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산책을 한다. 코로나로 강제 격리되다시피 지내면서 집 가까이에 녹지가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깨달았다. 지하철 역이 가까운 집을 역세권이라 해서 값도 비싸지만 요즘 같아서는 역이 가까운 것보다 녹지가 가까이 있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다. 걷다보니 자하철이 있어도 종종 걸어다닐 만큼 걷는 게 익숙하고 좋아졌다.
2월말 시작된 강제 휴강, 개강 연기, 폐강 알림이 이어졌다. 며칠 사이 반년치 강의가 사라졌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도 휴강한다거나 단축 강의가 좋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휴강이나 폐강은 일이 없다는 뜻이며 소득이 없다는 뜻이다. 처음엔 그래도 설마 싶었다. 그러나 일이 없는 날들이 석달이 넘었다.
"그렇게 걷다가 산티아고 순례하면 되겠다."
나갈 일 없어 갑갑해하는 내게 식구들은 격려하는 말인지, 나쁜 상황은 고운 말도 고깝게 들리게 한다.
다행이다.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하루가 다르게 녹색이 짙어지는 나무사이로 걸을 수 있으니. 집을 나서기 전에 창문으로 나무들의 우듬지를 내려다 본다.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 지는데, 녹색 사이사이의 흰색 점같은 것은 산딸나무꽃이다. 공원엔 봄부터 초여름까지 산수유, 목련을 시작으로 벚꽃, 살구꽃이 피었다 지고 이팝꽃잎이 눈처럼 날린다. 공원엔 구박받는 나무가 있다. 아까시 나무다. 구석진 곳에서 자라지만 공원 관리인들에게 걸리면 잘려나간다. 해마다 잘려지지 무섭게 다시 자라서 5월이면 어김없이 향기좋은 꽃을 피운다.
향기와 꿀을 주는 아까시나무가 구박받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아마도 무섭게 자라는 것과 키만큼이나 왕성하게 먿어가는 뿌리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예전엔 정부가 나서서 산림녹화 사업을 할 때 많이도 심었던 아까시나무인데, 그 때는 헐벗고 척박한 산을 빨리 푸르게 하는데는 아까시 나무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뿌리가 잘 벋어나가고, 돌보지 않아도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서였을 것이다. 관리하지 않으면 공원을 아까시나무가 점령할까. 아까시꽃을 볼 수 있도록 아직 잘려나가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코로나 때문에(덕분에) 공기가 맑아졌다는 얘기가 있다. 맑아진 공기 덕분인지 공원에 나무가 우거져서인지 새들이 많아졌다. 그동안은 어떤 새들이 있는지 눈여겨 보지 않았다. 나야말로 코로나 덕분에 시간이 많아져 산책을 즐기게 되면서 새들이 궁금해졌다. 이름이 궁금하고 그들의 생태도 궁금해졌다.우선 나는 요즘 새 소리를 구분해 들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고작 몇 가지 아는 아무새나 이름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모양을 비교하고 울음소리를 들어본다. 그림을 보고 소리를 들어봐도 정확히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도시에 사는 참새는 사람이 눈에 익어서인지 집앞 공원에 사는 참새는 사람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는다. 사람 때문에 날아가기 보다는 저희들 중의 한 마리가 먼저 날아오르면 나머지도 일제히 날아올랐다 내려앉고는 한다. 날아 올라서도 멀리 가지 않는다. 바로 옆 나무에 이파리처럼 붙어 있거나 고작 해봐야 두세 그루 옆 나무로 날아간다.
참새 소리와 박새 소리를 구분하며 듣느라 맞은 편에서 오는 사람이 가까이 오도록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치려는데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오늘은 왜 혼자세요? 타로는?"
타로는 우리와 함께 18년을 살다 간 강아지다. 지난 해 늦은 여름 저 세상으로 간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종종 산책길에서 만나던 사람인데 그러고 보니 한동안 안 보였었다. 어디 다녀왔느냐 물으니 몸이 좀 안 좋아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고 한다. '사람 사이에서 받은 갈등을 이렇게 혼자 걸으며 풀어요.' 그는 혼잣말처럼 낮은 소리로 말하고 가던 길로 빠르게 지나갔다. 그의 말이 아니어도 붙잡고 말을 할 생각은 없다. 경험에 비추어 함께 걷기로 한 사람이 아니라면 산책길에서 만났다고 나란히 걷는 추천하지 않는다. 산책은 자기만의 속도가 있다. 나도 그걸 방해 받고 싶지 않다. 자신이 내향성인가 외향성인가를 구분하는 간단한 방법은 어디에서 힘을 얻는가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을 만나 함께 하는 것으로 에너지가 충전된다면 외향성이고 오히려 고갈된다고 느껴진다면 내향성이라고 한다. 사람 사이에서 한결같이 에너지가 채워지거나 고갈되지는 않지만 분명한 건 산책길에서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다.
비가 온 뒤 공원엔 지렁이가 많다. 그런 날을 대비해 공원 초입에서 긴 나무막대를 하나 숨겨놓고 있다. 첫째 공원 관리인 눈에 띄지 말아야 하고 둘째, 누군가 다른 사람이 집어가지 않게 하려면 나만 아는 곳에, 그러면서도 찾기 쉬운 곳에 숨겨 둔다. 가장 좋은 방법은 풀이 장하게 자란 곳에 꽂아 두는 것이다. 막대기로는 산책로로 잘못 길을 들었거나 혹은 길을 횡단하려다 지나는 사람에 밟힐 수도 있는 지렁이를 풀숲으로 집어던지는 데 사용한다. 길게 생긴 생물들은 아무리 이로운 것이라고 해도 징그럽다. 밟히는 건 더 징그럽다. 느리게 걸으며 나는 공원 생물에 집중하려 애쓴다.
우리집에서 10분 쯤 걸으면 한강이 나온다. 사흘 전에는 저녁무렵 한강에 나갔다가 비를 흠뻑 맞았다. 한강변에 오래 살다보니 냄새와 바람으로 날씨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비를 품은 바람 냄새가 있다. 그날도 짐작을 하고 우산을 들고 나가긴 했지만 우산으로 비를 다 가릴 수 없을 만큼 거칠게 내렸다. 한강둔치에는 군데군데 그늘막이 있다. 그늘마다 비를 피하느라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모두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비 긋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타로가 있었다면 나도 그늘막에 들렀을 것이다. 그 녀석은 물에 젖는 걸 싫어했다. 비 때문에 다른 날에 비해 산책을 일찍 접을 수밖에 없었다. (202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