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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Feb 27. 2024

버린다고 가벼워질까?

쓰레기통에 시집 원고 뭉치 버리고 온 썰

  2016년 2월, 나는 인도네시아 발리 덴파사르 공항 근처의 호텔 로비 쓰레기통에 품고 다니던 시집 원고 뭉치를 버리고 왔다. 초과될 게 뻔한 짐의 무게 때문이었다. 가벼워지고 싶어 떠나온 여행이라는 의도가 무색할 만큼 내 가방의 무게는 무거워져 있었다. 출발 시각을 24시간 착각해 귀국길 비행기까지 놓친 터였다. 더 이상은 공항에서의 그 어떤 착오도 생겨선 안 될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을까? 나는 당초에 대담한 결단이 어울리는 인간형이 아니다. 우붓이 좋다 한 들 비행시간 착각이라는 구실을 만들어 하루 더 묵고 싶을 만큼의 배짱이 없단 말이기도 하다. 홀린 듯 사들인 몇 십장의 바틱천이 문제였다. 순면 100%에 몸을 다 덮고도 남을  아름다운 문양의 페브릭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거운 짐이 되었다. 하지만 단 한 장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버려질 그 무엇인가를 찾아야만 했다.


  마침내 떠오르는 게 있었다.'절벽수도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간되기 전의 시집 원고 뭉치, '바틱 천' 만큼이나 버리기 쉽지 않은 그것이었다. 우붓에 머무는 동안 총명(?)한 집중력을 발휘해 최종 교정을 본 후 미련 없이 마침표를 찍으리라 마음먹었었다. 금덩어리를 준다 해도 바꾸기 싫을 정도로 애정을 기울인 종이 뭉치였다. '누군가는 분명 내가 버린 A4용지 한 뭉치를 발견했겠지?' '영어가 아닌 한글로 쓰인 이 언어의 의미를 모르겠지? '


  말끔하게 정돈된 호텔 로비 구석진 곳에 놓인 쓰레기통. 자잘한 휴지나 빈 음료수통이 쓰레기의 전부였던 거기에 나는 과감하게 내 한 시절을 구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삶의 한 부분을 갈아 넣었으나, 그게 다 뭐란 말인가. '나 이렇게 슬퍼했노라, 이렇게 사유했노라, 절망했노라, 그럼에도 미래를 바라보노라.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시집 한 권이 뭐라고, 주목은커녕 읽히지 못하는 시집 한 권이 뭐라고 손도 마음도 벌 벌 떨며 그걸 버렸을까? 얼핏 신파조로 들리는 이 대목에서 덧붙이자면 사실 모든 시인들이 이런 현실 속에서도 시를 쓰고 시집을 묶는다. 참으로 어리석고도 어리숙한 시인들의 생태지만, 그 와중에도 영혼을 울리는 시들 몇 편, 아니 최소 1편씩은 꼭 꼭 숨어있다.  어쨌거나 내가 버리고 온 시집 원고 뭉치는 제법 무게가 나가서 바틱 천 몇 장의 무게를 대신할 수 있었다.


  우붓 여행 내내 좋았던 뜨갈사리가 아닌 갑자기 정해진 숙소에서 하루를 더 묵고서야 떠나올 수 있었다. 잠 안 오는 낯선 호텔에서 가방의 무게를 체크하며 소중했던 시집 원고 뭉치를 버리고서야 덴파사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짐을 부치고 난 후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우붓에서 달러를 다 쓰고 오느라 돈이 모자라 마실 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인생이었다.


  이 글의 제목으로 뽑은 '버린다고 가벼워질까?'의 대답은 '예스'였다. 여행이 아니었다면 애지중지하던 시집 원고 뭉치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기왕에 비행기를 놓친 후 생긴 시간들, 나는 낯선 동네를 배회하며 보냈다. 버린 시집 원고 뭉치도 놓친 비행기도 처음처럼 안타깝다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가벼워지고 싶어, 자유롭고 싶어 안달하며 떠났던 여행이었다. 기내방송에선 잠시 후 인천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떠날 때 발길이 가벼웠던 고국의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는 말, 맞는 말이었다. 밀린 수업과 밀린 집안일, 나의 고양이들 그 모든 것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것이 자명했으나 돌아올 곳이 없다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안도의 마음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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