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진짜 감정 찾기
“그러니까 뭐 하느라 그 애 집에서 잤냐고! 핸드폰도 꺼두고!”
어김없이 그 여자였다.
과 CC였던 나와 내 남자는 신입생 환영회부터 서로에게 끌렸고 1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함께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남자는 같은 과의 다른 여자 동기와 가깝게 지냈다.
노래 연습을 한다며 과방 소파에 엉덩이와 어깨를 붙이고 앉아있거나,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겼다면서 나와의 선약을 깨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한 번은 동아리 MT를 갔는데 술에 취해 뻗은 그가 갑자기 실실 웃으며 그 여자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때마다 몸속 장기가 녹아내리는 듯한 이상한 감각을 느꼈는데, 미련하게 3개월간 지옥 같은 연애를 더 이어갔다.
그러다 결국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전날 밤, 다른 여자의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온 그에게 나는 해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그냥 술 먹고 얘기하다가 잤어.’였다.
나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가 어떻게 다른 여자와 단둘이 밤을 보낼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에게 한치의 미안함도 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별 통보가 두려워 제대로 쏘아 붙이지도 못했다.
“다른 오빠들 집도 있고 주변에 모텔도 있잖. 왜 하필 그 애 집이냐고!”
“나도 지친다. 그만하자. 이제.”
그놈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의 대학시절 첫 연애도 끝났다.
그로부터 다시 2개월 후, 그놈과 그 여자가 새로운 과 CC라는 소식이 내 귀에 들려왔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다시 돌이켜보니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 사건에 대한 내 감정이 오직 분노뿐이었을까?
이 한 단어로 그 둘의 몹쓸 짓에 대한 내 감정을 전부 표현할 수 있을까?
감정 해방을 위해서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감정에는 대표 감정과 숨은 감정이 있다.
대표 감정은 겉으로 드러나면서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감정인 반면, 숨은 감정은 대표 감정에 가려져 있는 다채로운 진짜 감정이다.
예를 들면 아이가 굴러가는 공을 잡으려다 차에 치일 뻔했을 때, 부모는 아이에게 목청을 높여 화를 낸다.
“차도로 뛰어가면 어떻게! 너 때문에 못살아 정말!”
그 부모는 아이가 밉고 싫어서 화를 낸 것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하는 아이가 다칠뻔한 것에 대한 놀람, 걱정, 두려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이다.
그런데 분노의 감정만 겉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다양한 숨은 감정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의 이유를 적어 보면 된다.
특히, ‘특정 대상 또는 사건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고 원했는지’ 살펴봐야 한다.
1. 내 남자에게 대한 나의 기대와 갈망
[기대·갈망] 내 남자가 수수한 내 모습을 예뻐해 주면 좋겠다.
[감정] 기대와 다르게 그는 톡톡 튀고 화려한 그 여자를 더 좋아하는 것에 대한 섭섭함.
[기대·갈망] 내 남자가 그 여자와 단둘이 만나지 않으면 좋겠다.
[감정] 그 여자가 위협적으로 느껴져 불안하고 두려움.
[기대·갈망] 내 남자가 나와의 약속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
[감정] 소망과는 다르게 내 존재에 무관심한 것에 대한 무시감과 소외감.
[기대·갈망] 내 남자가 그 여자가 아닌 나를 사랑해 주면 좋겠다.
[감정] 그 여자에게 내 남자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 두려움, 시기심.
[기대·갈망] 내 남자가 그날 밤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겠다.
[감정] 태연히 거짓말하고 나를 기만하는 그를 보면서 생기는 불신, 실망, 분노.
2. 그 여자에 대한 나의 기대와 갈망
[기대·갈망] 그 여자처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
[감정]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한 부러움.
[기대·갈망] 그 여자처럼 화려하게 화장하고 매력적인 여자가 되고 싶다
[감정] 매력적으로 꾸미지 못하는 나에 대한 자책.
[기대·갈망] 그 여자처럼 성적 매력을 가지고 싶다.
[감정] 여성으로서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자신감 상실.
3. 스스로에 대한 기대와 갈망
[기대·갈망] 이 상황에 대한 정확한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고 싶다.
[감정] 그렇게 하지 못하는 물렁물렁한 자신에 대한 자책, 한심함.
[기대·갈망] 아직 사랑하는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감정] 하지만 나를 떠날 것을 알기에 느껴지는 상실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
모든 감정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유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잠깐 시간을 내어 적어 봐도 분노라는 대표 감정 밑에 숨은 진짜 감정이 10가지가 넘지 않은가.
분노와 섭섭함, 수치심, 부러움, 시기심, 불안감은 엄연히 다른 감정이다.
앞서 숨은 진짜 감정을 알아채는 것이 감정 해방에 핵심이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다.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스물한 살, 이별의 현장에서 내 남자에게 화가 난 이유는 ‘그에게 섭섭했고, 그녀가 부러웠고, 스스로가 한심했고, 그 모든 상황이 불안하고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기에 그저 울기 바빴고 제대로 나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를 향한 분노가 나를 향한 분노의 칼날로 변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날 이후, 나는 새로운 사랑을 늘 두려워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음에도 그를 사랑하면 안 된다고 감정을 억눌렀다.
‘남자는 예쁜 여자만 좋아해. 매력적이고 화려하게 꾸미는 여자만이 사랑받을 수 있어.’와 같은 왜곡된 가치관도 생겼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많은 사랑을 주었던 남자들에게도 참 못되게 굴었다.
그때 나의 감정을 세세하게 들여다보고 돌보았다면 어땠을까?
제대로 느끼고 표현하고 위로했다면, 지금껏 만난 내 남자들에게도 나에게도 흉터가 짙게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함에 있어 주저함이 적었을 것이고, 사랑의 크기만큼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아무리 가스라이팅 당해도 단단하게 자존감을 지켰을 것이며 무례한 그에게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