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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Feb 06. 2024

첫 이별의식

뜨갈사리 도서관에 가면 한국어 시집이 있다. 

  '오늘이 지나면 우붓을 떠난다. 떠나야 한다. 떠나야만 한다. ' 

마치 주문인 듯 , 도돌이표인 듯 출국을 앞둔 전날의 내 머릿속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이방인으로서의 나날들이 그토록 좋았던가? 두려움은 없었던가? 지금 이토록 아쉬운 감정은 진심인가? 그들에게 나는 그저 관광객이자 손님일 뿐, 그들이 보여준 친절 또한 어쩜 직업적인 일에 불과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진실이 뭐든 나는 다가오는 그들과의 이별이 아쉽기만 했다. 


  사는 동안'과유불급'을 조심한다면 오류에 빠지는 일은 훨씬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물론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지만 말이다. 충분히 사들인 선물용 바틱 천의 무게가 문제였다. 순면인 데다 폭이 넓고 화려한 그 천은 크기만큼이나 무게가 나갔다.  가부좌로 앉아 전신을 충분히 덮고도 여유가 있을 그것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스무 장 이상의 전통 바틱천을 사면서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가방을 싸면서야 너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선물이 될 예정이지만 짐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들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내 가방의 크기는 넉넉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무얼 덜어내야 한단 말인가. 바틱 몇 장을 빼놓거나 휴대용 요가매트를 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는 한국어 시집 한 권과 여행 안내서가 있었다는 게 생각이 났다. 햇빛을 가리며 잘 쓰고 다니던 밀짚모자와 여름 옷가지는 한국을 좋아하는 뜨갈사리의 여직원에게 주면 될 것 같았다. 절대로 바틱천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바틱천을 좋아하는 만큼 한국의 지인들도 좋아하란 법이 없을 텐데,  나는 주고 싶어 하는 내 욕망에 꽤 충실한 편이었다. 


  로비 2층을 올라가려면 밖으로 휘돌아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그 끝에는 원형의 작은 공간이 있었다. 첫날 도서관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었지만 오던 날 딱 한 번인 올라갔던 게 전부였다. 영어와 일어로 된 책은 있었는데 한국어 책이 없었던 게 공연히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나는 내가 가져간 내 요가시집 한 권과 우붓 발리를 소개하는 한국어 관광 가이드북을 그 작은 도서관에 기증했다. 한국어 사인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느닷없이 챙이 넓은 한국산 여름 모자와 티셔츠를 받은 인도네시아 처녀는 특유의 편안한 웃음을 보여줬다.  


  여행지에서의 짐은 별 게 아닌 것 같은 것도 꽤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들이 나간 자리에 내가 사모은 우붓의 물건들을 꾹 꾹 눌러 채우며 그제야 본격적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은 바틱 천만이 유일하다는 듯 그렇게 단 한 장의 천도 놓치지 않은 채 일단 짐 싸기에 성공했다. 


  마침내 이별의 순간이 왔다. 다르요는 그날따라 신중하고도 무거운 표정으로  직접 내 짐을 로비까지 들어줬다. 호텔 문 밖에는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줄 지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나는 해가 지기 전에 공항에 도착해 자정 무렵의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될 것이다. 도착하던 날과 달리 어둠 속이 아닌 말끔한 이른 저녁의 빛이 환한 도로를 달리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뜨갈사리에 두고 온 자잘한 한국 물건들이 아쉬움 가득, 우붓을 떠나며 거쳐야 할 이별의식일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은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보다 더 큰 이별의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나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었다. 

뜨갈사리 로비,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근처에서 필자


* 느리지만 연재는 끝낼 예정입니다. 양해해주셔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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