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최종면접 탈락이라는 거대한 폭풍우가 지나가고 내게도 잔잔하고 평화로운 비행 일상이 찾아왔다. 감사하게도 날 유혹하는 공채가 오랜 기간 뜨지 않았다. 회사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김에 감사했다. 면접과 비행을 병행하느라 놓쳤을 많은 것들을 되돌아보며 다시 찬찬히 회사생활에 마음을 붙이기 시작했다.
두 번의 최종면접 탈락은 내 생각과 시선을 많이 바꿔주었다. 이 회사가 나를 선택해 준 데에는 내가 할 역할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좀 더 전문성을 기르고 내게 주어진 업무를 열심히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소중한 관계들이 점점 늘어나고 그 관계를 통해 배우는 것 또한 많아졌다. 승무원으로서 동료들과의 대화는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승무원이 되고 가장 좋다고 느꼈던 부분은 "내 시간이 많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승무원 라이프가 익숙해질 때면 시간이 많다는 이 장점을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3년 차 선배와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익숙한 업무의 반복이니 비행 3년 차가 되면 비행 자체에 대한 부담이나 스트레스는 크지 않지만, 비행 스케줄에 따라 훌쩍 가버린 시간을 깨달을 때마다 "뭘 했다고 3년이 지났지" 하는 허무함을 느낀다고 했다. 또 어떤 선배는 때가 되면 찍혀 나오는 스케줄, 그 12페이지의 스케줄이 우리의 1년이라는 생각에 시간이 너무 빨라 무섭다고도 했다.
왜 시간이 흐르는 게 싫고 허무하다 느껴지는지 한 번쯤은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직장을 다니기 전엔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들어가고 나서는 좋든 싫든 굴러가는 회사 안에서 사회생활을 터득하며 그 조직에 동화되어 선배들이 다져 놓은 뒤를 따라가게 된다.
스케줄에 맞춰 출근하고 상사의 비위를 맞추며, 달콤한 휴일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흘러버린 시간을 두고 자책하다 보면 다시 다가오는 출근 시간. 정처 없이 흐르는 시간에 그렇다 할 보람된 결과물이 남지 않는 생활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처럼 시간은 흘렀으나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을 때 사람들은 무료함에 빠지고 허무함을 느끼기 쉽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어떻게 시간을 쓰고 무엇을 해야 내가 가치 있게 행복을 느끼는지 그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경우가 많다.
팀 페리스 ⌜지금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Tribe of Mentors⌟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지출의 시기)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기댈 수 있는 ‘재정적 쿠션’을 만드는 것이다. 돈이 없으면 모든 것이 불안해진다. 수입이 있어야 창조적인 삶을 꿈꾸고 시도할 수 있다는 것.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해 돈을 벌고 인간의 다양한 모습에 대해 배운다는 태도를 갖는다면 한결 수입의 시기를 견디기가 쉬워질 것이다. 위험한 것은 수입도 아니고, 지출도 아닌 모호한 삶을 계속 사는 것이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맥주 한 캔 마시며 넷플릭스를 보고 실컷 웃고 떠든 후에 침대와 하나가 되어 뭉그적거린 후에 훌쩍 지나버린 시간을 보고 돌연 허무함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스케줄에 쫓아가기 급급해 건강이 안 좋아지고 회사 안에서 인간관계가 힘들어도 ‘이 정도면 만족해’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지 않은지. 누군가 내가 해보고 싶던 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잘나가는 모습을 보면 부러움을 느끼지는 않았는지. 순간일지언정 나도 내일부턴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을 하지는 않았는지.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시간을 재생산하는 기쁨’ ‘시간의 흐름이 결과물로 남는 소소한 기쁨’을 찬찬히 쌓아 나가보길 적극적으로 권한다.
내 안에는 꿈이 너무 많았다.
직장이 있다고 회사가 주는 돈을 받으며 여유롭게 쉬는 게 잘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하고 싶은 게 많아 늘 머릿속이 복잡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편곡도 하고 싶었고, 글도 쓰고 싶었다.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언제든 이직도 하고 싶었다.
"언제쯤 나는 Station(승무원이 체류하게 되는 해외)에서 Stay(편히 휴식)를 할 수 있을까"
라며 혼자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는 머릿속은 그렇게 복잡했을지언정 내 생활이 싫었던 건 전혀 아니었다는 점이다.
비행은 참 매력적인 일이었고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그 자체로 좋았다. 비행을 통해 많은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것에서부터 다양한 나라를 접할 수 있던 점. 해외에서 주어진 시간에 음악 작업을 하고 책 읽을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 내게 주어진 삶이 너무나 풍요롭다고 느끼기도 했다.
스테이션에 도착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시간까지 주어진 시간은 온전히 "날 위해 쓰는 시간"이었다. 물론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는 때도 있지만, 우선순위를 설정해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충분히 배려받 수 있었다. 이제 막 회사에 들어간 신입의 경우엔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 자체가 눈치 보일 수 있지만, 회사생활에 노련함이 생기게 되면 나만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나는 비행을 하며 책을 읽고 느낀 점이나 음악을 통해 나누고 싶은 많은 이야기를 연결해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꺼내는 방식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고영성∙신영준 ⌜일취월장⌟
“혁신을 추구하고 있는 너의 모든 시도는 옳다. 심지어 실패조차도 옳은 일이다. 모든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고, 발생하는 실패에는 그 누구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너에게 심지어 해줄 조언조차 없다. 내가 할 일은 더 많은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응원하는 것뿐이다.”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 ⌜일취월장⌟은 당시 최종탈락을 두 번 하고 너덜해진 마음에 위안을 주던 책이다. 스티브 잡스를 비롯해 실패의 아이콘이었던 4명의 인물의 이야기로 시작해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언제 어디서나 올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체화시키며 이겨내는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런 시간과 경험들을 통해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능력이 꽤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