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원미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면접이나 지인의 결혼식이 아니면 생전 입어 볼일 없는 정장 차림, 그것도 치마를 입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맨 얼굴에 안경 쓰고 다니던 걸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콘택트렌즈를 끼고 공들여 머리를 말고 화장을 했다. 제법 그럴듯해 보였지만 1시간을 투자한 것 치고 티가 나지 않았다.
집에서 나와 다시 1시간을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내 호텔에 가야 했다. 차라리 아는 사람 결혼식 같은 걸 가는 거였으면 이렇게 기분이 다운되지 않았을 텐데 말 그대로 일의 연장선 같은 느낌이었다. 당연했다. ‘차출’이었으니까.
“건전한 만남의 안전한 창구 마련을 통해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제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00시의 공문이 도착한 건 이주 전 즈음이었다. 말이 좋아 신청 권면이었지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는 여성의 머릿수를 어떻게든 맞추려는 강제적인 차출에 불과했다.
<커플을 찾아라!>는 몇 년 전부터 시의 ‘결혼장려팀’에서 진행하는 연례행사였다. 저출산에 대한 대응책으로 내놓은 것이 지자체마다 하는 청년 대상의 흔한 소개팅 프로그램 기획이었고 부랴부랴 결혼장려팀이 신설되었다. 해마다 매칭된 커플들 중에서 ‘아랍두부상’이니, ‘닉주디상’이니 하는 커플명을 정해 놓고 그해 베스트 커플을 뽑았다. 선정된 용역 업체에서 진행하는 이 행사의 매칭률은 항상 50%가 넘었지만 부풀려서 보고한다는 사실은 이미 내부에서 쉬쉬하고 있는 일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생각이 없이 무턱대고 결혼 안 한 25~39세 남녀를 뽑아서 만남을 주선하는 공식적인 자리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신청할 여성들은 지극히 적었다. 그러니 번번이 시청 각 부처와 보건소 등에서 자발적 신청이라는 이름 하에 강제적 차출로 머릿수를 메꾸는 데 급급했다. 차라리 나이라도 확 올려서 49세까지라고 하면 모를까 아직 한창인 20~30대 젊은 여성들이 굳이 그런 자리에 나올 이유가 없었다.
“김 주무관, 나가보지 그래? 올해 35세이라고 했나?”
팀장이 은근슬쩍 원미에게 공문을 내밀었다. 옆에 있던 다른 여성 주무관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올해는 너로구나. 보건소 소속 보건행정팀의 거의 막내였던 원미는 어안이 벙벙해져 종이를 들여다볼 뿐 뭐라고 말할 의욕도 잃었다.
“결혼 안 했잖아? 남자 친구 있어? 남친 있어도 하루 잠깐 나갔다 와. 바람 쐰다 생각하고. 한 해 가기 전에 남친 생기면 좋잖아. 평일 날인데 안 나와도 돼. 공가로 빼 줄게.”
“아유, 팀장님은. 아직 김 주무관님 30대예요. 그런데 나가기 싫을 걸요.”
“결혼하기 딱 좋을 나이지. 요즘 사람들이 늦게들 가서 그렇지 여자는 사실 30세만 넘어가도 많이 늦은 편이지.”
“어우, 팀장님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나 꼰대 같아? 꼰대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사실이니까.”
팀장의 말 한마디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야유가 들렸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어차피 팀에서 한 명은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적임자가 김원미 밖에 없다는 것. 이 행사는 일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혼도 하지 않고 남친도 없었지만 설령 있었다고 해도 출장 가듯 가야만 한다는 것을.
이 팀에서 결혼 안 한 여성 주무관은 원미 포함해서 두서너 명이나 있었지만 그중에서 원미의 나이가 가장 어렸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의 노처녀를 내보내는 것보다 막내인 35세 김원미를 내보내는 편이 낫겠다는 팀장의 결정인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전의 날이 오늘인 셈이었다. 호텔에서 진행되는 데다 스테이크도 나온다니 아무 생각 없이 스테이크 썰러 가자고 다짐했지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녀 30쌍이 모여서 몇 분씩 돌아가면서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숨이 막혔다. 게다가 원미는 당장 결혼 생각도, 연애 생각도 없었다. 연애야 아예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면서는 오롯이 혼자였고 옆에 누군가 없다고 해서 외로워 본 적도 없었다. 몇 년에 걸친 시험 준비 끝에 원하던 공무원이 되고 나서 이제야 조금씩 안정을 찾고 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물론, 코로나로 지난 2년 간은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다. 비상 체제에서 자기 생활이란 게 없어지고 매일 같이 살얼음 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간신히 숨통이 트였는데 갑자기 웬 미팅 프로그램 참여란 말인가.
팀장을 비롯한 결혼한 직원들은 이렇게 나갔다가 결혼이라도 하는 것 아니냐면서 결혼하면 냉장고를 해 줘야겠다는 둥, 이참에 커플 매칭 되어서 시의 마스코트가 되면 좋겠다는 둥, 웬만하면 도도하게 굴지 말고 커플 되어서 돌아오라는 둥 개소리를 시전 했다.
지자체의 소개팅 프로그램의 매칭률이 높은 건 곳곳에 원미처럼 스파이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지령을 받아 스며들어 적당히 커플이 되어 나온 동시에 끝나는 관계 말이다. 공무원의 대다수 행사와 기획들은 철저하게 보고서의 수치에 성공 여부가 좌우되는 것들이 많았다. 이 또한 여성 신청자 수가 훨씬 적기 때문에 벌어지는 웃픈 촌극이었다.
원미는 여기서 누굴 만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커플이 되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 마치 전쟁터에 나간 장군이 승전 소식을 안고 돌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적당한 사람을 골라 적당히 짝을 이뤄 나가야 했다.
<2024 커플을 찾아라!> 커다란 현수막이 호텔 세미나홀의 높은 상단에 걸려 있었다. 글씨 옆에는 남녀의 웨딩복 입은 일러스트와 핑크빛 하트가 날아다녔다. 행사 시작 전에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작년 베스트 커플이자 결혼 커플인 일명 ‘닉주디’ 커플의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닉주디는 애니메이션에서 따온 커플 명으로 남자는 늑대 캐릭터인 닉을 닮고, 여자는 토끼 캐릭터인 주디를 닮은 커플을 말한다. 암만 봐도 화면 속 커플에게서 닉주디 얼굴이 떠오르진 않았다.
“00시의 커플을 찾아라에서 진짜 운명을 만났어요. 사실 나이는 꽉 차고 일하느라 바빠서 어디 가서 사람을 만날지 몰랐는데 이렇게 좋은 행사에서 제 짝을 만났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올해 여러분 역시 그 주인공이 되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파이팅!”
“오빠는 제 이상형이었요. 한눈에 본 순간 알아봤어요. 아무런 기대 없이 나갔다가 만난 거라 더 드라마틱했던 거 같아요.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해서 꼭 인연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우리 서로 사랑해요!”
여자가 말 끝에 손으로 반쪽 하트를 만들자 남자가 나머지 하트를 만들어 붙였다. 원미는 우연히 고개를 들어 영상을 봤다가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진저리를 쳤다. 입장 순서를 기다려 접수하고 이름표와 행사 기념품 등을 손에 들었다. 본명으로 참여하는 게 아니라서 이름표에는 미리 신청해 둔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 이름이 쓰여 있었다.
원미가 신청했던 이름은 ‘흰둥이’였다. 짱구에 나오는 강아지 이름이었는데 막상 흰둥이라고 쓰인 이름표를 걸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쪽팔렸다. 검둥이, 누런둥이도 아닌 흰둥이라니. 인종차별주의자도 아니건만 막상 이름표를 목에 걸자 먼저 떠오른 건 그런 식의 연상이라 기가 막혔다. 짱구의 강아지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흰둥이처럼 보일 정도의 하얀 피부도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라푼젤이나 신데렐라 뭐 이런 디즈니 공주 이름을 할 걸 그랬다.
원미는 자신의 닉네임을 찾아 자리를 서성거렸다. 진행 스텝이 이름을 물었다.
“…흰, 흰둥…이요.”
원미가 작게 소리 내어 말하자 찰떡 같이 알아들은 스텝이 자리를 안내해 줬다. 원형 탁자에 고급스러운 벨벳 천이 깔린 위에 참여자들의 닉네임으로 된 명패가 놓여 있었다. 안내받은 자리에는 원미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흘긋 거리며 이름들을 확인하자 하츄핑3, 사와코, 엘사 그리고 심지어 우르슬라도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하츄핑은 옆에 3이 표시된 걸 보면 같은 이름이 여럿 있는 듯했다. 다른 건 알겠는데 사와코는 일본 이름인 건 알겠는데 대체 어디에 나온 이름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각자 자기가 정한 닉네임과 이미지가 비슷했다. 하츄핑은 정말 하츄핑대로 러블리하고 예쁘게 생겼고, 엘사는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우아한 면이 있었다. 우르슬라 역시 외모는 닮지 않았어도 치켜 올라간 눈매와 화통한 성격이 비슷해 보였다. 사와코는 알고 보니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인공이라고 했다. 잘 모르는 제게 일부러 찾아서 보여줬는데 검고 긴 머리카락과 커다란 눈망울이 비슷해 보였다. 원미는 자기만 흰둥이 같지 않아 민망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모두 흰둥이가 어디에 나오는 캐릭터인지 알고 있었다는 거다.
“난 미용실 원장님이 적극 추천했어요.”
우르슬라는 호탕하게 웃더니 원장님이 추천했다는 말로 우리를 빵 터지게 만들었다. 무슨 미스 코리아 대회 나가는 것도 아닌데 미용실 원장님이 추천했다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웃겨서 테이블은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진짜라니까. 나는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오늘 딱 내가 운명의 짝을 만나서 커플 돼 가지고 나가야지.”
“…전 그냥 남자하고 얘기한 적도 거의 없어서. 그냥 얘기하는 데 의의를 두려고.”
사와코의 말에 우르슬라가 어깨를 한 대 툭 치며 그런 마음 가짐으로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원미는 순간 우르슬라가 자신처럼 스파이로 참여한 것인지 잠깐 헷갈렸다.
“전… 그냥. 직장 상사가 나가 보라고 해서 왔어요.”
원미의 말에 엘사가 입꼬리 한쪽을 삐죽 올렸다.
“완전 개꼰대네. 무슨 요즘 세상에 상사가 이런 데 가라 마라 해요? 혹시 남친 있는지 없는지 막 물어보고 간섭하고 그래요?”
엘사의 말에 원미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 회사에 그런 새끼 한 명 있거든요. 남친 있는 애들한테 좀만 피곤해 보여도 어제 무리했냐고, 그래도 티는 내지 말라고 저질스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제가 뭐라고 하면 결혼도 안 한 노처녀는 끼어드는 거 아니라면서 나이 공격하고 지랄이고. 지는 나이 그렇게 처먹고 희롱하는 주제에.”
우르슬라가 사람 좋게 웃으며 엘사를 달랬다. 엘사는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입이 험했다. 평소에 쌓인 화가 많은 듯했다. 이상한 남자가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리고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와…. 근데 아무리 기대 없이 오긴 했는데 물 왜 이래요? 39세까지 아니었어요? 49세 어르신이 있어 보이는데.”
그새 주변 스캔까지 끝낸 건지 우르슬라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나둘씩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건너편 남자들의 면면은 원미가 보기엔 주변에서 흔히 보는 그 나이 대 직장에 다니는 남자들의 모습이었다. 어딘가 설레 보이기도 하지만 일에 대한 피로가 누적되어 영혼이 반 즈음 날아가 보이는 모습들. TV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을 여기서 찾으면 안 되겠지.
그나저나 아까부터 이상하게 머리가 아팠다. 홀에 들어선 이후부터 지끈거리더니 테이블에 앉은 순간 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잠깐 화장실로 자리를 옮겼으나 똑같았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스텝한테 받은 응급약을 먹었지만 소용없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어야 출근해서 팀장한테 할 말이라도 있을 텐데 큰일이었다. 자리로 돌아가자 그새 사회자가 나와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며 분위기를 풀고 있었다. 꽤 수위 높은 농담도 해가며 선을 아슬아슬하게 잘 탔다. 덕분에 모두들 왁자지껄 분위기가 풀어졌다.
1라운드는 10분 동안 한 명씩 돌아가며 대화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고 보니 여성들이 앉은자리 옆에는 한 개씩 빈 의자가 있었다. 왜 한 명씩 건너서 앉게 했는지 이유가 밝혀졌다. 건너편에 따로 앉아 있던 남성들이 마음에 드는 여성의 옆에 가서 대화하는 룰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스피드였다.
남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근히 신경 쓰이고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원미 역시 아무 생각이 없다가 제 옆자리에 가장 늦게 앉을까 봐 걱정됐다. 우왕좌왕하던 남자들이 한 명씩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일대 일 대화 방식이라 소외되는 여성은 없지만 맨 나중에 짝이 되면 가장 인기가 없다는 뜻이 되니 앉아 있는 여자들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원미의 옆에도 누군가 털썩 앉았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유난히 긴장한 얼굴에 땀구멍이 크게 보이긴 해도 인상이 나쁘진 않아 보였다.
“안녕하세요. 손명진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원미입니다.”
“저는 38세입니다. 하는 일은 컴퓨터 프론트엔드 엔지니어이고….”
“아, 저는 35세 이고 공…. 아니,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낭패였다. 따지고 보면 직업을 숨기라는 말은 안 했는데 공무원이라고 말하기가 지레 찔렸다. 그렇다고 미리 생각해 놓은 직업 하나 없었다.
“아….”
손명진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문제가 발생했다. 간신히 나아진 것 같던 두통은 이번엔 머리가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눈앞이 흐릿하더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인륜의 도리는 혼인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임금의 정사는 원녀와 광부를 없애는 것이 긴요하다. 혼인의 시기를 놓쳐 원한으로 울부짖으니 화평한 기운이 손상되고 나라에 가뭄이 극심하니 이에 각처의 소재지 관청은 한 날 한 시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원녀와 광부를 모이게 하여 속히 혼인의 시기를 당기도록 하십시오. 이는 인륜지대사로 나라의 흥망성쇠 또한 이에 달려 있는 것을 유념하십시오.>
한양에서 멀지 않은 고을 원님은 임금의 교지를 받들고 육방과 함께 원녀와 광부를 위한 중매 계획을 짜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섣달 그믐날 나례 때 맞춰 하자는 의견은 이방이 내어 놓았다. 이에 예산 문제로 호방의 질타가 이어졌으나 원님 역시 이방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나례 때 원녀 광부의 중매 행사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방의 아이디어는 나례 때 맞춰 쓰는 종이 가면 대신 원녀와 광부에게 맞는 가면을 제작하여 얼굴도 모른 채 담화를 나누게 하여 사람 됨됨이를 보고 판단하게 하자는 거였다. 몇 해 전부터 지속되는 가뭄으로 재정난에 허덕이는 판국에 그 비싼 가면을 무슨 수로 맞추자는 거냐고 호통치는 호방의 말에 이방은 재정난이야 가뭄이 해갈이 되면 해결될 일이므로 고을에 있는 원녀와 광부들을 혼인시켜 나라의 기운을 되찾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원님까지 나서서 그렇게 하자는 말에 호방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에 예방과 이방이 고을의 모든 원녀와 광부를 조사하여 섣달 그믐날에 벌이는 행사에 대한 명령을 각 집에 전달하였으며 고을 곳곳에 방을 붙였다.
가난한 양반집 딸인 경옥은 20살이 훌쩍 넘은 22살로 누가 봐도 원녀로 집안에서도 걱정거리였다. 하지만 경옥은 혼인에는 뜻이 없었다. 그것은 집안이 가난해서만은 아니었고 남자에 메여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것이 영 못 마땅했다. 어려서는 아무리 글을 읽고 쓸 줄 알아도 여성이란 이유로 과거를 치를 수도 없고 나라를 위해 뜻을 펼칠 수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었다.
돈이 없어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한 채 생원을 면치 못한 아버지와 하나밖에 없던 오라버니만 봐도 가난한 양반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오라버니는 두 해 전 비슷한 처지의 양반집 딸과 결혼하여 살림을 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자로 태어났다고 해도 뜻을 이루는 데는 돈이 필요했다. 가세가 하루가 다르게 기울어져 가는 집안에는 과거 급제가 아니라 급전이 필요했다. 경옥은 일찍부터 사리에 밝았다.
글을 쓰는 걸 좋아했던 경옥은 이야기를 지어 양반집을 돌아다니며 아녀자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지은 책을 읽어주었다. 아녀자들은 경옥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처음엔 한 푼 두 푼 모아주던 것이 어느 틈에 경옥의 다음 책을 기다리게 되었고 몸값도 비싸졌다.
경옥은 이야기를 짓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다. 남자라곤 아버지와 오라버니 말고 얘기를 나눈 적도 거의 없었는데 상상 속의 로맨스들이 줄줄 나왔다. 아녀자들은 경옥의 이야기한 줄에 감탄을 하고 또 다른 한 줄에 앓는 소리를 냈다. 수위는 점점 높아갔으나 딱 포옹과 얼굴을 쓰다듬는 것까지였다. 그다음은 아무리 상상해도 쓸 수가 없었다.
“경옥 언니, 그래서 그다음은? 보드라운 백옥 같은 피부 결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그다음은?”
한 구석에서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 새소리가 지저귀고 날이 밝으니 아침이 되었습니다.”
“엥? 어떻게 마음을 확인하고 안고만 끝난단 말이에요? 요, 주둥이 맞추는 입맞춤 정도는 해야지 되지 않아요?”
“어머, 서린이 너는 어찌 그리 잘 알아?”
“당연히… 해봤으니까?”
주위에서 까르르 거리며 웃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 입맞춤이라는 것은 어떤 느낌이야?”
전기수로 와 있는 것도 잊은 채 경옥은 침을 꿀꺽 삼키며 되물었다.
“에잇, 그거야… 설컹거리는 고기 살 씹어 먹는 느낌 밖에 더 났겠어.”
“어머, 못하는 소리가 없어.”
“미쳤나 봐.”
“진짜…? 그런 느낌이라고?”
입맞춤의 느낌이 그런 느낌이라니. 말도 안 됐다. 아직 혼인도 안 한 처자들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야유를 보냈다. 진사댁 막내딸 서린은 발랑 까져서 못하는 말이 없었다. 경옥은 흠흠, 잠시 흔들렸던 표정을 감추고 다음을 기약하며 책 읽는 것을 끝냈다.
경옥은 진사댁 집을 나서며 불안해졌다. 드러내 놓고야 못하겠지만 원하면 얼마든지 책쾌에게 음란한 패관잡서를 사다 읽을 수 있으니 이대로 가다간 제가 쓴 책을 찾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 봐도 입맞춤의 느낌은 상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기 살 느낌이라는 말에 다림방에라도 가서 돼지고기라도 사 와서 입술이라도 비벼봐야 하나 싶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는데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앞에 사람들이 서서 방이 붙은 걸 보고 있었다.
“허헛, 세상이 참 요사스럽다. 어찌 돌아가려고 원녀 광부들을 한데 붙여놓고 헛짓거리를 한대.”
“것도 하필 나례 때야. 매귀를 쫓아내는 날 저런단 말이야?”
“저거 봐. 그날은 난동 부리는 자들은 잡아 가둔다잖아. 특별히 만든 가면을 쓰고 참여하라는 거 보면 얼굴도 못 보고 짝을 맺는다는 것인데 허허, 희한하다.”
“이게 다 나라에 흉년이 드니 그런 것이지. 우리 고을만 해도 여태 혼인도 못한 원녀 광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하늘이 노해서 그런 것이니 이렇게라도 풀어야지.”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다 뒤에 바짝 붙어 서 있는 경옥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여태 혼인도 못한 원녀인 저를 두고 말하는 게 눈치가 보여서겠지만 경옥은 그것보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집안의 잡귀를 쫓아내는 나례 때나 쓰던 가면을 쓰고 남녀가 어울린다는 것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경옥의 집은 가난했던 터라 그 비싼 종이 가면 하나 마련할 수 없어 제대로 나례를 치러 본 적도 없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고을 여기저기서 자형 나무 가지와 익모초 줄기와 복숭아나무 가지를 한데 묶어 만든 비로 창문과 문지방을 두드리는 소리와 북과 방울 소리가 들렸다. 귀신을 내쫓기 위해 무시무시한 종이 가면을 쓴 사람들이 비를 들고 방울 소리를 울리며 다녔다.
그러다 보면 무뢰배와 한잡인들이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며 난동을 부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시끄러운 소리에 밤잠을 설쳤다. 바로 그날에 원녀와 광부를 모아 놓고 가면을 쓴 채 만난다는 얘기는 생전 듣도 보도 못했지만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 잘만 하면 그 입맞춤이라는 것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서린이도 교서관에서 몰래 만나 입맞춤을 했다고 하니 가면을 쓴다면 더더욱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다음 책도 금방 쓸 수 있겠지.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쌀도 사고 고기도 살 수 있었다. 이제 쌀이 떨어질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었다.
“어머니! 섣달 그믐날에 동헌에서 중매를 한답니다. 들으셨어요?”
경옥이 집으로 냉큼 달려 들어와 소리쳤다.
“쯧쯧. 너는 대체 어딜 그리 나다니다가 지금에야 들어오느냐. 그렇지 않아도 관청에서 나왔느니라. 원님의 명이니 꼭 참석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가난하여 네 혼기가 꽉 찼는데도 혼처 자리 하나 찾지 못하였으니 나라에 이런 불심이 따로 있겠느냐.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니 그때까지 몸을 단정히 하고 기다렸다가 가야 할 것이다.”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글을 읽던 아버지 이 생원이 고개를 불쑥 내밀고 무서운 얼굴로 말하였다.
“네. 아버지.”
경옥은 머리를 슬쩍 손으로 빗어 넘기고 저고리 고름을 매만지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머니가 옆에서 그런 경옥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런 천둥벌거숭이를 어쩌면 좋누. 어딜 그렇게 갔다 오느냐? 혹시 너 또….”
어머니가 경옥에게 다가와 묻자 경옥은 품 안에 감추고 있던 책을 손으로 가리며 냉큼 방으로 들어섰다. 부모와는 다른 동상이몽으로 그날이 기다려졌다.
섣달 그믐날 동헌에는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원녀와 공부들을 찾아낸 건지 모두 가면을 쓰고 어정쩡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가면은 관아에서 나눠 준 것으로 나례 때 쓰는 무서운 가면이 아니라 눈, 코, 입이 멀쩡하게 그려져 있는 남녀 인형 가면이었다.
경옥 역시 아껴뒀던 한복을 곱게 꺼내 입고 꽃신까지 신고 나와 있었다. 날이 추워 남바위까지 쓰고 왔지만 가만 서 있으면 발이 동동거릴 정도로 추웠다. 가면 속에선 간신히 코앞이 보이긴 해도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다간 고꾸라질 수도 있어 조심해야 했다. 양반집 처녀라면 조신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내리깔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야겠지만 경옥은 날이 추워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동헌 앞마당 한쪽에는 평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편하게 원하는 이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이 맞는 이들에 한해 방안으로 안내되어 함께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짝을 맺은 이들만 따뜻한 방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셈이었다.
숫기 없는 원녀와 광부들은 다들 한쪽에 서서 눈치만 볼 뿐 누구 하나 나서서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경옥은 도저히 추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날 이런 행사를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구나. 빨리 짝을 맺어 들어가라는 뜻이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얼굴이 벌게졌지만 알게 뭐란 말인가. 추워 죽는 것보다야 낫겠지.
좁게 보이는 눈앞을 고개를 휘휘 돌려보며 남자들을 훑어봤다. 누구를 선택해서 말을 붙여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경옥의 눈동자가 휙휙 돌아갔다.
“어…?”
눈앞이 핑글핑글 돌며 속이 메슥거렸다. 이대로는 가만히 서 있을 수 없을 지경이라 어딘가 손을 뻗었을 때 그만 눈앞이 캄캄해졌다.
***
“흐익. 손, 손을…. 하하.”
이 날씨에도 연신 이마의 땀을 수건으로 닦아내던 명진이 흠칫 놀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방금 전에 손을 뻗은 것 같은데 손 안에 물컹거리는 감촉이 낯설었다. 마침내 핑글핑글 돌던 눈앞이 초점이 맞아 떨어지자 명진 보다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으악! 뉘, 뉘신지요?”
“예? 하하. 손명진 입니다. 방금 전에 인사 나눴는데…. 어, 그, 저…. 그 말을 이렇게 손을 잡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손 안에 꽉 잡힌 물컹거리는 감촉의 정체는 남자의 두툼한 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놀라서 던지듯 빼냈다. 대체 이게 무슨…. 모든 것이 요지경이었다. 분명히 발을 동동 거릴 정도로 추운 날 밖에서 서 있다가 아무나 붙잡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상투도 틀지 않은 저 짧은 머리는 다 무엇이고, 한복도 아닌 저 옷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남자의 손을 놓고 제 두 손을 뻗어서 내려다 보던 경옥은 입을 떡 벌렸다. 입고 있던 한복은 어디로 가고 답답하고 꽉 끼는 요상한 옷이 입혀져 있었다. 머리 위를 만지자 댕기 머리는 온 데 간 데 없이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져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이게 대체….”
“예? 괜, 괜찮으세요?”
명진이 걱정이 된 얼굴로 넌지시 물어왔다.
“제가, 이게 다, 어떻게 된 것인지. 도련님은 어디 사는 뉘신지요?”
“…어, 음.”
명진이 굉장히 곤란하다는 얼굴로 가만히 경옥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러다가 슬로우 모션으로 얼굴에 파문이 일듯 웃음이 번져나갔다.
“하.하.하…. 그거 유머시죠? 뭐, 역할극 같은 건가요? 사극 좋아하시는구나. 저도 해품달 재미있게 봤어요.”
“…예? 제가 아무래도 머리가 어지러운 모양입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요지경 속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어지럽습니다. 여태 태어나 이런 곳은 처음입니다. 이게 다 뭐, 인가요?”
경옥이 테이블 위에 놓인 식기 세트와 스테이크, 나이프와 포크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보며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말했다. 어찌나 두리번거리는지 명진은 이 모습을 어떻게 받아줘야 하는지 몰라 쩔쩔맸다. 역할극이라면 너무 몰입을 하는 거 아닌가. 좀 전까지 이름과 나이를 통성명하고 이제 막 얘기를 나누려던 차에 갑자기 손을 뻗어 제 손을 꽉 잡아 놀랐다. 이제 처음 얘기를 나누는 상대인데 하필 이상한 여자가 걸릴 줄이야. 10분이 이렇게 길었나.
“저, 원미 씨. 이제 그만하고 음식 드시면서 얘기할까요?”
“원미…?”
“네…. 원미 씨…?”
“원미가 누구입니까?”
“…….”
명진의 얼굴은 아예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저기 크게 써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명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경옥이 손으로 홀 위에 붙여진 현수막을 가리켰다.
“…2024 커플을 찾아라…요.”
명진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제게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컨셉인건지.
“커플…?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귀는 사이…겠죠?”
“사귄다…. 그럼 혼인을 위해 만나는 사이란 말씀이시죠? 허헛, 맞게 찾아온 게 분명한데 아편을 한 것도 아니면서 이토록 머리에 구름이 끼듯 하다니. 아, 그렇다고 제가 아편을 해봤다는 것은 아니고요. 음….”
경옥이 얼른 얼굴을 만지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애써 자세를 가다듬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머리는 어색하기만 하고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귀신에 홀린 것이라고 해도 어쨌든 맞게 찾아 온 것은 분명했다. 커플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나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적어도 가면을 쓴 도련님 같아 보였다.
요상하게 짦은 머리하며, 옷하며 하필 나례 때라 귀신에 홀려서 이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귀신의 농간이라고 해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 입맞춤이라는 것을 해보면 느낌을 알 수 있겠지. 정말 고기 살 설컹거리는 것처럼 느껴 질지, 보드라운 솜이불 같을지, 엿처럼 달콤할지 드디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제가 다름이 아니라.”
경옥이 마침내 결심한 듯 입을 떼었을 때였다. 커다란 스크린에 음악이 흘러나오며 ‘오늘의 커플을 찾아라!’라는 문구가 춤을 추다가 ‘아랍두부상’이라는 말이 나와 멈췄다. 텍스트 아래 현장에서 찾은 실시간 얼굴들이 잡혔다. 대화하다가 갑작스럽게 화면에서 자기 얼굴들이 보이자 당황하며 서로 웃기도 하고 얼굴이 벌게져 숨기도 했다.
이분할 된 화면에 경옥과 명진의 모습도 나타났다. 명진은 저를 알아보고 당황하여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한눈에 봐도 진하게 생긴 아랍 상이었다. 그 옆에 함께 나온 경옥의 모습은 그러니까 원미로 쌍꺼풀 없는 눈에 순한 인상이 두부 상이었다. 흰둥이라는 닉네임처럼 조금 더 하얘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모두들 이의 없는 듯 감탄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다만 정작 원미의 모습을 한 경옥은 제가 화면에 잡힌 줄도 모르고 옆에 있던 남자가 화면에 비치자 마치 신기한 거울 보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저기 보세요. 도련님 얼굴이… 얼굴이.”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입만 벙긋 거리자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명진이 입을 내밀었다.
“그러는 원미 씨도 잡혔거든요. 옆에 원미 씨잖아요. 왜 저만 잡힌 것처럼.”
“예? 저 얼굴이 저라고요?”
경옥은 제가 쓰고 있는 가면이 참으로 요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얼굴까지 저렇게 달라졌지. 이게 다 홀린 게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화면은 금세 다른 커플로 넘어갔다.
“저…. 괜찮으신가요?”
“그럼 우리가 그 짝이 된 것이지요? 커플이라는 것 말입니다.”
“…아. 아뇨. 아직은. 그러니까 다른 분들하고도 얘기를 나눠보고.”
명진이 당황하여 손사래까지 쳤다.
“아…. 그러니까 여기가 동헌이군요.”
경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옆자리를 비롯해 주변에서 비슷한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남녀들이 대화를 나누느라 천장이 높은 홀 안이 다 웅웅 거렸다.
“그게 무슨…. 그러지 말고 스테이크 좀 드셔 보세요. 고기가 부드럽네요.”
명진은 대화 하기를 포기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경옥이 보더니 따라서 포크와 나이프를 잡아 들었다. 한번도 보지 못한 물건이 신기한 것도 잠시 명진을 힐끔거리더니 따라서 썰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고기는 부드러워서 나이프를 대자마자 썰려 나갔다. 붉은 핏물이 살짝 비쳐서 미간을 찌푸렸지만 명진이 보기 좋게 맛을 음미하며 목구멍으로 넘기는 모습에 용기를 냈다.
입안에 고소한 육즙이 가득 퍼졌다. 부들거리는 고기를 혀로 굴리며 경옥은 서린의 말을 떠올렸다.
“설컹거리는 고기 살 씹어 먹는 맛이 이 맛이구만.”
경옥은 입맛을 다시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