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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Nov 04. 2023

길고 푸른 밤을 날아서

2023 아르코 창작기금 선정작

           

  지금도 떠올려보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여행이 있다. 8년 전 혼자 떠났던 ‘우붓 발리’로의 여행이 그것이다. 목적도 성취도 없이 그저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겨울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단 몇 일간만 이라도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날을 만들어, 차가운 서울의 새벽을 뒤로한 채 그 겨울을 떠날 수 있었다. 꿈같은 일이었다.


  후줄근해진 파란색 기모 후드티셔츠차림으로 한여름의 덴파사르 공항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자정을 넘긴 후였다. '훅' 하고 남국의 열기가 끼쳐왔다. 불과 8시간 전의 겨울을 날아왔는데 여긴 여름이라니, 일단 성공적이었다. 나는 마치 '파랑새'를 찾는 ’ 찌르찌르‘와 ’ 미찌르‘처럼 '블루버드 택시'를 찾아 밤의 공항 안을 돌아다녔다. 이 밤 덴파사르 공항에서 우붓의 아궁 라카까지 나를 안전하게 데려다줄 택시는 '파랑새', 즉 '블루버드'여만 했다. 출국 전 인터넷을 뒤져서 찾아낸  안전한 택시 정보였다. 신뢰가 가는 이름이었다.


덴파사르 공항

  

  블루버드를 찾아 헤매며 문득문득 보이는 공항 창밖에는 유난히 흰자가 번뜩이는 깡마른 남자들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 눈빛들의 타깃이 설마 나를 향한 것이었을까? 인적 드문 시간 홀로 내린 작은 체구의 동양 여성인 내게 쏟아지는 걸까? 호기롭게 혼자 떠나왔건만 여행의 설렘을 느끼기도 전에 몰려드는 불안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우리의 삶이라는 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는 게 당연한 일 아니었던가. 그렇게 열심히 조사했건만 심야의 공항 청사 안에서 찾아낸 블루버드는 짝퉁 블루버드였다. (늦은 밤이라 문 연 곳이 별로 없었다) 거금의 계약금과 택시비를 미리 지불하고 난 후 목적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야 내가 호구가 되었다는 걸 알 수 되었다.


  ‘옐로버드’ 택시 기사는 우붓이 처음인 동양 여자 여행자를 태우고 겁날 정도로 속도를 내며 심야의 길을 달렸다. 그의 속내를 알 수도 없었고 넘겨 짐작하고 싶지도 않았다. 느긋함을 가장 한 채 여행자의 분위기에 젖으려 애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어렵사리 떠난 여행의 시작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리라.


  어쩐 일인지 택시기사는 말을 참 많이도 했다. 손님들이 몰라서 그렇지 ‘옐로 버드 회사’가 ‘블루버드 회사’보다 좋고 차도 좋다는 얘기 같았다. 그래봤자 우붓이 초행인 초보 혼자 여행자로서는 확인할 길 없는 진실이었다, 급기야 그는 내일의 내 관광일정까지 물으며 가이드를 제안해 왔다. 파격 디스카운트를 해주겠다는 등. 참 긴 시간을 달렸고 그 와중에 가끔씩 도로에 뛰어드는 길 위의 검은 개들을 보고 몇 번씩이나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한 밤중에 도착한 아궁라카와의 첫 대면

  그렇게 낯설고 긴 밤을 달려보다니, 다시없을 경험이었다. 마침내 여독을 풀 달콤한 상상과 함께 도착한 풀 빌라 호텔 '아궁 라카'. 혼자 여행을 준비하며 그토록 심사숙고해서 선택한 첫 우붓 숙소의 세리머니는 짝퉁 블루버드를 뛰어넘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열대지방의 잦은 정전 사태. 정글을 방불케 하는 남국의 초목들에 둘러싸인 풀 빌라 옵션의 '아궁 라카'호텔의 예약된 내 방은 하필 그날 그 시간에 정전이었다.


  촛불을 삼켜버리고도 남을 것처럼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밤이었다. 암흑을 헤치고 내려간 단독 야외 샤워장. 더운물인 줄 알고 튼 수도꼭지에선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몸서리치며 고양이 샤워를 한 후 어두운 방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래 여행이 다 그렇지 집 떠나면 개고생인 거야' 속에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기대했던 낭만도 자유도 편리함에 익숙해진 방금 도시를 떠나온 여행자에게는 아직 오기 전이었다.


  사방 캄캄한 어둠과 고요 속 논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도대체 내가 그 긴 시간을 준비해 긴 밤을 날아와 누워있는 여기는 어디인가? 개구리울음소리가 잠시 어릴 때 살았던 시골 마을에서 들었던 그 소리와 비슷했다. 이상하게도 익숙한 느낌이 드는 남국이었다. 그렇게 우붓에서의 첫날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며 보냈다. 예정대로라면 내게 주어진 우붓에서의 시간은 이제 딱 6일이 남아 있었다.     




* 덴파사르 ; 인도네시아 발리주 덴파사르 시에 위치한 국제공항.

** 블루버드 : 우리나라 공항택시급의 안전하다고 알려진 발리의 택시이름

*** 아궁라카 Amatara agung Raka : 도착 첫날 잊지 못할 환영식으로 하루 반 만에 탈출해 나온 우붓에서의 첫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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