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사투
명절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우리 집은 대부분 명절 음식도 패스하고 만다. 귀찮기도 하고 배달 음식을 편하게 시켜 먹을 수 있으니 굳이 손품 들여가며 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엄마도 나이가 드시니 이젠 음식 하는 걸 좋아할 리 만무하고 딸들이라고 해봤자 자기 손으로 반찬 하나 안 해 먹는 인간들이니 손수 나서서 할 리도 만무하다.
하지만 이번 명절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동생이 나서서 음식을 하겠다고 했다. 집안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 내 서열은 꼴등이라 한 살 차이 나는 언니라고 해도 맏이 자리는 일찌감치 동생한테 주었으므로 나는 순순히 따른다. 이건 마치 성경 속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 같군. 그렇다고 한들 난 에서처럼 장자의 자리를 내줬다고 화도 내지 않는다. 그런 거 다 가져가.
서로 좋아하는 음식을 선별해서 산적과 동그랑땡, 그리고 잡채를 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서 점심 전후까지 거의 반나절을 앉아서 전만 부쳤다. 온몸에 기름칠을 뒤집어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 짓을 결혼한 사람들은 시댁에 가서 매년마다 하는 것인가. 요즘엔 많이 달라졌다는 데 결혼한 지 15년이 훌쩍 넘은 친구는 여전히 꼼짝없이 시댁에 내려가 음식을 하는 걸 보면 달라졌다는 것도 케바케인 것 같다.
나는 고기를 더 선호하지만 동생은 햄을 더 좋아한다. 산적은 부치면서 거의 다 먹은 것 같다. 아니 음식 하는 사람 대부분은 기름 냄새 때문에 먹기도 싫다는데 왜 나는 먹으면 먹을수록 맛있는 거지?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가서 그만 좀 먹으라고 말렸다.
잡채는 엄마의 고유 영역이다. 잡채만큼은 엄마가 해주는 게 맛있다. 이번 잡채는 간은 잘 맞지만 다소 면이 많이 삶아져서 퍼졌다. 엄마도 나이가 드는 걸 느끼는 게 손맛이 예전과는 달리 왔다 갔다 한다. 그래도 맛있다. 엄마는 잡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는 명절 음식 안 하겠다고 했다. 엄마가 안 계셔도 우리가 이걸 할지 잘 모르겠다.
호불호 없는 동그랑땡. 반죽을 내가 해서 모양이 들쑥날쑥이다. 나는 성격이 급하고 손이 빠른 편이라 일은 후딱 하는데 섬세하지 못하고 덜렁대기 일쑤다. 동그랑땡은 어려서 큰집에 들락거렸을 때 많이 먹은 거라 먹을 때면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 큰집에선 꼭 녹두전도 같이 했는데 녹두전이 그렇게 맛이 있어서 야금야금 부엌에 나가 먹다가 혼난 적도 있었다. 녹두전을 가끔 해먹기도 하는데 어렸을 때 맛이 나진 않는다. 생각해 보면 맛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추억에 의해 왜곡되어 있는 것 같다.
기름진 음식을 모엣샹동 임페리얼 샴페인과 함께 마셨다. 선물로 들어왔는데 우리 집에선 나 말고 아무도 술을 안 마신다. 열 때부터 탄산감이 장난 아니다. 전과 함께 먹으니 딱 좋다. 다만 도수가 꽤 높아서 한 병을 혼자 다 마시고 나서 술에 취했다.
낮술은 부모도 못 알아본다는데 엄마 앞에서 재롱부리다가 등짝을 세게 한대 얻어맞고 방으로 들어와 그야말로 뻗었다. 술 마셔도 잠자는 버릇은 없는데 나이가 드니 취하면 무조건 뻗는구나. 웃긴 건 이 와인이 선물로 많이 주고받는 것인지 검색어 1순위가 가격이더라. 크큭. 어떻게 아냐고? 나도 검색해 봤거든.
또 다른 날, 원래 연말 케이크 만들려고 사둔 휘핑크림이 있어 충동적으로 케이크 만든다고 설레발쳤다. 하면서 알았다. 망했다는 걸. 머랭 치기 하다가 죽는 줄 알았다. 가뜩이나 오른쪽 팔에 통증이 있는데 미친 듯 머랭 치다가 팔이 아예 안 올라갔다. 머랭을 한 번만 친 것도 아니고 빵 만들 때도 쳐야 해서 두 번이나 쳤다. 욕이 절로 나왔다.
빵을 먼저 만들었는데 빵 만드는 건 이미 지난번에 올려서 사진은 따로 찍지 않았다. 급하게 만드니 잘 만들던 빵도 실패했다. 밑이 다 타고 원하는 만큼 부풀어 오르지도 않았다. (젠장) 그래도 급한 대로 휘핑크림에 설탕 넣고 머랭 쳐서 쫀쫀한 크림을 만들어 본다.
빵은 냉동실에 넣어서 급속 냉각시켰다. 식은 빵 위에 생크림을 동그랗게 발라서 대략 케이크 비슷한 모양이라도 내려고 했으나 빵 만들기도 실패해서 조각 케이크로 변경했다. 빵을 대충 잘라서 크림을 바르고 올려서 다시 크림을 발랐다.
.
.
.
.
.
.
.
.
.
.
.
.
.
.
.
(케이크가 궁금하겠지?)
음.. 뭔가 잘못됐다. 내가 원한 모양은 이게 아닌데...
데코 할 과일조차 냉장고에 없다. 블루베리나 딸기라도 사둘 걸. 올려놓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이럴 땐 먹지 않고 얼려뒀던 블루베리조차 안 보이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새해 케이크라고 엄마한테 먹기를 강요했다. 대부분 맛있다고 먹어주는 엄마가 먹는 도중에 이게 대체 무슨 맛이냐고 물었다. 잘 안 넘어간다고 해서 커피를 내려줘서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근데 왜 난 그런대로 먹을만했지? 진짜다. 맛있진 않아도 빵과 크림조합이니 괜찮잖아? 응?
이쯤 되니 내가 맛없다고 하면 얼마나 맛이 없는 건지 알겠지.
사진 찍는 게 너무 귀찮아서 언제까지 올리지 모르겠지만 요리하는 걸 정리하면서 알게 된 건 내가 손이 빠르고 닥치면 뭐든 하긴 한다는 거다.(여기엔 안 올렸지만 반찬 만들기도 해봤다.)
1월 내내 여행도 두 번이나 다녀오고 닥치는 대로 먹어서 살이 많이 쪘다. 물만 마셔도 살이 쪄서 내 몸이 무서울 정도다. 운동샘은 200회 나왔다고 편지도 써주고 선물도 줬는데 몸무게 변화가 하나도 없어서 민망할 지경이다. 200회 동안 계속 오르락내리락하기만 했을 뿐.
괜찮다. 아직 2월이라 2024년은 시작도 안 했다. 모두 알잖나. 3월부터 시작이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