들은 안정적인 관계가 뒷받침이 되지 않았을 경우 더이상 의미도 쓸모도 없게 느껴질 수 있다.

관계에 대한 이슈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도 평생 우리가 안고 가야 할 숙제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전 생애적으로 관계는 숙명이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요건이다. 그렇게 중요한 만큼 스트레스와 갖은 마음고생을 동반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성인애착 유형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안정형, 불안정형, 회피형으로 분류를 한다.

더 세부적으로는 안정(비율이 더 높은)-불안정형, 불안정-안정형, 안정-회피형 등으로도 나눌 수 있다.

애착 이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보통 주 양육자 즉 부모와의 생애 최초의 관계 경험을 기반으로 전 생애에 걸쳐 대인관계를 맺는 방식이 무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질적 특성도 작용을 하지만 아주 단순하게 접근을 해보면 부모로부터 안정적이고 일관적 애정과 지지를 받아온 사람은 안정형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안정적으로 외부 세계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을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

조건적이고 비일관된 관심을 받는 경우 불안정 애착 유형으로 발달될 가능성이 높다. 부모의 애정이 일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유기에 대한 불안도가 상당히 높다.

방임적 태도를 보이는 부모를 둔 자식은 자신이 결국 사랑받지 못할 것이란 점을 뿌리 깊게 학습하면서 어차피 사랑받을 수 없음에 포기 듯한 태도를 보이는 회피형 애착 유형이 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회피 애착 유형과 불안정 애착 유형이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매혹당하는 이유, 하지만 결국 그들의 관계가 파괴적으로 되기 쉬운 이유는 꽤 알려진 이야기다.


불안정 유형의 사람들은 회피형 사람들의 다소 심드렁하고, 약간은 무미건조한 상태를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상태라고 느끼기 쉽다. (부모와는 달리)안정적으로 그리고 일관되게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싶은 것이다.

회피 애착형 사람의 입장에서 불안정형은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정서적 반응성이 높아 보인다. 마찬가지로 부모와의 관계와 달리 관심과 애정표현을 듬뿍 받으며 다시 없을 것 같은 생동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회피형의 기본 핵심신념은 '나는 결국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에 새기고 있기 때문에 버림받기 전에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 버릴 수 있다. 하지만 동굴로 들어간 모습을 보는 불안형은 견디지 못한다. 그들의 중심 불안이기도 한 유기 불안이 회피형으로부터 자극돼버린다. 회피형은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유지되어야 사랑받을 수 없다는 괴로운 사실을 인지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데 불안정형이 자꾸 회피형을 동굴에서 빠져나오게끔 자극을 한다. 자신의 유기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다행스럽게도 이 파국적인 애정 스토리 그리고 악순환의 관계 패턴은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상담 장면에서는 이를 '재양육'이라고 한다.

부모와 나누지 못한 안정적인 양육 경험을 일관된 온정적 관심과 존중을 바탕으로 타인과 새롭게 맺어나가 나의 반복되는 관계 패턴을 재정립하는 작업이다. 병증이 깊지 않은 수준일 때는 상담 장면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지 않아도 안정애착 유형의 사람과 깊은 관계를 약 5년 이상 맺을 때 안정형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나는 호구지만 남편은 진상이 아니다.


내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안 남편이 고민을 하다 내게 건넨 한 마디가 있다(그 땐 남편이 아니라 남자친구였다).


"아이고, 얼마나 애닳았을까"


깊이 놀란 동시에 뒤이어 따라오는 감동이 꽤 가슴 깊이 파고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경하게 떠오른다. 

한 번쯤 나올 법한 '그러지 말지..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왜 그랬어', '의심 안 해봤어?'라는 판단 섞인 말 한마디를 하지를 않았다.

그 때 알아차렸다. 남편은 따뜻한 사람이고, 안정형의 사람임이 확실하다는 것을.

꽤 심드렁하고 무뚝뚝한 나는 겉으로 별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참으로 고마웠다(여기서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불안정 애착 유형의 사람이다).


나는 늘 셀프 케어를 강조하는 사람이지만,

결국 타인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온기가 셀프케어를 할 에너지도 심어줌에 대해 부정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사람에겐 사람이 필요하다 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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