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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뉴 May 02. 2020

나는 왜 엄마한테만 짜증을 낼까

첫날부터 삐걱거린 여행의 시작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출국일이 왔다.

인천에서 런던까지 장장 12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히드로 공항에서 파리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밤은 사라져 있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투닥거리며 왜 엄마랑 유럽에 간다고 했을까 후회도 했다가, 그래도 함께여서 다행이라는 안심도 되었다가, 설레기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더 앞섰던 여행의 시작.


나 홀로 떠났어도 행여 뭐라도 빠뜨리지 않았을지 초조하고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지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엄마와의 여행은 친구와의 여행과 달리 둘이서 그 부담을 나눠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엄마 몫까지 2배의 부담을 짊어지는 거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더 무거웠다.  


그리고 그 부담감은 이내 엄마에게 향하는 짜증으로 표출되고 말았다.


나도 처음 가는 유럽이라 모르는 것 투성이인데 나는 다 안다는 듯 물어보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고, 몇 번 설명했는데도 또 물어보는 엄마에게 또 짜증을 냈고, 기내식으로 나온 고추장이 남았는데도 그건 유럽 가서 먹어야 한다며 고추장을 또 달라고 하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고, 그냥 많이 냈다.


다른 어르신이 같은 행동을 했으면 나는 분명 짜증 내지 않고 친절히 대해드렸을 텐데, 왜 유독 엄마에게만 짜증을 쉽게 내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엄마라서 그래도 되는 게 아니라 엄마라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짜증을 낼 때마다 내가 참 나쁜 사람인 것 같아 다음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어느새 또 짜증을 내고 있다. 


나는 나이도 있고 나름 효심도 있는 편이어서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도 깊은데 이상하게 엄마가 말을 걸면 밑에서부터 뭔가가 치밀어 올라온다. 이제 '내일모레도 아닌 내일' 마흔이 되는 데다 효심도 깊은 내가 왜 그러는 걸까.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사실 엉뚱한 말을 하는 엄마보다도 내가 더 이해가 안 간다. 아니라고 말하면 될 것을. 좋게 설명하면 될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그토록 예의 바르게 대하면서 정작 내 어머니한테만 이러는 이유를 나도 정말 모르겠다. 

-이석원, <보통의 존재> 


여행은 절친이랑 가면 절교해서 돌아오고 애인이랑 가면 헤어져서 돌아온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어온 터였다. 여행을 앞두고 '엄마랑 자유여행', '유럽 모녀 여행' 등의 키워드로 검색을 하며 이미 모녀 여행을 다녀온 경험자들의 생생한 후기를 읽으며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했다. 하지만 유럽에 도착하기도 전에 엄마에게 짜증을 내게 될 줄은 몰랐던 거다.


보통의 존재, 보통의 딸들은 다 이럴 거라고, 나만 이렇게 나쁜 딸 일리는 없다고 애써 합리화해보며,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엄마와의 장기 유럽여행에서 좋은, 즐거운, 행복한 추억만 만들어드리자는 다짐을 해보며, 그렇게 시작된 40일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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