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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Apr 20. 2024

나는 온라인 장의사입니다.

[죄송하지만, 손영진 씨와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답글이 달렸다는 알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블로그의 안부 게시판 답글을 읽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


나는 온라인 장의사다. 인터넷 장의사니, 디지털 장의사니 하는 말들도 있지만 어차피 그게 그거다. 반듯하게 회사를 세워 일하는 것도 아니고 온라인 장의사의 줄임말 ‘온장’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알음알음 들어오는 일들을 할 뿐이다. 


처음부터 이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혼자 일하는 게 편했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 나이 먹도록 회사를 다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회는 나와 맞지 않는 곳이었다. 회사든, 학교든 나란 사람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이었고 이 사회에 나 하나쯤 없어도 잘 굴러 갈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타의든 자의든 스스로 죽이고 싶어하는 온라인 속 자신의 모습을 없애 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온라인에 한 번 뿌리 내린 씨앗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도 원치 않는 잡초처럼 아무리 뽑아내도 기어코 불쑥불쑥 어딘가에서 자라난다. 끈질긴 생명력. 그것이 잡초의 성질인 것처럼 온라인에 뿌려 진 원치 않는 글과 영상들 역시 아무리 없애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튀어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뽑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무성한 저주의 풀이 되어 버리고 나니, 다시 자라날 걸 알면서도 솎아내고 뽑아낸다. 하지만 의뢰인들에게 그 사실을 일일이 말하지 않는다. 그 정도의 희망은 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한 동안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의뢰는 다양했다. 물론 단연 많은 것이 몰카로 인한 범죄나 그루밍 성폭력, 데이트 폭력 등 주로 자신도 모르게 찍혀 불법 유포된 영상들이었다. 이 외엔 취업을 위해 그동안 활동했던 온라인 커뮤니티, 블로그 등 자신의 흔적을 없애기 위한 것도 있었고, 유족들이 죽은 가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의뢰하기도 했다. 


얼핏 남은 가족들이 어떤 이유로든 떠나간 가족의 흔적을 지운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먼저 떠난 가족의 흔적이 상처가 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의뢰인들의 사정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의뢰 받은 잡초만 열심히 뽑아내면 된다. 이 일은 그러니까 노가다에 가깝다. 


일을 하지 않을 때의 내 유일한 취미 생활은 죽은 사람들의 버려진 공간에 글을 남기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친 짓이긴 하다. 글을 남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면서 일기를 쓰듯 매일 저녁 잠들기 전 버려진 공간을 찾아다닌다. 


그 일은 나한테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거였다.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이 된 것처럼 나는 날마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그곳에 신성한 제물을 바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버려진 공간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당뇨병 합병증으로 생을 달리 한 이웃 블로거 첼리스트, 팔로잉 한 암 투병으로 고통 받다가 스러져 간 젊은 회사원, 오랜 조울증으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해 오다가 자살한 유튜버 등 온라인에는 더 이상 새로운 글과 영상이 올라오지 않는 버려진 공간들이 얼마든지 넘쳐났다. 


오래 전부터 멀리서 지켜봐 온 그들에게 어떤 애정과 감정이 남아서 글을 남기는 것은 아니었다. 몇 년 혹은 몇 십년 전에 남긴 글을 끝으로 폐허가 된 공간이 주는 기묘한 쓸쓸함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이 남긴 애정과 사랑이 담긴 글들이 애틋했다.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었다. 잡초를 뽑아내고 희망을 주는 것처럼 스스로 그 일을 자처했다.


온라인에서 안부나 댓글을 몇 번 달아본 적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죽은 이들에게 나는 마치 아는 사람처럼 글을 남겼다. 하루를 보낸 감정, 특별할 것 없는 일상다반사를 마치 일기처럼 짧게는 몇 줄, 길게는 한 바닥이 넘게 남겼다.  


또 한 가지의 취미 생활은 오래 된 편지를 읽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20대 초반까지 받았던 작은 쪽지부터 편지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갖고 있었다. 커다란 아크릴 박스로 3통이나 되는 걸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도 버리지 않았다. 나에겐 사진 하나 남지 않았으니 손으로 꾹꾹 눌러 쓴 그 글들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어떤 편지는 이젠 누가 써줬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꾹꾹 눌러쓴 텍스트들 사이를 몇 번이고 헤맸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편지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펜팔 친구에게 받았던 편지들이었다. 고작 6통이 오갔을 뿐인 그 펜팔 친구는 대구에 살았고 나보다 2살이 많았다. 첫 번째 편지에는 자신의 명함을 손수 만들어 넣어주었다. 고개를 젖히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웃으며 V를 그리고 있는 소년의 캐릭터를 그려 넣고 ‘손영진’이라는 이름을 써놨다.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

햇살같이 가벼운 몸으로 

맑은 하늘을 거닐며

바람처럼 살고 싶다

언제나 어디서나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는

바람의 뒷모습이고 싶다

-설랑(雪狼)-


명함의 뒷면에는 설랑이란 이름의 글이 적혀 있었다. 글에서 그 사람이 보였다. 편지 속에서 그 사람은 손영진도 되었다가 설랑도 되었다가 호뿌도 되었다. 모두 같은 이였다. 손영진 이라는 이름 옆에 웃는 얼굴과 함께 손을 그려 넣는 것도 잊지 않았고, 말 끝마다 호뿌(Hope)라고 자신을 지칭했으며, 설랑이라 적고 시를 적어 보내줬다. 


영화를 좋아해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경영학도였다. 키는 186cm였으며 긴 장발 머리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글씨는 귀여웠으며 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슬쩍슬쩍 묻어 나오기도 했다. 6통의 편지 속에서 내가 알아낸 모습들이었다. 일부러 편지지를 사서 쓰지 않아서 어떤 때는 누런 갱지 몇 장에 걸쳐 빼곡히 써 보내거나 대학 노트를 잘라 보내왔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편지에서 향긋한 향기가 났다. 향수를 살짝 뿌려서 보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냄새가 좋아 몇 번이고 코를 대고 향을 맡았던 기억이 났다. 


6통의 긴 편지들을 몇 십 번이고 정독하면서 깨달은 건 겉으로 밝고 귀여운 호뿌 같아 보였지만 그는 눈 위의 늑대, 설랑처럼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다는 거다. 마지막 편지에는 우리가 사진을 교환했던 것인지 그의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다. 나도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왜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는지도 다 잊어버렸다. 편지 봉투 안에 얌전히 잠들어 있는 사진은 별로 낡지 않았다. 초점이 조금 흔들린 사진 속 모습은 긴 장발 머리를 흩날리며 거리 위를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어 준 누군가 돌아보라는 말에 얼굴을 돌리고 찍은 사진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코트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뷰 파인더를 보며 웃어 주고 있었다. 긴 머리가 잘 어울렸다. 


몇 개월 전 그 사람을 온라인에서 찾아보기로 한 건 어디까지나 내 취미 생활 때문이었다. 평상시처럼 편지들을 살펴보다가 손영진이라면 온라인 활동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했던 것인지 생각난 김에 바로 검색을 시작했다.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전문 기술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여러 개의 아이디와 비밀 번호를 만들지 않는다.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로 아이디와 비밀 번호를 같이 쓰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손영진이라는 이름은 흔하니 호뿌나 설랑의 키워드로 검색을 시작했다. 


역시 설랑(雪狼)이라는 이름을 여전히 쓰고 있었다. 설랑의 블로그를 발견하고 그가 남긴 글들로 인해 나는 대번에 그라는 걸 알았지만 심장이 쿵 내려 앉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눈 위의 늑대.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 되고 싶다더니, 맑은 하늘을 거닐며 바람처럼 살고 싶다더니, 언제 어디서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더니, 바람의 뒷모습처럼 떠나고 싶다더니. 정말 오랜 그의 바람처럼 손영진, 호뿌, 설랑은 이미 8년 전에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안부 게시판에는 몇 년에 걸쳐 그를 향한 지인들의 절절한 안부 인사가 남겨져 있었다. 모두 그와의 추억을 곱씹으며 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남긴 글들을 살펴보니 여전히 영화를 좋아하고 친구를 좋아하고 글을 잘 썼다. 


3년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은 그의 글이 아니었다. 그 사람의 연인으로 짐작되는 이의 비탄, 회환, 후회, 죄책감으로 가득한 글이었다. 격한 감정으로 쓴 글이 모두 진실 일 순 없지만 그 글이 맞다면 설랑은 스스로 목숨을 저버렸고 죽음으로 몰고 간 이는 믿을 수 없지만 그의 연인이었다. 


하지만 3년 전에 공개적으로 남긴 글을 전부 믿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연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그저 자신의 탓으로 몰아가고 싶은 것 같았다. 그의 연인이 글을 썼다면 이 블로그의 아이디와 비번도 연인이 알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비밀로 안부를 남긴다 해도 볼 확률이 높았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비밀로 안부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모든 감정엔 유통기한이 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슬픔과 고통도 시간이 흐르면 옅어지게 마련이다. 산 사람은 살게 마련이고 매일마다 생각나던 것도 몇 개월 혹은 몇 년에 한 번씩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설랑의 블로그도 그랬다. 누군가 마지막으로 안부 게시판에 남긴 글도 이미 2년 전 글이었고 하루 방문자 수도 0명이었다. 버려지고 폐허가 된 공간에 나는 매일마다 제물을 드렸다. 어디서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다. 가끔 떠오르면 누군가의 남편, 아빠가 되어 나이 들어 가고 있을 줄 알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진을 보내왔던 마지막 편지에 ‘우린 아직 살아있어… 명심하자!!’란 글이 적혀 있었다. 웃는 얼굴에 손을 그려 넣고 호뿌로부터라고 되어 있었다. 그제야 이 말이 내내 스스로에게 하던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생생한 삶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


***


내 글에 답글이 달린 건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흐른 후였다. 


[죄송하지만, 손영진 씨와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지막으로 글을 남겼던 그 사람의 연인일까. 아니면 가족일까. 혹은 친구? 분명한 건 내가 몇 개월에 걸쳐 매일마다 쓴 글을 읽었단 뜻이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도 아는 지인조차 되지 못한 내가 친한 친구에게 쓰듯 글을 썼다. 매일마다 느꼈던 내 감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놨으니 읽었다면 궁금해 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손영진과 어떤 관계인가. 15년 전에 펜팔을 했던 사람입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당시의 흘러가는 시간과 감정들을 나눴으며 그게 고맙고 즐거웠습니다. 편지지에 좋은 향을 뿌려서 보낼 정도로 다정하고, 항상 웃는 얼굴과 귀여운 캐릭터들을 그려주고, 덩치에 맞지 않는 귀여운 글씨체와 좋은 영화들을 많이 아는 사람이 이젠 이 세상에 없다는 것에 심장이 철렁 내려 앉아, 그걸 지금에야 알아서 안부를 전하듯 글을 씁니다. 라고 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답글에 어떠한 답글도 달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설랑의 블로그는 삭제되었다. 누군지 밝히지 못한 낯선 불청객의 글이 불쾌했을 수도 있고, 내 글들이 잊고 싶었던 어떤 기억들을 생각나게 했는지 모른다. 몇 번이고 새로 고침하고 몇 번이고 검색을 했지만 이젠 이 세상에 설랑의 블로그는 없었다. 

나는 설랑의 블로그를 살려내 아무도 모르게 계속 글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바람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바람 속에 하늘 속에 살기를 바랐다. 


나는 온라인 장의사다. 인터넷 장의사니, 디지털 장의사니 하는 말들도 있지만 어차피 그게 그거다. 나는 여전히 일을 끝마친 후에 버려진 죽은 공간에 글을 남기고 오래된 편지들을 읽는다. 그것은 내게 있어 어떤 의식 같은 거다.


설랑(雪狼)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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