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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뮌헨의 마리 Sep 06. 2019

누구에게나 비추는 새벽빛

알프스 트레킹 마지막 날


새벽에 일어나 글을 썼다. 남편과 아이는 곤히 잠든 시각이었다. 작은 창으로 새벽빛이 비쳤다. 인생의 어느 때에도 새벽은 온다. 빛과 함께.




2019. 9. 5(목)


트레킹 사흘째. 마지막 날이라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2박 3일 가벼운 산행을 끝까지 트레킹이라 우기는 것은 시작이 반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 이태리 알프스 산행인 돌로미티 트레킹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오래전 시댁 식구들과 몇 번 온 적이 있음에도 그때는 감동을 못 받았다. 이번에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와서 느낌이 남달랐던 것일까. 독일에 온 지 1년 반 만에 세 식구가 처음 해 본 여행다운 여행이기 때문이다. 뮌헨에서 차로 네 시간이면 오는 것을. 고작 사흘 만에도 이렇게 흡족할 수 있는 것을.     


새벽에 일어나 글을 썼다. 남편과 아이는 곤히 잠든 시각이었다. 작은 창으로 새벽빛이 비쳤다. 인생의 어느 때에도 새벽은 온다. 빛과 함께. 포기와 절망은 새벽의 일이 아니다. 그럼 언제냐고? 해질 무렵이나 한밤중? 아니다. 포기와 절망을 위한 시각은 없다. 다시 한번 시작하거나 다시 일어나는 시각만이 있을 뿐이다. 인생 오십을 넘기니 그렇게 느낀다는 말이다. 자포자기와 절망감은 10대와 20대에 더 자주 느꼈던 것 같다.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누군들 청춘의 날에 방황하지 않았으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봤다. 안 해 봤으면 큰일 날 뻔했다.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다. 별 게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이 유일한 소득이다. 인생이 그렇다. 결혼 생활이 지루해서가 아니다. 남편이 미워서도 아니다. 아이가 예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언젠가 갈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온 곳이 어딘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의 순리. 가지 않고 끝끝내 버틸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가지 않고 남아 봤자 좋을 게 뭐겠나. 100세까지 무병장수하신 이태리 형부의 아버님 말씀은 딱 한 마디였다. 지루하구나. 아는 사람은 모두 떠나고 없는 삶. 부모도 친구도 배우자도 형제자매도.      





아침은 9시에 먹었다. 남편과 아이에게 식탁에서 카드 네 장을 쓰게 하고, 나 홀로 방을 정리 정돈했다. 매트리스 세 개 위에 담요와 베개와 침대 시트 겸용 슬리핑백과 타월을 나란히 개어놓고 배낭도  두었다. 이틀 동안 우리 가족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한 방에도 작별을 고할 시간. 창은 반쯤 열어두고 내려갔다. 아침 식사는 전날만큼 넉넉했다. 이것은 독일식.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이토록 넘치는 아침상을 만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독일의 아침 식사다. 시어머니와 새어머니, 시누이와 남편의 형에게 쓴 카드는 호텔에서 부쳐준다고 했다. 이런 것도 내가 좋아하는 독일식 서비스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독일에서 쇼핑을 할 때 '선물'일 경우 카운터에 하면 즉석에서 포장해 주거나 포장 코너를 알려준다. 꼭 이용하시라! 단, 줄이 긴 게 흠이다.)  


산장의 카푸치노가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이것은 어느 나라 머신이길래 이리도 맛있나. 남편도 나도 한 잔씩 더 마셨다. 산장의 검은 빵도 만족스러웠다. 표면에 회오리바람처럼 칼집이 들어간 기본빵 셈멜은 독일보다 맛이 덜했다. 역시 셈멜은 독일이다. 딱딱한 과자처럼 부셔먹는 빵은 특히 남편이 좋아했다. 우리로 치면 말린 누룽지 느낌? 산장의 여주인과 가족들과 몸집이 좋은 소들과도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내려오는 길에도 스틱의 도움을 받았다. 1시간 내내 내려와야하는 내리막 길이었다. "내려가는 것도 쉽지 않아!" 아이가 소리쳤다. 그럼, 안 쉽지. 그것만 깨달아도 괜찮은 여행이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딨나. 그렇다고 완벽하게 어려운 일도 없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기만 하면 된다. 조심 또 조심하며.                


돌아오는 길에는 언니네가 살던 볼자노 Bolzano에도 들렀다. 독일어로는 보첸 Bozen.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볼자노와 가까운 온천 도시 메라노 Merano도 마찬가지. 독일 이름은 메란 Meran이다. 이곳은 남티롤의 대표적인 도시들로 독일어와 이태리어, 이중 언어를 쓰는 곳이다. 볼자노는 예나 지금이나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날씨도 좋았다. 우리 언니의 옛친구인 마리아도 만났다. 아기 때 덴마크로 입양된 친구. 마리아와는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여전히 밝고 건강하고 따뜻했다. 뮌헨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이태리에서 오스트리아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오스트리아의 기름값이 싸서 정유소에도 들렀다. 오는 길에는 돌로미티 엽서도 몇 장 샀다. 석양빛으로 빛나는 로젠 가르텐 사진이었다. 첫 돌로미티 트레킹은 내게 저 빛깔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마리아와 점심을! 레스토랑 창문에서 내려다 본 볼자노 마켓과 광장. 위 가운데의 로젠 가르텐 사진은 엽서를 찍은 것.


P.s. 트레킹과 하이킹을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검색했더니 다음과 같았다.


트레킹 Trekking

전문적인 등산 기술이나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산악 자연 답사 여행.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산의 풍광을 즐기는 여행의 한 형태. 고산 등반을 위한 사전 정찰 등반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하이킹보다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등산 여행. 


하이킹 Hiking

심신의 단련과 수양을 목적으로 해변이나 산야로 도보여행 Walking을 하는 일. 일상생활에서 교외로 벗어나는 산책이나 나들이에서부터 가벼운 등산 등 야외활동을 널리 하이킹이라 한다. 가벼운 옷차림이나 장비로 고원, 평야, 구릉, 해안지대 등을 거닐며 자연을 즐기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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