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한 다음 날 저녁 숙소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엘 갔다. 우붓 첫날의 요란한 세리머니를 겪은 후 제대로 된 한 끼를 못 먹었다는 자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비건 카페 스위트 어니언을 찾기 전인 데다가 어디라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2월의 저녁은 남국인데도 금세 어두워지려는 기색이었고 마음도 따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목소리에 활기가 묻어나는 이탈리아노 셰프는 비건식을 먹을 수 있냐는 내 질문에 파스타를 추천해 줬다. 육수를 쓰지 않고 비건으로 해 줄 수 있다고 흔쾌히, 그러나 알아듣기 힘든 발음의 설명이었다. 그때 내가 원했던 건 담백하고 깔끔한 '알리오 올리오' , 파스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나마 가끔 생각나는 게 '알리오 올리오'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집은 겉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지만 속은 아마도 피자집 정도 되는 식당이었나 보다. 요리로서의 그 '파스타'가 별로였는지, 내 입맛이 '파스타' 자체를 거부했던 건지 아무튼 그것은 그냥 파스타였다. 마늘 향이 듬뿍 올라오는 알싸한 맛의 '알리오 올리오'는 결코 아니었고, 달큼한 토마토 맛이 나는 토마토 파스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말을 하며 음식을 주문했고, 짧지 않은 시간을 음식을 기다리며 보냈다. 마침내 내 비건 파스타가 나왔고, 창 밖을 보니 어둠이 내려와 거리를 덮고 있었다. 어둠을 보자 드는 생각은 이제 비로소 '완벽한 여행자의 시간이 시작되었구나' '완벽한 고독의 순간에 가까워졌구나'라는 거였다. 먹는 둥 마는 둥한 첫 끼였지만 그 느낌의 발현만으로도 괜찮았다.
수다스러운 이탈리아 남자의 식당을 빠져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밤 길이 그리 낯설지가 않은 것도 이상했다.
한낮의 KAFE
주로 작은 식당들을 다니다가 지역 식당 홍보 책자에서 추천하는 곳엘 가 보자 마음먹고 가 본 식당이었다. 거기서 갔던 식당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편이었다. 그런데 7년 전, 분명 비건 식당으로 알고 갔던 식당이었건만 오늘 보니 닭을 요리한 사진이 메뉴로 올라와 있어서 의외였다. 코로나로 인해 영업 전략이 바뀐 건지 유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요가 수련을 마치고 온 걸로 짐작되는 차림새의 사람들이 벽 쪽의 편한 자리를 거의 다 차지한 채 앉아 있었다. 작업을 하건 수다를 떨든 다들 편안해 보였다. 그들 눈에 들어선 아시안 여성 혼자 여행자에게 은근히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벽이나 구석 자리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나가고 싶진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중심 자리에 앉아 편하게 비건식을 주문할 수 있는 메뉴판을 펼쳤다. 이탈리아 식당에서보단 주문 폭이 넓은 것도 좋았다. 그때 이미 '플라스틱 프리'를 실천하며 천연 갈대를 빨대로 주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플랜트 베이스드 버거를 주문해 맛있게 먹고 나왔다. 나와 가족을 위한 저녁 식사로 뭘 해야 할지, 뭘 만들어 먹어야 할지에서 '만들다' '요리하다'를 빼고 지내는 모처럼의 날들이었다.
그 와중에 재밌었던(?) 건 현지 요가 스튜디오를 이용하거나 소문난 식당을 이용하는 손님들은 대개가 백인들이라는 사실이다. 반면 서비스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쪽은 모두 그곳 원주민들이었다.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에게 그 사실의 각성이 뭐 그리 대수겠냐만, 어느 사이 힐링의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이 우붓의 이면이란 생각이 지워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